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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유혹에 넘어간 현자-20화 (20/47)

〈 20화 〉 제19 화

* * *

레니스는 황금사과 상회를 나선 후 칼 시즈가 건네준 커다란 상자를 열어봤다. 그러자 상자 안에는 작은 상자 다섯 개가 놓여있었다.

전부 똑같은 상자 같길래 망설임 없이 그중 아무거나 하나를 열어본다.

그러자 거기에는 레니스가 아스텔에게 선물로 준 목걸이와 똑같은 목걸이가 고급스러운 비단 위에 놓여있었다.

역시나 다른 상자들도 마찬가지.

칼시즈가 레니스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다정함의 반대말은 우유부단이라 했던가…그 자리에서는 단순한 말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나름의 뼈가 있는 말이었군…….)

(으음……, 그러니까 이건 등을 떠밀어주면서 응원해주는 거야?)

(어쩌면 단순히 나와 마찬가지로 이 상황을 재밌어하는 거려나?)

옆에서 그렇게 떠드는 루아의 말이야 어쨌든 간에 그에겐 신세를 졌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대게 돈을 다루는 사람은 손익관계에 철저해야하기 때문에 냉정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는 꽤 정이 깊은 사람 같았다.

(원래는 상인이 아니었을지도…….)

그리고 레니스는 어제 저녁에 파미유 멤버들과 같이 수도를 돌아다닐 때 그녀들이 보석가게에서 다양한 장신구들을 이것저것 착용해보면서 즐거워하던 아름답고, 마음 한편이 따스해지는 모습을 떠올린다.

분명 이 목걸이들은 그녀들에게 아스텔만큼이나 잘 어울릴 것이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고, 모험가 길드에 가서 의뢰도 받을 겸 겸사겸사 약간의 정보 수집을 하려 했는데, 이것들을 다 들고 가는 건 무리겠지. 조금 돌아가게 되더라도 여관 은의 눈물에 들려서 놓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은 여유 있으니 크게 상관없겠지.)

레니스는 그렇게 곧바로 모험가 길드에 가려던 걸음을 옮겨 숙소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파미유들은 지금쯤 뭐하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레니스는 어느새 여관 은의 눈물 제일 위층에 있는 방문 앞에 도착했다.

별생각 없이 문을 벌컥 열려다가 안에 인기척이 있는 걸 깨닫고는, 조용히 세 번 문을 두드리려다가 안의 상황을 깨닫고 노크하길 멈췄다.

괜히 문을 벌컥 열었더니 옷을 갈아입는 중이라 속옷 한 장 차림이라든가, 혹은 속옷을 갈아입고 있던 중이라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든가 해서 서로 얼굴을 붉히고 어색해지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것도 가급적 피해야겠지만….

“읏…하아….”

방 안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희미한 신음성. 안타까운 한숨 소리.

이건…

어…

음…

그래……, 조금 있다가 다시 오도록 할까.

레니스는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각나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건물 뒤편으로 가서 목걸이에 아스텔에게 걸어줬듯이 부여마법이라도 걸고 앉아서 적당히 시간 좀 때우다가 오자.

주점 뒤쪽에 있는 작은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은 후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순식간에 아스텔에게 줬던 목걸이에 걸었던 수호마법을 칼 시즈에게 받은 5개의 목걸이에도 걸었다.

지금은 딱히 주변에서 보는 사람도 없기에 능력에 제한을 걸 필요가 없어서 아까와 같은 밝은 빛은 일어나지 않고 순식간에 부여 마법을 끝냈다.

그리고 그대로 앉아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지금쯤이면 슬슬 다시 올라가도 되겠지.

주점 은의 눈물 안으로 들어온 뒤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아무 문제 없기에 조용히 문을 3번 똑똑똑 두드렸다.

노크 소리를 듣자 문 안쪽에서

“자…잠시만요!!!”

라는 레아의 목소리가 들린 후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그 후 레아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누구세요?”

“레아양 접니다, 레니스.”

그 말을 듣자 레아가 문을 활짝 열어주며 반가운 목소리로 레니스를 맞아주었다.

“레니스님, 어서 오세요. 일찍 돌아오셨네요!”

레아가 살짝 달뜬 얼굴에 묘하게 흐트러진 복장으로 그렇게 말하며 레니스의 귀환을 반겼다.

“예, 원래는 곧바로 모험가 길드에 가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잠시 방에 들러서 놓고 나가야 할 게 생겨서.”

“그러시군요. 얼른 들어오세요.”

“네.”

방안에 들어서자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짝 시큼하며 달콤한 자극적인 냄새가 남아있었다.

저렇게 청순하고 가련한 레아양이 조금 전까지 이 방에서 달뜬 숨소리와 안타까운 신음성을 내며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걸 상상하자 묘하게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게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특히 파미유 멤버들은 항상 셋이 같이 있었는데 다른 두 명이 보이지 않고, 이렇게 레아와 단둘이 있으니 더욱 그랬다.

그때 레아가 레니스에게 물어왔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나요?”

“네, 황금사과 상회에서 많은 배려를 해주셔서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그러셨군요. 다행이에요.”

환하게 웃는 레아.

“그러고보니 다른 두 분은 어디 가셨나요?”

“네, 언니들은 모험가 길드에 잠깐 용무가 있다고 오전에 나갔습니다. 저는 숙소도 지킬 겸 레니스님이 오셨을 때를 대비해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레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은 후 안에서 목걸이 한 개를 꺼냈다. 레아가 그 목걸이를 보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감탄했다.

“굉장히 아름다운 목걸이군요.”

“네, 이번에 회주님을 잠깐 도와드리게 됐는데 그 보답으로 받았답니다.”

레니스는 그렇게 말한 후,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면 받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꽤 괜찮은 수호마법을 걸어놔서 예상치 못한 위험에 처하셨을 때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레니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열심히 위아래로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곤 레니스에게서 천천히 등을 돌린 후 다소곳한 손짓으로 자신의 뒷머리를 올려 그녀의 목덜미가 잘 드러나게 한 후 말하였다.

“레니스님,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익숙(?)한 상황이었기에 레니스는 부드러운 어조로 상냥하게 대답한 후, 그녀의 등 뒤에서 껴안듯이 서서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폐쇄된 방안에 단둘이서 있어서일까.

좀 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스텔에게 목걸이를 채워 줬을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과 부끄러움이 장내에 흘렀다.

레아와 레니스 두사람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방안에 선명하게 울렸다.

조금 긴장한 듯 몸이 뻣뻣하게 굳은 레아의 목에 딸깍 소리를 내며 목걸이를 채우고 레니스가 그녀에게서 떨어지려 했을 때였다.

레아가 몸을 돌리더니 두 팔을 레니스의 목을 감싸듯이 끌어안고, 살짝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도 배시시 웃으며

“보답이에요. 모험가 길드로 가실 거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그렇게 말하곤 후다닥 도망치듯이 방을 나가 1층으로 뛰어서 내려간다. 그녀의 미소와 볼에 닿았던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의 여운에 잠겨 레니스는 한동안 넋을 잃고 그 자리서 가만히 서 있었다.

한편….

여기는 주위의 인적이 드문 제국 변방의 상공.

수도 근처에서의 대결이 길어져 현인의 지원 세력이 오거나 용자가 제국에 새겨 넣은 저주가 발동되는 것이 껄끄러웠던 ‘사제’와 제국의 일반인들을 인질로 삼고 그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초월 마법을 사용하려는 사제를 그곳에서 떨어뜨리려는 ‘현인’.

각자의 목적이 일치해 둘의 전장은 어느새 수도 상공에서 순식간에 인적이 드문 제국 변방으로까지 옮겨져 있었다.

자신을 철저하게 어둠 속에 숨긴 사제의 등 뒤로 검은 기운이 응축되더니 아주 미세한 시간 차를 두고 검은 광선들이 폭발하여 현인을 향해 날아가 첫 번째 광선이 현인을 꿰뚫었다.

그러나 검은 광선에 꿰뚫린 현인의 모습이 일그러지며 그 자리서 사라지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현인이 나타남과 동시에 시간 차를 두고 쏘아졌던 검은 광선이 마치 그 자리에 현인이 나타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현인을 꿰뚫으려 한다.

고개를 살짝 비틀어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피한 현인이었지만, 어느새 수많은 검은 광선이 현인의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일제히 현인에게 부딪혀 폭발하려는 순간 현인의 앞에 진홍색의 육망성이 떠오르더니 무수한 검은 광선들과 부딪히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그 직후 폭발의 여파로 피어난 연기와 상공에 떠 있는 구름을 단숨에 꿰뚫으며 진홍색의 너무도 가느다란 한줄기 섬광이 사제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흥”

사제가 코웃음을 치며 로브자락을 펄럭이더니 자신의 눈앞까지 온 붉은색의 한줄기 섬광을 손으로 쳐내 방향을 비틀었다.

사제에 의해 방향이 바뀐 진홍의 섬광은 너무도 가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면에 부딪히자 어마어마한 폭발과 함께 지면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사제가 재차 다음 공격을 하려던 차였다.

어느새 그의 바로 앞에 현인이 시전한 번개의 기운이 응축된 구체가 들이닥쳤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검은 기운이 사제를 삼키더니 어느새 사제는 그 자리서 사라져 다른 장소에 있었지만, 번개의 구체 역시 눈 한번 깜빡일 찰나의 순간에 다시 사제를 따라와 있었고 이번에는 피할 틈도 반응할 틈도 없이 사제에게 부딪히더니 연이어서 열두 번 폭파하였다.

하지만 현인은 방심하지 않고 차분히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현인 앞에 손바닥만 한 붉은색 오망성이 그려진다. 그리고 현인의 손에서 진홍의 섬광과 마력을 응축한 구체들이 그 오망성 마법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순간, 섬광과 마력의 구체들이 몇 배로 가속하여 사제를 향해 쏘아졌다.

동시에 현인의 앞에 있던 붉은색의 오망성 마법진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푸른색의 오망성 두 개가 엇갈려 겹쳐져 있는 마법진이 생겼다.

현인의 주위로 7개의 빛나는 구체가 생기더니 일제히 그의 앞에 엇갈려 겹쳐져 있는 마법진의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그러자 각각의 구체가 10개씩 복제되더니 총합 70개의 구체가 사제를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하늘에 어지간한 마을 하나쯤은 너끈히 들어갈 만큼 거대한 빛의 원이 생기더니 그 안에 다시금 빛나는 육망성이 생긴 후, 육망성이 빛을 발하더니 이 일대를 초토화시킬 빛의 기둥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려 했다.

그렇게 현인이 사제를 마무리하기 위해 사제를 몰아붙인 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넓은 범위에 걸친 광역마법을 시전하려 했을 때였다.

그보다 미세하게, 실로 아주 약간의 차이로───,

현인은 자신의 발밑으로부터 정수리까지, 거대한 창이 한순간 자신의 온몸을 꿰뚫어 버리는 것만 같은 지독한 느낌에 소름이 쫙 끼쳐 무심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현인의 발밑에는 그가 하늘에 그렸던 마법진과도 비슷할 만큼 커다란 크기에 너무도 거대한 검붉은 눈이 있었다.

그 거대한 눈은 감겨져 있었는데,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키고 그곳에 있는 모든 사악한 것들을 멸할 빛의 기둥을 현인이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쏘기 바로 직전에 먼저 눈을 떴다.

그 사악으로 가득찬 눈이 떠지자 그 눈동자를 중심으로 마치 온 세상이 순식간에 암흑과 피에 물들어 녹아내리기 시작했으며, 현인의 마법진 역시 어느새 그 눈동자에 의해 바뀌어버린 세상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녹아내리기 시작하며 마치 별세계가 되어버린 공간이 징그러운 눈동자로 하나둘씩 온 사방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 눈동자들이 일제히 무수한 검은 피를 눈에서 흘리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현인이 마치 온 세상이 터져나가는 것만 같다고 느낄 만큼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모든 것이 폭발에 휩쓸려 초토화가 된 상공에는 사제만이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은 멀쩡한 모습으로 표표하게 떠 있었다.

‘놓친 건가요……, 정말이지 도망치는 재주 하나는 탁월한 노인네로군요. 그러나 손맛은 있었습니다. 그다지 멀쩡하지는 않을 터….’

사제는 그 자리서 고민에 빠져 현인과의 싸움에 관한 손익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겉으로 드러나선 안 되었다. 그러나 현인을 죽이는 데에 성공만 한다면 실패했을 때와 비교해서 잃을 것에 비해 너무도 큰 결과가 따라오기에 어쩔 수 없이 결계 밖으로 나온 현인을 꾀어내 사냥에 나섰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손해가 약간 더 큰 건가….’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다음이었다. 이번 전투로 얻은 것 또한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인 역시 치명상일 터.

생존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게 안 좋은 결과도 아니군요….’

사제는 만족해하며 자신이 원래 하려던 일을 하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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