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제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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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다시 레니스와 황금사과 상회 회주 일가가 점심을 함께하고 있는 로비. 레니스는 칼 시즈에게서 들은 흑상(??)이라는 집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흑상이라……….)
(검은 상회……, 아니 죽음의 상회 일려나?)
인간을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무언가를 위한 실험 재료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그 죽음조차 모독한 배후로 가장 유력한 집단.
실로 꺼림칙한 이름이었다. 마족이 사라진 후 암흑시대가 끝나고 빛의 세상이 열렸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 빛 아래에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나 보다.
(오히려 인간이 인간을 학대하고, 인간이 인간에게 핍박받는다는 점에선 이쪽이 더 씁쓸할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레니스는 일단 그 이름을 마음속 깊이 기억해두기로 했다.
도박장을 알선한다든가, 매춘을 관리한다든가, 그런 빛이 닿지 않아 무질서한 음지에 있는 경제에 나름의 질서를 부여하고 관리하며 거기서 수익을 창출하는───,
그런 인간의 본성에 기생하는 필요악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실로 흉흉한 조직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흑상이라………, 설령 그들이 이번 습격의 배후가 아니더라도 주의해야 할 불길함이 묻어나는 집단이란 점은 분명하겠군요.”
“그렇지. 그래서 우리도 항시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려고 애쓴다만 쉽지 않군.”
“그 외에 달리 또 짐작 가시거나 신경 쓰이는 곳은 없으십니까?”
“그거에 관해서 말인데 습격의 배후는 아니네만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다네.”
레니스는 조용히 칼 시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워낙 시체가 그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존엄성을 짓밟히고 훼손당하여 짐작일 뿐이네만 최근 유독 실종자가 많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왠지 이번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라네.”
“그렇습니까……, 확실히 그 가능성은 높군요.”
“게다가…”
그는 잠시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되는지 말끝을 잠깐 흐렸지만, 이내 수상쩍은 것들은 이 기회에 전부 레니스에게 털어놓기로 했는지 말을 이었다.
“페블 위크라고 가끔 우리상회에 일을 도와주러 오는 모험가가 있는데 말이지…….”
“네.”
“오늘도 원래 모험가 길드서 의뢰를 받고 오기로 했었는데 말도 없이 안 온 것도 조금 신경 쓰이는구먼. 비록 예전같이 의욕에 불타는 모험가는 아니고 현실에 안주한 친구네만, 그만큼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단 말이지.”
비록 칼 시즈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레니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재력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형태의 하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이런 식으로 은퇴하거나 그와 비슷할 정도로 생활이 막막해진 모험가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일감을 만들어서 보수를 주는 건가.)
(헤에~~상인치곤 보기 드무네. 상인은 마족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어제오늘 황금사과 상회서 봤던 노동자들을 떠올린다. 확실히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장 단순한 노역을 하는 자조차도 다른 곳과 비교하면 얼굴이 환한 편이었다.
칼 시즈는 흑상에게서 단순히 지하 경제를 관리하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닌 재력을 사용하여 사람을 타락시키고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려는 게 아닌가 라는 의도가 느껴진다고 하였는데 황금사과 상회는 그것과 완전히 반대였다.
(두 집단 다 극단적이네. 정말로 이질적이야. 자연적으로 이러한 상회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확실히 루아의 말대로였다.
흑상도 이질적이었지만, 황금사과 상회 역시 그에 못지않게 이질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레니스는 그 이상 파고들기를 멈췄다.
이질적이면 어떤가. 설령 그것이 배후에 있는 누군가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만든 위선의 결정체인들 어떠한가.
의도야 어찌 되었든 그로 인해 도움을 받는 자가 있고, 구원을 받는 자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레니스가 식사를 하면서 그렇게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을 때였다.
칼 시즈가 화제를 전환했다.
“자자, 딱딱한 얘기는 이만하고, 혹시 간밤에 지내시면서 불편한 점은 없으셨소, 레니스 도령.”
“네. 회주님의 배려로 좋은 숙소에서 편하게 지냈습니다.”
레니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예를 표했다.
“아니오. 그 정도는 당연한 거지. 그 외에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시구려. 허허…그러고 보니 파미유 멤버들과 한 방에서 같이 지냈다는 소문도 들었소만.”
“예…어쩌다니보니…….”
그러자 칼 시즈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눈으로 말했다.
“본인도 10년만 젊었어도…….”
그러자 옆에 있던 그의 부인이 그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핀잔을 주었다.
“10년만 젊었으면 뭐요?”
헛기침을 하며 말을 흐리는 칼 시즈.
“흠흠…아…아무것도 아니오, 부인. 내가 잠시 어떻게 됐나보오.”
그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아스텔이 레니스의 손을 부드럽게 쥐며 어마어마한 발언을 했다.
“저도 레니스님이랑 밤에 한 방에서 같이 지낼래요…….”
그러자 어머! 어머! 하면서 입가를 가리고 미소 짓는 레이윈 시즈와 반면에…
“따…딸아. 이 아빠 심장 멈출 거 같으니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렴. 물론 레니스 도령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다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란다.”
그렇게 식겁하며 자신의 딸을 만류하는 칼 시즈에게 아스텔 시즈가 인정사정없는 일격을 날렸다.
“진담이에요.”
“호호호, 딸아이가 당신이 어지간히 맘에 들었나보군요. 그래요, 레니스 도련님. 기왕 말 나온 김에 이대로 사위로 들어오는 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여보, 당신까지?”
“당신은 조용히 있어요.
“넵!”
그러한 대화가 오가며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문밖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다급함이 충분히 전해지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회주인 칼 시즈가 허가하자 말끔하게 검은색 집사복을 입은 한 노인이 들어와 공손하게 칼 시즈를 향해 인사했다.
“오늘은 중요한 은인을 모시는 자리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뒤로 미뤄두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칼이 말하자 노인이 송구스럽다는 듯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회주님. 허나 시급을 다투는 문제라 여겨졌기에….”
그렇게 말하며 노인은 칼 시즈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노인의 얘기를 들으며 칼 시즈의 눈이 커졌다.
노인이 귀엣말을 끝내고 칼 시즈에게서 떨어져 공손히 고개를 숙인 후 물러나자 칼 시즈가 어두워진 얼굴로 면목 없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하네, 레니스 도령. 드워프들과 거래를 하고 돌아오는 중에 습격을 받아서 문제가 생긴 것 같네. 미안하네만 나는 먼저 자리를 뜰 테니 천천히 드시게. 다음에 벌충하도록 하지”
“아닙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저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주인에게 급박한 일이 생겼는데 손님인 레니스가 느긋하게 식사를 마저 하는 것도 도의가 아닌지라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해서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아스텔이나 레이윈은 식사를 마저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스텔이 레니스한테서 떨어지기 싫은지 그의 손을 꼬옥 잡은 채 같이 일어섰고, 부인인 레이윈 역시 남편의 일을 거들기 위해 결국 다 같이 이동하게 됐다.
이동하는 도중 레니스는 앞서 걷고 있는 칼 시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물을까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외부인인 내가 저쪽에서 먼저 부탁하지 않은 이상 상회의 일에 필요 이상으로 나서서 개입할 필요는 없겠지.)
(물론, 정말 곤란에 처했는데도, 폐가 된다고 생각하여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건물 밖으로 나오자 그곳에는 격렬한 전투와 도주로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자들이 겨우 안전한 곳에 도달했다는 안도감에 주위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아있었다.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회주인 칼 시즈가 보이자 그들이 일어나서 예를 갖추려 하자 칼 시즈가 그들에게 먼저 말했다.
“고생들 했을 텐데 편하게들 앉아있게.”
레니스 역시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여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사태의 추이를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행으로 타인을 격려하고 따스함으로 보듬으려 노력하는 이들이 곤경에 쳐했기에 그가 미약하게나마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주고 싶다는 게 본심이다.
그렇게 레니스가 이곳에 일단 남아서 도울 게 있다면 돕겠다고 정했을 때였다.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일어나 칼 시즈에게 상세한 피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회주님, 면목이 없습니다.”
“아닐세. 무사히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지.”
“감사합니다. 천만다행으로 물품들을 약탈당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전투와 도피 도중 정체불명의 마도사들에게 거래품들 중 상당수가 몹시 심하게 손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화물에 손상을 줄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재물의 약탈을 노린 게 아니라, 우리들이 입을 손해를 최대화하는 게 목표였단 건가?”
“네. 소인이 느낀 바로는 그랬습니다. 습격 자체가 재물의 약탈을 통한 직접적인 이득을 위해서라기보단 저희들이 손해를 입는다면 자신들의 이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습격자들의 정체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그들과 저희의 관계가 좋지 않은 관계인 건 분명하기에 저희가 이득을 보지 못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이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만….”
“그런가…. 알겠네. 고생했군. 뒤는 맡기고 다들 들어가서 쉬게나.”
“감사합니다.”
행상에 나섰다가 돌아온 상인들과 그들을 호위하던 자들이 안으로 다 들어가자 칼 시즈가 짐수레로 가서 물건들의 손상 정도를 확인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부인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부인 어떤 거 같소. 복구마법으로 가능하겠소?”
남편의 말에 부인인 레이윈이 짐수레로 다가가서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마찬가지로 낯빛을 구기고 말았다.
“그래도 어지간한 것들은 저와 아스텔이 애쓰면 가능하겠지만……, 가장 핵심인 드워프들의 세공이 들어간 보석들만큼은 단념해야 할 거 같군요. 이렇게 세심하고 정교한 문양과 부여마법마저 걸렸던 장신구들의 복구는……, 스승님조차 어떠실지.”
“그렇겠지…그래도 살아만 있다면 손해는 언제든지 복구할 수 있는 법. 그들이 큰 상처 없이 무사히 온 것만으로 만족하오.”
“여보…”
그렇게 말하며 서로의 손을 마주 잡는 두 사람. 실로 마음 따스해지는 광경이다.
아스텔은 레니스의 손을 잡은 채 그런 두 사람을 조금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레니스가 그런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자 그녀가 물끄러미 레니스를 올려다봤다.
“아스텔양,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에요.”
“고마워요…….”
“아뇨.”
그렇게 레니스는 아스텔의 손을 잡고 칼 시즈와 레이윈에게 다가가 말했다.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잠깐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폐…폐라니 무슨 말인가 레니스 도령. 오히려 우리가 자네에게 괜한 신경을 쓰게 해서 미안할 지경이라네….”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 칼 시즈에게 부드럽게 답하며 레니스는 짐수레 안에 들어있는 것들 중 가장 문제가 되는 드워프들이 만든 장신구들을 살펴봤다.
거기에는 섬세하고 복잡한 문양이 세공된 붉은 루비가 박혀 있는 금으로 된 반지와 목걸이가 있었다.
그중 하나를 들고 자세히 살펴본다.
과연……, 드워프들이 세공한 보석에 엘프들이 부여마법을 건 것인가…다른 것들은 일정수준 이상의 마도사가 며칠 애쓰면 그럭저럭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은 힘들겠군.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것은 아니어서 어떻게든 될 거 같습니다.”
물론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됐어도 레니스에겐 복구하는 게 쉬웠지만, 다른 사람에게 불가능한 걸 너무 쉽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그다지 어른스럽지 못하기에 겸손하게 말했다.
“그…그게 정말인가 레니스 도령. 허…허나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자네에게 자꾸 은혜만 입는구먼.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그렇게 이곳에 있는 마도사인 레니스와 아스텔, 그리고 아스텔의 어머니이자 칼 시즈의 부인인 레이윈 셋이서 복구마법으로 손상된 것들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
레이윈은 자신의 손에 들린 금이 간 아뮬렛을 복구하면서 마찬가지로 사이좋게 다른 장신구들을 복구하고 있는 자신의 딸과 레니스를 바라봤다.
‘남편한테서나 딸한테서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승님한테서까지 바닥을 알 수 없는 굉장한 소년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이건 정말 상상을 초월하네.’
단순히 금이 가거나 깨진 것들을 복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20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소년이 그 안에 깃들어있는 엘프들이 부여한 마법까지 수월하게 복구하다니. 레이윈 자신도 직접 보지 않았으면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그랬을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딸의 즐거운 표정.
딸이 저렇게 즐거워하는 표정은 자신도 처음 보았다.
딸의 일방통행인 호의면 부모로서 몹시 걱정했겠지만……, 보아하니 저 소년도 부드럽게 웃으면서 계속 딸의 응석을 받아주는 거 보면 그렇게 싫은 눈치는 아닌 거 같고.
얼핏 보면 소녀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 나이에 비해 터무니없는 실력, 주위 공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온화한 성격.
‘응…,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
그렇게 생각한 레이윈은 딸에게 다가가 딸의 머리를 대견하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네가 워낙 이성에게 관심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의외로 엄마 닮지 않고 남자 보는 눈 하나는 확실하구나. 정말 좋은 남자를 데려왔네? 이 엄마는 지금 몹시 안심했단다.”
부인의 그 말에 칼 시즈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여…여보…방금 그게 무슨 말이오. 자기 닮지 않아서 남자 보는 눈이 확실하다니…”
그런 남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윈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 소년이라면 상회도 훌륭히 운영할 수 있을 거야. 태어날 아이도 기대되는구나.”
그리고 아스텔은 그녀의 어머니인 레이윈의 말에 어딘가 자랑스러운 듯이, 혹은 기쁜 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아……, 너무 무섭다.)
그런 아스텔과 레이윈 두 모녀의 대화를 들으며 루아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그렇게 레니스에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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