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제16 화
* * *
고양이가 나무 위에 올라가 녹은 치즈처럼 푹 늘어지게 누워서 나른한 오후의 햇살을 즐기듯이 레니스의 무릎을 베고 누워 눈을 감고 따스한 햇살을 만끽하고 있는 카렐렌.
딱히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레니스 역시 멍하니 햇살을 쬐며 허공을 바라보거나 가끔 그녀의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는데,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빠르게 흘렀는지 해가 벌써 중천에 가까워졌다.
(이런 것도 나름의 맛이 있네.)
루아 역시 영체화 한 상태로 레니스 옆에 앉아서 따스한 햇살과 함께 조용하고 평온한 시간을 즐기다가 말했다.
(그렇지….)
확실히 과거에는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느라 여유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마족을 없애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그렇게 지냈기에 물론 그렇게 해서 얻은 것도 많지만, 정말 소중한 것들 역시 그만큼 잃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의외로 등불을 이미 손에 들고 있으면서 빛을 찾아 헤맸던 걸지도…….’
하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떨까라고 잠시 생각을 해본다. 물론 전부 가정일 뿐이겠지만, 아마 나는 필사적으로 고뇌하면서도 또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정녕 진정으로 이 방법뿐이 없는 겐가? 다시 생각할 순 없는 겐가?’
어째선지 어울리지 않게 나에게 울먹일 것 같은 얼굴로 필사적으로 손을 내밀며 호소하던 용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갔을 때 다른 선택을 할 정도의 각오였다면 그때 이미 용자의 손을 잡았겠지.
…
카렐렌은 레니스에게 점심때가 가까워지면 깨워달라고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몸을 몇 번 작게 뒤척이더니 기지개를 쭈욱 피며 일어났다.
뭐…말로만 잔다고 한 거지 정말 잠들었다기보다는 편안히 눈을 감고 이것저것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했다고 봐야 할 거다.
그녀는 레니스를 보며 입을 조금 벌리고 가볍게 배시시 웃더니
“폐를 끼치고 말았네.”
“아뇨.”
“후후…오후에는 일이 있어서 오전 중에 검술훈련을 봐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나버렸네.”
“괜찮습니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나는 지금부터 검후의 탑으로 가야 하는데 같이 갈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다음 기회에 부탁드립니다.”
“그래…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 한동안은 매일 아침 여기서 수련을 하도록 해. 가끔씩 들려서 봐줄 테니까.”
“…노력해보겠습니다.”
“뭔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답변인데….”
“하하….”
“뭐어, 상관없나. 그나저나 뭔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정말 중요한 것들은 모험가 길드에 전언을 남기거나 검후의 탑에 와서 날 찾거나 내가 없으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도 되겠지만…음…”
어쩐지 즐거워 보이기에 아무 말 안하고 그녀의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 여기 나무 아래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남겨둬. 알았지?”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나무에 작게 표식을 새겨 넣었다.
“네.”
“좋아, 그럼 다음에 또 봐.”
…
그렇게 카렐렌과 헤어진 후 레니스는 오늘 점심 약속을 한 황금사과 상회로 걸음을 옮겼다. 상회에 도착하자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이 레니스에게 용무를 물어왔다.
“실례지만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 저는 레니스 프라비라고합니다. 오늘 회주님과 약속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런…상회의 은인을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아뇨…, 그렇게까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문지기에게 말하였다.
“자네는 먼저 가서 레니스님이 오셨다고 알려드리게.”
“예.”
그렇게 대답한 후 빠른 걸음으로 먼저 안으로 들어가는 문지기.
“어제 회주님께 레니스님께서 오시면 최우선으로 모시라고 미리 언질을 받았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에 비해 한참 어린 외모의 레니스에게 하도 극진한 예를 갖추길래 레니스 역시 공손히 답했다.
그러자 그가 레니스의 태도에 놀랐는지 살짝 눈을 크게 뜨더니
“굉장한 실력자이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네?”
“아뇨…보통 젊은 나이에 굉장한 실력자이신 분들은 뭔가 고압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으신데, 그렇게 자신을 과시하시거나 타인을 압도하려는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으셔서….”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저야말로 괜한 소리를…. 다 왔습니다. 저는 여기까지.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거대한 문 앞으로 레니스를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그 문 앞에 있던 경비병이 안에 레니스가 왔다고 알려주자 문이 열리고, 레니스의 모습을 확인한 아스텔이 가볍게 뛰어와 그의 품속으로 포옥하고 뛰어들었다.
“오셨어요?”
무척 반가운 얼굴로 레니스의 허리를 살짝 끌어안고 그의 가슴팍에 자신의 뺨을 천천히 부비는 아스텔.
레니스는 그녀의 가늘고 윤기 나는 은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잘 지내셨어요? 아스텔양.”
“네, 무척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아스텔과 그렇게 인사를 나누자 리노아가 인사해왔다.
“오셨습니까, 레니스님.”
“네. 리노아님도 잘 지내셨나요?"
“예, 덕분에. 회주님께서도 곧 내려오실 겁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그렇게 레니스는 리노아가 안내해준 자리에 앉았다. 아스텔은 그런 레니스의 바로 곁에서 그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꼬옥 쥐고 앉았다.
한편…레니스를 상회 입구에서부터 안내해줬던 문지기는 레니스를 안내해준 후 다시 상회의 대문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계단을 올라가 위층에 있는 한 방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도 있기에 공손히 문을 두드린다. 그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매력적인 여인의 목소리. 문을 열고 그가 들어가자 그 안에는 아스텔 시즈와 같은 긴 은발의 중년 여성이 황금사과상회의 회주인 칼 시즈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적어도 30대를 넘어 어쩌면 40에 가까운 나이일 터인데도 그 외모는 20대 후반처럼 보였다.
그런 황금사과 상회에서 실질적인 2인자인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던 경비병을 향해 공손하게 물었다.
“그 소년은 스승님의 눈에는 어땠나요?”
여인이 그렇게 물었을 때 경비병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한 노인이 있었다.
“나로서도 그 소년의 바닥을 알 수 없더구나….”
노인의 그 말에 여인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드문 일이군요.”
드문 일 정도가 아니라 여인이 알기론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자의 탑에서도 매우 뛰어난 재능과 그에 걸맞은 노력으로 최상위 마도사에 오른 자신과 자신 못지 않은 딸아이에게조차 그럴싸한 칭찬 한번 해준 적이 없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놀라기는 아직이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여인과 그의 남편인 칼 시즈는 경악하고 말았다.
“13명의 절대자들 중에서도 스스로를 왕의 그릇이라고 치부하는 6명의 절대자들과는 분명 다른 세속에 초탈한 느낌이다만…새로운 왕의 자질을 가진 자의 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이나마 들더구나.”
“흥미롭군요. 그동안 이성에 무관심했던 딸아이가 유독 따른다고 하길래 어떤 소년인가 했는데…배후 세력이 있는 걸까요?”
“글쎄다…. 설령 있더라도 저만한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세력이라곤 나는 한 곳밖에 모르겠다만…, 적어도 이번에 한해선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겠지.”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제왕이 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저주받은 그릇’을 떠올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바로 돌아가실 건가요?”
“그래, 오랜만에 제자 얼굴도 봤고 슬슬 돌아가야지. 신경 쓰이는 것도 있고….”
그렇게 말하며 잠시 하늘을 쳐다보는 노인.
“그럼 노인네는 먼저 가보마.”
“오늘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아스텔은 내게도 손녀 같은 아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노인이 그렇게 말하자 칼 시즈와 여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표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고개를 들자 노인은 두 사람의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
잠시 후
레니스는 지금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뭘까 이 분위기는….’
분명 구해준 것에 대한 사례로 서로 부담 없이 가볍게 점심이나 한 끼 같이 하자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째선지 결혼을 앞둔 남녀가 상견례하기 전에 여자측 부모님께 인사하러 온 것만 같은…그런 분위기였다.
‘…사실 그런 건 해본 적도 없고, 본적도 없지만 말이지.’
(뭐야, 지금 그건? 설마 나한테 웃으라고 한 거?)
(아니, 한번 해보고 싶어서….)
나름 회심의 자학적인 재담이었는데, 입꼬리에 미동도 없이 루아가 정색하면서 핀잔을 주어 레니스는 조금 기가 죽었다.
지금 레니스의 왼쪽에는 리노아가, 오른쪽에는 아스텔이 레니스의 소매 끝을 살짝 꼬옥 잡고 있었고, 그런 레니스와 아스텔의 맞은편에는 상회의 주인이자 아스텔의 아버지인 칼 시즈와 아스텔과 같은 은색 머리카락으로 보아 아스텔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미모의 여성이 앉아있었다.
“남편과 딸아이에게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먼저 남편과 딸아이를 구해주신 것에 감사 인사드립니다, 레니스님. 저는 레이윈 시즈. 부족하지만 상회의 안주인을 맡고 있는 몸이랍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부인. 저는 레니스 프라비라고 합니다. 일개 어린 모험가일 뿐이니 편하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후후…, 저도 그럼 남편과 마찬가지로 레니스 도련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예, 부인.”
“자, 서로 소개가 끝났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식사를 들면서 하도록 하지.”
그렇게 칼 시즈가 말하자 문이 열리며 사용인들이 요리를 내왔다.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여 너무 호화로운 요리를 내오면 식사를 대접받는 사람이 부담을 느낄까봐 고급스러운 재료를 엄선하여 사용했으면서도 과시하는 느낌이 없는, 정말이지 깊은 정성과 배려가 느껴지는 요리였다.
쫄깃쫄깃하게 훈제된 새고기를 먹으며 레니스는 우선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일전의 습격과 관련된 배후는 알아내셨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무력이나 권력이 아닌 재력을 통해 보다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상행위를 한다지만, 돈이 얽힌 이상 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 보니 사실 확신은 못 하겠네. 우리 자신이 의식도 못 한 채 깊은 원한을 샀을 수도 있으니 말이지….”
칼 시즈의 얘기가 저걸로 끝이 아닐 거 같기에 레니스는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허나…한 곳 짚이는 곳이 있다네. 우리와 가장 치열하게 상권을 두고 다투는 곳이지. 바로 흑상이라는 집단이라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밝은 곳에서 이권을 추구하고, 우리뿐 아니라 보다 많은 이들의 행복을 위하는 상회라면, 그들은 뒷 세계. 소위 말하는 도박, 매춘, 약물 등이 얽힌 지하 경제를 꽉 쥐고 있는 상회라네.”
“어째서 그런 자들이?”
서로 영역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있는 만큼 굳이 이렇게 직접 노릴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기에 레니스가 되물었다.
“지당한 물음일세. 자네 말대로 본래 그들과 우리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네만…최근에 그들은 단순히 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재물을 이용해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에 더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라는 움직임을 보이다 보니 그들과 우리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된 게지.”
…
한편…, 레니스가 황금사과상회에서 점심을 먹으며 상회의 주요 인물들과 얘기를 할 때였다.
수도 프레세아에서 조금 떨어진 숲의 까마득한 상공에 한 남자가 떠 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고, 검은 로브에 달린 후드를 푹 뒤집어쓴 채, 마지막으로 얼굴에 검은 가면을 써서 자신의 정체를 어둠으로 둘러싸 완벽히 가린 자.
일찍이 페블 위크의 앞에 나타나 스스로를 그저 ‘사제’라고만 칭한 자.
그리고───,
페블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원통함과 피를 제물로 바쳐 시체로 이루어진 뱀을 소환하여 공간을 일그러뜨렸던 자!!!
그런 ‘사제’의 앞으로 한 노인이 갑자기 나타났다.
조금 전까지 황금사과 상회에서 애제자의 부탁을 받아 정체를 숨긴 채 자신이 손녀처럼 아끼고 있는 소녀, 아스텔 시즈가 푹 빠졌다는 레니스를 몰래 관찰하던 노인이었다.
노인과 ‘사제’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노인이 먼저 ‘사제’에게 말을 건넸다.
“이 늙은이를 부른 게 자네인가?”
“용케도 초대에 응할 생각을 했군요.”
“아무리 오늘내일하는 늙은이여도 ‘죄에 물든 거짓된 신’에게 닿은 자를 그냥 지나칠 순 없어서 말이지…….”
“마찬가집니다. 과거 칠현(七?)의 맥을 이은 늙은이 중 하나가 모처럼 결계 밖으로 나와 줬는데 그냥 지나칠 순 없지요.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다소 무리하더라도 당신은 여기서 제거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사제’는 노인에게 고한 후 빛 가운데서 노인과 세상을 향해 저주의 말을 읊조렸다.
“마음 깊은 곳에 숨긴 죄의 아픔을, 운명을 일그러트리는 탄식의 기도로 바꾸어라.”
헤렉스 천년 제국의 창공에서 지금 푸른 하늘을 검게 물들이고, 그렇게 죄악으로 어두워진 하늘을 진홍의 위광으로 가르며 ‘사제’와 현자의 탑을 관리하는 현인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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