소설리스트

마왕의 유혹에 넘어간 현자-25화 (25/47)

〈 25화 〉 제24 화

* * *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는 레시의 뒤를 따라 레니스와 레아는 모험가 길드의 위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일 위층인 3층에 도착해 복도를 지나간다. 그리고 중간에 스쳐지나간 몇 개의 다른 문들보다 2배는 거대한 문 앞에서 레시는 걸음을 멈춘 후 말하였다.

“이곳은 원래 길드 마스터님의 방입니다만, 마스터께선 자리를 비우실 때가 많아서 현재 부길드장께서 이곳에서 마스터의 대행 업무를 맡고 계십니다.”

그렇게 말한 후 레시가 문을 세 번 작게 두드린 뒤 문 안쪽을 향해 침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시입니다. 레니스님과 레아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저음의 육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고했네. 들어오시라 하시게.”

“그럼, 레니스님. 안으로”

레시는 문을 열고 부길드장으로 보이는 남자와 레니스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후, 다시 본래 업무를 보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레니스가 안으로 레아와 함께 들어서자, 중앙의 탁자 앞 의자에 앉아있던 리카와 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인사해왔다.

“레니스님, 오셨군요.”

“네.”

그리고 그런 둘의 건너편에는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거대한 바위와 같은 묵직한 존재감을 자연스럽게 내뿜는 남자였다.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의 검은 머리. 매서운 눈매. 외모만 봐서는 30대 중반으로 추정되지만, 검은 정장을 단정하게 입고 있음에도 잘 단련됐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탄탄한 몸이 그를 젊어 보이게 하기에 실제 나이는 40대 초반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아주 잠시 날카로운 눈으로 레니스를 관찰한 다음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부길드장을 맡고 있는 루크 볼드라 한다. 얘기는 많이 들었네.”

그리곤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권했다.

“레니스 프라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레니스 역시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하며 간결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잠시 악수를 나눈 후 손을 떼며 루크가 말했다.

“그래, 일단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지. 레아양도 편하게 앉게. 자네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니까.”

“네.”

그렇게 루크가 앉고 나서 그의 맞은편에 리카, 유이, 레니스, 레아가 나란히 앉자 그가 말을 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렇게 되리라고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군.”

“예, 어느 정도는.”

“그런가…그렇다면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부터 말하겠네.”

“황금사과 상회가 그것도 회주와 그 영애가 동반하는 상행이 습격받았다는 사실은 우리도 소식을 전해 들어서 알고 있네.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상회의 중요인물들이 동행하는 상행은 철저하게 그 진로가 비밀에 부쳐졌을 텐데 습격의 배후들은 정확히 그 진로에 결계를 펼쳐놨다더군.”

“상대방도 보통이 아니란 거겠지…”

그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후, 레니스와 파미유들을 한번 훑어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자체적으로 수집한 정보와 그 현장에 있던 당사자들인 리카양과 유이양에게 당시 일어났던 상세한 얘기들을 듣고, 우리 역시 과거 일련의 실종사고들이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네. 그리고 이에 본격적으로 조사를 하려 하네.”

“그렇군요.”

“그리고 그 일에 자네들이 적임이라고 결론지었다네. 그 자리에 전원이 있었던 만큼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에서 말이지. 어떤가 의뢰를 받아주겠는가? 보수도 넉넉하게 책정하도록 하지.”

레니스로서는 고민할 거리도 없는 얘기였다. 고개를 돌려 파미유 멤버들을 바라보자 그녀들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무언으로 수락하겠다는 뜻을 표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대표로 레니스가 루크에게 답한다.

“알겠습니다.”

“그래, 자네들이라면 걱정 없겠지. 세부적인 건 레시에게 가면 그녀가 알려줄 걸세. 좋은 소식을 기대하겠네.”

“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레니스와 파미유들이 나간 후, 루크 볼드는 창가 쪽에 있는 집무용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며 앉은 후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것은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림 없는 바위 같은 남자인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어딘가 안도의 한숨이었다.

‘실제로 가까이서 직접 보니 훨씬 굉장하군.’

설마 자신이 또다시 자신보다 한참 아래인…자신의 자식뻘에 해당하는 자에게 압도당하는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시절은 지나가서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딱히 얽매이지는 않지만, 자신을 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남자라고 평가해주는 것에 묘한 자부심을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동요해서야. 무심코 자조 섞인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바위라면 그 소년은…바닥을 알 수 없는 고요한 바다였지.’

잠깐 소년에 대해서 엿보려고 했을 뿐인데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에 홀로 떨어진 것만 같은 아찔함을 느꼈었다. 그나마 다행히 실제로 비틀거리거나 하는 추태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소년의 그릇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었다.

‘저 소년이라면 마침 그 일에 딱 적합하겠군. 걱정을 한시름 덜었어.’

루크 볼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내렸다. 그의 시선 끝이 가리키는 곳. 그가 앉아있는 집무실 책상 위에는 한 장의 서신이 펼쳐져 있었다.

은연중 제국에 군림하고 있는 일곱 명의 절대자 중 한 명인 검후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있는 서신이었다.

길드 마스터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조금 걸어 방으로부터 거리가 조금 떨어지자, 파미유 멤버들이 일제히 후우 하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들 그러시나요?”

레니스가 의아해하며 묻자 리카가 대표로 대답했다.

“부길마님은 뭔가 대하기 어렵다고 할까요. 부길마님 앞에 있으면 자꾸 위축된다고 해야 할까….”

“하하….”

뭐…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나저나 마침 적당하려나? 주변에 다른 인기척도 없는 것 같고.

레니스는 리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평소 적극적이던 리카가 막상 당황하며 뒷걸음질 쳐서 레니스에게서 살짝 거리를 벌리려고 했으나, 복도의 벽에 막혀 등이 부딪히고 말았다. 리카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말했다.

“저…저기 레니스님?”

레니스는 그렇게 말하는 리카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 뒤 그녀의 연보라색 긴 머리를 그녀의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리카의 앞섬을 풀어헤치자 리카가 숨을 삼키며, 몸을 살짝 떨더니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레니스는 가슴 안쪽에서 아까 방에서 가져온 상자에서 목걸이를 꺼낸 후 리카의 목에 채워주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갑자기 목에 차가운 감촉이 닿자 리카가 놀라서 작은 신음성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읏…”

그리고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에메랄드 목걸이를 보고 묻는다.

“레…레니스님, 이건?”

“이번에 회주님을 도와드리고 받은 목걸이입니다. 쓸 만한 수호 마법을 걸어놨으니 괜찮으시다면 차고 계셔주시지 않겠습니까?”

레니스의 그런 말에 리카는 평소의 크고 씩씩한 대답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며 수줍은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네…….”

“어머, 어머.”

“레니스님 여자 다루는 게 능숙해지셨어.”

그런 레니스와 리카를 유이는 눈을 빛내면서, 레아는 얼굴에 불그레한 홍조를 띄운 채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레니스가 리카의 목에 목걸이를 채워준 후, 이번에는 유이에게 다가가 일련의 과정을반복하며 유이의 목에도 목걸이를 채워주고 있을 때였다.

여기는───────, 헤렉스 천년 제국의 수도 프레세아의 한복판. 번화가를 걷는 무수히 많은 인파 속에 너무도 이질적인 존재가 하나 있었다.

현인과 일전을 벌여 현인에게 치명상을 입힌 ‘사제’였다.

검은 후드를 푹 뒤집어쓴 것도 모자라, 얼굴에 검은 가면을 써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은닉한 너무도 수상하고 꺼림칙하며 음산한 존재.

도시 한복판에 그런 자가 있으면 주위의 모든 시선을 모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를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마치 그를 아예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사제’는 계획의 실행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져 인파 속을 걸으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자신까지 계획의 실행에 가담하여 확실한 성공을 노릴 것인가, 아니면 혹시 모를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자신은 몸을 숨기고 사태를 관망할 것인가.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현인과의 싸움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었다.

생각보다 소모가 컸다.

자신은 지금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현인을 반드시 죽이기 위해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심연의 밑바닥으로 이 세상을 덮어썼던 것이다. 특히 현인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시전 했던 마법들을 심연의 밑바닥으로 덮어써서 무력화시킬 때 상당한 무리를 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그가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저번의 습격에서 자신들을 막은 정체불명의 꺼림칙한 소년이었다.

‘사제’는 오랜 시간 공들여서 치밀하고 은밀하게 진행해온 계획들이 아주 사소한 악연으로 인해 모조리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태풍이 오면 정면으로 맞설 게 아니라 잠시 몸을 피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조금이라도 꺼림칙한 것들과는 엮이지 않을 수 있다면 엮이지 않는 게 제일 좋았다.

하지만…시간은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 소년의 편이었다. 소년은 무엇보다도 젊었다. 젊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저러할 진데 나중 가면 혹여 만에 하나라도 소년이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면 그땐 손도 못쓰게 될지도 모른다.

때문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지금, 약간의 틈이 있는 지금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소년을 확실하게 죽이지 못한다면 역으로 오히려 자신들이 소년의 성장을 촉진하는 시련을 주게 된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역시 가급적 소년과 엮이지 않을 수 있다면 엮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소년이 그 장소에 나타난 게 단순한 우연이었다면 아직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만약 운명이나 숙명적인 관계로 소년과 자신들이 얽혀있기 때문에 그날 그 자리에 소년이 있었던 거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세상의 대부분은 무언가 원인에 의해 결과가 정해지는 인과율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인과율이 아닌 숙명에 의해 원인 따위 없이 그렇게 결정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고귀한 혈통에서 오는 타고난 인품, 뛰어난 재능,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되어 한 남자가 왕이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왕이 될 운명이었기에 고귀한 혈통에서 태어났고, 인품과 재능이 뛰어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엔 타고난 혈통이 뛰어나지도 않고, 특별한 재능도 없고, 인품도 별 볼일 없는…그야말로 그가 왕이 될 이유라곤 아무것도 없었지만 단순히 그가 왕이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는 왕이 되었다.

라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세상에는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만약 자신들이 아무리 소년을 피하려 해도 소년이 자신들을 가로막을 운명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 앞에 나타나 계획을 저지하려들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오늘 계획의 실행에 가담했을 때 그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 지금의 자신이 확실하게 살아남을 것이라고는 솔직히 장담할 수 없었다.

‘역시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의 행방을 찾아내서 조력을 얻었어야 했나요….'

허나 황금사과 상회를 이대로 방치해두는 것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최소한의 투자로 혹시 결과가 좋게 나온다면 그건 그거대로 대만족이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이번에는 소년과 자신들이 어떠한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대충이나마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르겠군요.'

피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잠깐 스쳐가는 인연에 불과한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엮이게 될 불구대천의 관계인지.

‘이걸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사제는 인파 속에서 사라졌다.

사제가 있었을 때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수 많은 인파들은 그가 사라졌을 때 역시 인지하지 못한 듯 평상시와 하등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자기들 갈 길을 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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