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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유혹에 넘어간 현자-24화 (24/47)

〈 24화 〉 제23 화

* * *

“저…저기…그러니까…그게…”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고, 진정되어 이성을 되찾은 레아가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럴 땐 아무 말 안 하고 상냥한 미소로 맞아주는 게 제일 좋겠지.)

레니스가 그렇게 딱히 별말이 없자, 레아가 풀죽은 목소리로 조심조심 말했다.

“저…정말 죄송합니다. 레니스님. 제가 무슨 실례되는 소릴 한 건지…그만 너무 흥분해서…”

“아뇨. 괜찮습니다.”

“호…혹시 저한테 실망하시거나 그러진 않으셨죠…?”

“전혀요. 오히려 레아양의 의외의 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레니스의 대답에 레아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레니스님은 이런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이상하다라…이상하다기 보다는 무서웠지…여러 의미로. 특히 눈이 무서웠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뇨. 그런 레아양도 귀엽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렇게 말한 후 레니스는 레아를 안심시키려고 레아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줬다.

그러자 레아는 배시시 웃으며 레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레니스의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다 대더니 레니스의 손바닥에 자신의 뺨을 강아지처럼 비비기 시작했다.

“에헤헤…레니스님 정말 좋아.”

어느새 레니스와 레아는 주위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은 채 둘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레니스는 레아의 뺨의 감촉을 즐기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두 분이 보이지 않네요?”

“그러게요. 언니들도 길드에 있을 텐데. 어디 갔지.”

그때 둘에게 말을 걸어오는 침착한 여성의 목소리가 있었다.

“파미유의 다른 두 분께서는 지금 부길드 마스터님과 잠깐 얘기를 하고 계십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하늘색 긴 머리에 차분한 인상의 미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하늘색 머리에 잘 어울리는 서늘한 목소리가 특징인 여성. 무늬가 없는 하얀 블라우스에 마찬가지로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순한 의장의 검은 스커트 역시 그녀의 그런 차분한 성격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모험가 길드 하루살이에서 각종 의뢰의 접수와 정산을 담당하고 있는 레시 트레아였다.

“안녕하세요? 레시 언니.”

“안녕하세요? 레시님.”

레니스와 레아가 그녀를 보고 인사했다.

“네, 덕분에. 두 분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하루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사이가 더 좋아지셨군요.”

레시는 레니스와 레아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도 기쁜 표정을 하는 레아.

“네, 레아양께서 잘 챙겨주셔서.”

레니스 역시 무난하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레니스님, 오늘은 어떤 일로?”

“네, 의뢰를 좀 받을까 해서 왔습니다.”

“그렇습니까…뭐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요. 일단 간밤의 회의를 통해 레니스님께선 규칙상 골드등급이시지만, 그 실력은 무척 높게 평가받아 모든 등급의 의뢰를 받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시 따로 생각해두신 종류의 의뢰가 있으신지요?”

그렇다. 현재 레니스는 골드등급의 모험가로 배정받았다. 모험가 길드가 모험가들에게 제공하는 것 중 가장 큰 것이 일종의 신분증명이다. 모험가들 중에는 많은 수가 자신의 과거를 숨기거나 극단적인 경우는 아예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모험가 길드는 그렇게 과거를 밝히기 꺼려하는 자들에게 과거를 굳이 캐묻지 않는다. 동시에 모험가 길드는 이때 그들의 신분을 어느 정도 보증해주는 역할도 같이 한다. 레니스가 도시에 와서 제일 먼저 모험가 길드에 가입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신분도 확실하고 실력도 확실한 경우에는 곧바로 골드 이상의 등급으로 배정받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골드까지가 한계다. 일단 골드 등급을 받은 이후 실적과 신용을 쌓아서 길드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그 윗 단계로 승급이 가능하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높은 의뢰일수록 때론 모험가 길드뿐 아니라 국가의 현재와 미래를 뒤흔들 정보가 오가기 때문인데, 안보를 위해서 모험가 길드의 시스템을 악용하려는 자를 최대한 걸러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뭐…………, 정말 작정하고 악용하려 하면 얼마나 이 방식이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런 자들조차도 적어도 길드에 상당한 공헌을 해야 하기에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레니스의 경우는 신분이 불확실하여 정보의 접근에는 제한이 있지만, 실력은 인정받아서 모든 등급의 의뢰를 받을 수 있도록 되었나 보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일단은 딱히 무슨 의뢰든 상관없습니다만…행방불명자들과 관련된 의뢰가 있다면 그거로 하고 싶군요.”

황금사과 상회에서 칼 시즈가 말했던 상회를 습격했던 이형의 괴물들은 혹시 그동안 행방불명된 자들의 시체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게 아닐까 했던 말.

딱히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것들을 조사하거나 자신이 전부 해결할 생각까진 없지만, 어차피 보수를 받기 위해 길드의 의뢰를 받아야 한다면, 기왕 하는 김에 겸사겸사 같이 하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 레니스였다.

그런 레니스의 대답에 레시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행방불명된 사람들과 관련된 의뢰 말입니까?”

“네.”

“확실히 최근 제국 내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이 늘었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제국 경비대 측에서도 모험가 길드에 협력을 몇 번인가 요청했었고, 몇 명의 모험가가 의뢰를 맡았었습니다만…조사 결과 딱히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문제가 없었다고요?”

옆에서 듣고 있던 레아가 놀라며 레시에게 물었다.

“네. 행방불명된 사람들은 대다수가 부랑자이거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수소문하여 들은 말에 의하면 평소에도 무척이나 삶에 비관적인 자들이었기에…뒷골목의 항쟁에 휘말렸거나, 도시를 떠나 어딘가 산속에라도 숨어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조용히 살거나, 아니면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조용히 목숨을 끊은 게 아닐까라는 게 그들에게서 올라온 보고였습니다.”

‘뭐…, 상관없나. 애초부터 겸사겸사하려는 거였지.’

길드에서 이미 조사를 했고 그 결과 행방불명돼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들이 행방불명되었을 뿐이라고 결론지은 걸 굳이 나서서 오지랖을 떨며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면서 조사할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다만───────,

‘저 판단은 신원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된 시체로 만들어진 괴물들의 습격이 일어나기 전일 터.’

‘그리고 황금사과 상회에서 일어났던 습격을 적어도 길드 수뇌부들은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겠지.’

‘어느 조직이든지 정보에 예민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정보 수집은 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러한 습격에 관한 정보가 곧바로 목숨과도 직결될 수 있는 모험가 길드라면 특히 신경을 썼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모험가 길드 역시 칼 시즈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과연…그렇다면 리카와 레아를 부른 이유가 그때 상황을 자세하게 듣기 위해서일지도…. 흐음…그렇다면 조금 기다려볼까.’

“그렇군요. 그럼 나중에 이와 관련된 의뢰가 생긴다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글쎄요. 일단 무슨 의뢰들이 있는지 게시판을 보면서 구경 좀 하고 있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편하게 보시길….”

일단 그렇게 대화를 일단락 지은 후 레니스는 자신이 원하는 연락이 올 때 까지 시간이라도 보낼 겸 게시판에 붙어있는 의뢰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뭐지 이 의뢰들은?

모험가 길드에선 이런 의뢰도 받는 것인가…

레니스가 게시판에 붙어있는 희한한 의뢰들을 보며 기막혀하고 있을 때, 레아가 들뜬 목소리로 레니스를 불렀다.

“레니스님! 레니스님!”

“네? 레아양. 무슨 일이시죠?”

“이것 좀 보세요! 정말이지 딱 레니스님을 위한 의뢰에요.”

대체 뭔가 싶어서 그녀가 보고 있는 의뢰서를 보자 거기에는

이라고 쓰여 있었다.

“레니스님이라면 의뢰주를 레니스님의 포로로 만들 수 있을 거라 확신해요.”

“…”

이런 식으로 레아와 즐겁게(?) 다양한 의뢰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레니스는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갈색머리에 약간 째진 눈으로 결코 좋은 인상은 아닌 낯익은 한 남자가 있었다. 어제 레니스에게 신입 환영회를 하려다 거하게 깨진 남자였다.

(이름이 뭐였더라…에안…음…그러니까 에안 제이너라고 했었나.)

다만 어제와 전혀 다르게 남자는 어쩐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특히 레니스가 그를 쳐다봐 눈을 마주치자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건 그러니까…어제 있던 일에 대해 뒤끝이 남지 않도록 사과하러 찾아오긴 했는데 어떻게 말을 걸어야할지 몰라서 우왕좌왕 하고 있는 거려나…?)

하지만 가끔씩 레아를 힐끗힐끗 곁눈질하면서 얼굴을 붉히는걸 보면 단순히 이걸 구실로 레아와 친해져 보려는 거 같기도 하고…

상당히 나쁜 인상에 비해서 행동은 순박하다고 해야 할까.

(흐음~~, 바보일진 몰라도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감상을 말하는 루아.

(어제 같은 일이 생기면 보통은 앙심을 품고 뒤에서 기회가 생기면 널 음해하려고 할 수도 있을 법한데, 어떻게든 꼬였던 첫인상을 회복하기 위해 찾아온 거 보니까 말야.)

강한 자들이 자신과 동급의 강한 자들에게 무너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다. 그리고 그러한 강한 자들은 평소 자신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고 무시했던 하찮은 자들에게 발목을 잡혀 넘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일까?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힌 사람이야말로 자신에게 모욕을 준 상대방의 발목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수 있다면 기꺼이 지옥의 불길에 웃으면서 몸을 내던질 수 있지 않을까?

남들이 보기엔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은 의외로 정말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거에 목숨을 건 사람이야말로 진정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자일 것이다.

레니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오기와 열등감의 마도사 리발 프리드를 떠올렸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짓밟힌 자존심이 만들어낸 대재악의 화신이 아니었던가.

제2, 제3의 오기와 열등감의 마도사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었다.

에안 제이너가 이렇게 자신에게 오는 데까지 굉장히 많은 갈등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 피하고 살자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니까.

정말 상당한 용기를 내고 무너졌던 자존심을 한 번 더 숙였겠지.

(그러니까 여기서마저 내가 그를 무시한다면 그의 자존심은 정말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 나를 진심으로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길 것이다. 그런 게 무서운 건 아니지만, 상대가 어깃장을 부리지 않고 화해하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어서 앞으로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는데, 일부러 적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그러니까…

여기서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도록 하자.

고작 이런 아주 작고 사소한 배려로도 사람은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거다. 오기와 열등감의 마도사의 주변에서도 누군가 뭐라도 좋았으니 그의 장점을 인정해줬다면 그런 큰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레니스가 그런 상념에 빠졌을 때 루아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게 말야. 어쩌면 아주 낮은 확률일지도 모르지만 네가 150세까지 풉…동정이라는 대참사도 푸흡…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뭐 지금 하는 걸 보면 설령 마족과의 전쟁이 아니었어도 너는 여자와 깊게는 못 사귀었을 것 같다만.)

(이번엔…다르다….)

또다시 루아의 뼈가 시리는 정신공격.

기절할 것 같은 의식을 간신히 붙잡은 레니스는 루아에게 불굴의 의지를 담아 간신히 한마디 해준 후, 에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제부로 정식으로 모험가가 됐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편달 부탁드립니다.”

레니스는 에안 제이너에게 상냥한 미소와 함께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그래…….”

그는 눈동자를 휘둥그레 하게 뜨더니 떨떠름 해하면서도 레니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는 조금 낯간지러워하며 레니스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 후 말을 이었다.

“어…어제는 저기…폐를 끼쳐서 미안하다. 사과의 뜻으로 담에 내가 한잔 사지.”

“감사합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그리고…레…레아님도 감사했습니다.”

“아뇨…후후…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네…넵…그…그럼 담에 뵙겠습니다.”

라고 말한 후 에안 제이너는 얼굴을 후다닥 붉히며 길드 밖으로 나갔다.

그런 에안 제이너의 뒷모습을 레아와 레니스가 바라보다가 레아가 말했다.

“레니스님은 뭐랄까…”

“네?”

“도저히 동년배의 소년 같지가 않네요.”

“…”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레니스와 레아에게 좀 전에 헤어졌던 레시가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달려왔다.

“레니스님! 부길드장께서 레니스님과 급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으신 게 있다고 하십니다. 괜찮으신가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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