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제15 화
* * *
레니스가 카렐렌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먼저 와있던 카렐렌이 가볍게 자신의 검을 휘두르며 레니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레니스가 오는 걸 눈치챘는지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후 고개를 돌려 레니스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레니스가 느긋한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걸 보더니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레니스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핀잔을 주었다.
“제자가 스승을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만들다니 해이해!”
“대답은?”
“잘못했습니다.”
“후후…좋아, 착한 아이구나.”
라고 말하며 살짝 까치발을 들어 인자한 미소와 함께 레니스의 머리를 쓰다듬는 카렐렌 앤. 두 사람은 서로 간에 암묵적으로 합의한 콩트와도 같은 만남을 시작으로 아침을 열었다.
오늘도 불타오르는 것만 같은 기다란 붉은 머리를 앞머리는 살짝 내리고 뒷머리는 위로 올린 다음 끈으로 묶어서 자연스럽게 내린 포니테일 스타일로 하고 온 그녀. 그녀의 그러한 머리 스타일 때문에 소녀 특유의 암사슴 같은 가늘고 하얀 목이 매력적으로 강조되어 위엄 있다거나 근엄하기보단 건강미 넘치는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그녀가 애써 근엄하거나 포용력 넘치는 성인여성처럼 보이려고 미소 지으며 레니스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을 보며 레니스는 푸근한 마음으로 그녀의 손길을 즐겼다.
그렇게 그녀가 한껏 위엄 있어 보이려 노력을 하며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배에서 작고 귀엽게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워낙 이른 아침이라 주위에 인파가 없어서 조용하다 보니 크게 울렸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완전무결한 완벽한 여성에 집착하는 그녀에게 남 앞에서 배에 꼬르륵 소리가 난건 견디기 힘들겠지.’
‘비록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일지라도. 특히 남자라면 모를까 여성에게는……. 사실 남자여도 부끄러운 건 똑같이 부끄럽지만.’
그래서 레니스는 애써 못 들은 척하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그녀를 감싸주기로 했다.
뭐…이것도 역시 서로가 진실을 알고 있지만, 서로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는 거다. 요컨대 형식이 중요한 거랄까. 아니면 일종의 명분 쌓기 같은 거랄까. 눈 가리고 아옹이나 엎드려 절 받는 게 상황에 따라선 그 상황을 부드럽고 매끄럽게 넘어가도록 해준다는 정치의 일종인 거겠지.
“제가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아침을 못 먹고 왔더니 그만…….”
“그…그러게. 너…너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완전무결한 이 몸을 본받아서 자기 관리에 철저히 해야지. 앞으로는 항상 끼니는 거르지 말고 챙겨먹도록 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카렐렌은 그렇게 말하곤 살짝 레니스의 눈치를 보았다.
“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그…그래…, 흠흠.”
“그리고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도시락을 싸왔는데 같이 드시겠어요? 혼자 먹긴 좀 양이 많은 거 같아서…….”
“읏…그…그래…….” 그리고 그녀는 레니스에게 들릴 듯 말 듯 작게 ‘고마워.’라고 중얼거렸다.
레니스는 그저 못 들은 척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렇게 레니스와 카렐렌은 근처의 나무 아래로 이동해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레니스는 카렐렌에게 샌드위치가 담겨있는 작은 바구니를 건넸다.
그녀는 레니스에게서 바구니를 받더니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다람쥐가 그 작은 입술로 도토리를 갉아먹듯이 샌드위치를 조금씩 베어 먹더니───,
“마…맛있어!”
“입에 맞으신 거 같아서 다행입니다.”
“네가 직접 만든 거야?”
“네.”
“흐…흥…꽤하네. 입맛에도 완전무결한 이 몸의 혀를 만족시키다니. 칭찬해주겠어.”
“영광입니다. 많이 남았으니 마음껏 드세요.”
“그…그러게. 음식을 남기면 안 되지.”
레니스 역시 그녀의 옆에 앉아서 샌드위치 한 개를 집은 다음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들어간 거라곤 별로 없지만 사실 어지간한 요리는 사실 햄과 치즈 올리브…그리고 느끼함을 덜어줄 상큼한 소스와 채소 이 정도만 들어가도 꽤 맛있는 법이다.
레니스는 한 손으로는 샌드위치를 천천히 입에 넣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물의 마법과 흙의 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아래에 있는 흙을 잔 모양으로 느긋하게 반죽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만지작거려서 대충 그럴싸한 잔의 모양을 하게 됐을 때 불의 마법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흙의 잔을 고온으로 구워서 즉석에서 컵을 만들었다.
카렐렌은 얌전히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레니스가 하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흙으로 그렇게 즉석에서 만들어진 잔 안을 물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시원한 물로 채울까 하다가 레니스는 생각을 고쳤다.
근처에 적당한 과일나무가 없나 살펴본다. 마침 지금 레니스와 카렐렌이 앉아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숲 근처에 사과나무가 보였다. 손바닥을 펴자 사과 하나가 사과나무로부터 레니스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샌드위치를 다 먹어 비어있는 손가락 끝을 얇은 바람의 칼날로 뒤덮는다. 그렇게 바람의 마법으로 이루어진 작은 손칼을 만들어서 사과껍질을 깠다. 그리고 좀 전에 만들었던 잔에 넣은 후 다시 바람 마법으로 갈아버린 후 마무리로 빙결 마법을 살짝 걸어 시원한 사과 주스를 즉석에서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음료를 목이 텁텁할 거 같은 카렐렌에게 건넸다.
“샌드위치만 드시면 목이 좀 텁텁하실 텐데 이거라도 좀 드셔보세요.”
“고…고마워.”
그녀는 레니스에게서 잔을 받은 후 고양이가 혀를 살짝 내밀어 물을 마시듯이 혀끝을 살짝 내밀어 잔에 대어 맛을 본 후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더니 레니스의 등을 팡팡 두드리면서 말했다.
“마…맛있어!!! 음음…역시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이 몸의 제자야!!!”
그리곤 거침없이 샌드위치와 시원한 사과주스를 보는 레니스가 다 보람차고 흐뭇할 정도로 맛있게 먹기 시작했고, 레니스는 그런 그녀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동안 바라보았다.
…
그렇게 샌드위치와 주스를 다 먹자 만족한 카렐렌이 자신의 배를 콩콩 두드린 뒤 두 팔을 머리 위로 쭈욱 뻗으며 기지개를 켜더니 그대로 잔디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곤 누운 자세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레니스에게 말했다.
“덕택에 맛있게 잘 먹었어. 뭔가 후련해진 기분이야.”
어쩐지 그녀답지 않게 조금 무겁고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이런 경우는 대게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먼저 말하긴 꺼려지지만, 누군가 물어 봐주면 그걸 계기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하고 싶다는 구원을 바라는 신호.
그래서 레니스는 그녀가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지만 바라는 질문을 하기로 했다.
(헛다리 짚은 거면 어떡하려고?)
그렇게 묻는 루아에게
(만약 내 짐작이 틀렸다면 그건 그거대로 그녀에게 그러한 남에게 선뜻 밝히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니 좋은 일이겠지.)
(흠흠……, 제 점수는 9점!)
(좋……, 좋은 건가……?)
“혹시 어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으…응…아니, 딱히……. 이건 뭐랄까 스스로 해결해야할 문제랄까…”
“그렇군요.”
한동안 그렇게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딱히 그 침묵이 부담스럽거나 갑갑하다고는 여겨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떤 의미로는 평온한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
멍하니 아침햇살의 따스함을 만끽하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카렐렌의 곁에서 레니스 역시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며 햇살을 쬐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평온한 시간이 지났을까.
“있잖아…”
“그러고 보니…”
레니스와 카렐렌이 동시에 서로에게 말을 걸어 서로의 말이 겹쳤다.
“먼저 말씀하세요. 저는 그렇게 중요한 얘길 하려던 게 아니라서.”
“으응…아냐. 나야말로 정말 별 거 아닌 사소한 얘기였는걸.”
이대로는 서로 계속 상대방에게 양보만 하다가 어색해지고,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 것 같기에 레니스는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기로 했다.
“어제 만나러 가셨던 친구분과 무슨 일이 생기셨나요?”
그녀에게 어제 근심거리가 생겼다면 짐작되는 게 이거 뿐이기에 입에 담았다. 그러자 카렐렌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숙였다.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린다. 그녀가 뭔가 말을 꺼내면 옆에서 조용히 들어주면 되리라.
자신이 특별히 답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조금 기분이 풀릴 테니까. 반면에 아무 말도 안 해준다면 이 화제를 얘기하기 꺼리는 거니까, 역시 조금 전의 질문은 잊도록 하자.
잠시의 침묵 후 그녀는 이내 마음의 결심을 했는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고…그러네. 사실 좀 전에 내가 하려고 했던 이야기도 이것과 관련된 거기도 하고… 괜찮으면 잠깐 들어줄래?”
“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나는 좀 특수한 사정이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항상 혼자였어. 그리고 내 소중한 친구는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굉장히 상냥한 아이지만, 생각이 깊어서일까?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조숙한 아이라 또래 애들은 벽을 느껴서인지 잘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레니스는 그녀의 이야기를 곁에서 조용히 듣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서로 혼자라 이윽고 우리 둘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가 됐어. 나에게 있어서도 그 아이가 제일 소중했고, 그 아이에게 있어서도 내가 제일 소중하다고 믿었지.”
“네.”
“그런데 그 애나 나나 둘 다 사정이 있어서 잠깐 떨어진 사이에 그 애가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됐는데, 그때 누군가가 그 아이를 목숨의 위험으로부터 구해준 거야.”
그때 루아가 레니스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 꽤나 익숙한 이야기네.)
(그러게….)
“그리고 그 애는 자신을 위기에 구해준 사람에게 굉장한 호의를 품고 있는 거 같아. 어느 정도의 호의냐면 지금까지 줄곧 곁에서 보았던 소녀가 아닌 여자의 얼굴을 하게 됐더라고.”
“나는 내가 그 애의 곁에 없을 때 그 애의 생명을 구해준 누군가에게 분명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그 애를 빼앗긴 것만 같아서 그 누군가가 조금 밉기도 해. 아니 내 가장 소중한 걸 빼앗긴 것만 같아 질투한다고 해야 할까. 나한테는 여전히 그 애가 가장 소중한데, 그 애는 다른 누군가의 여인이 되어 더 이상 내가 그 아이에게 제일 소중하게 되지 않게 됐다고 생각하니까 가슴 한편이 서늘해져.”
레니스는 카렐렌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쩐지 조금은 그 심정을 알 거 같았다.
지금 카렐렌이 느끼는 감정은…과거 자신이 겪었던 감정과 근본적으로 같으니까.
파티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각자 연인 사이거나 따로 연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들의 미래를 진심으로 축복하면서도 마음 한 편에서는 혼자만 소외됐다는 그런 복잡한 심경.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는 어딘가 이상한 걸까?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완전무결하지 않고, 그 애에게 집착하고, 얽매이고, 끝내는 구속하려 드는 걸까?”
레니스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말을 멈췄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지금의 그녀에게 괜히 뭐라도 아는 척하면서 인생 경험이 풍부한 사람마냥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는 들 그녀에게 닿지도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모르겠다.
그렇게 침묵을 유지하려다가 다만…다만 단 하나 자신이 알 수 있고, 그녀가 꼭 알아줬으면 하는 것은, 아니 이미 그녀 자신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만…그래도 그녀를 격려하기 위해 굳이 말로 전한다.
“친구 분을 몹시 소중히 여기고 계시는군요.”
그런 레니스의 말을 듣고 카렐렌은 어딘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하지만 조금 슬픈 듯이 처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그리고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누운 자세에서 한 바퀴 빙글 레니스 쪽을 향해서 옆으로 몸을 굴리더니 앉아있는 레니스의 허벅지에 자신의 머리를 올리고 누웠다.
그리고 그렇게 누운 자세로 밑에서 레니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위로 뻗어 그의 뺨을 만지더니 그녀는 작게 중얼 거렸다.
“저기…고마워….”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왠지 지쳤어. 이대로 한숨 잘래. 점심때쯤 깨워줘.”
그렇게 그녀는 레니스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의 무릎을 베개 삼아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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