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제14 화
* * *
“혹시…,”
레니스는 파미유들에게 ‘특별히 좋아하시거나 만들어드렸으면 하는 요리 있으신가요?’라고 물으려다가 말을 멈추고 말끝을 흐렸다.
(왜 그래?)
그렇게 묻는 루아에게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이미 평소에도 질릴 정도로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굳이 내가 만들 필욘 없겠지. 그리고……)
(그리고………?)
고개를 귀엽게 갸우뚱하며 되묻는 루아
(먹고 싶은 음식을 상대방한테 묻는 거도 지금 상황에선 내가 해야 할 고민을 상대방한테 떠넘기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파미유의 멤버들이 말한 내가 만든 요리를 먹고 싶다는 말에는 단순히 내가 만들기만 한 요리를 먹고 싶다는 말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에~ 150살까지 동정이었던 너 치곤 꽤 하는걸?)
(뭐, 나이를 헛으로 먹었단 건 아니란 거겠지.)
(푸훕!!!)
(………)
“왜 그러세요, 레니스님?”
레니스가 갑자기 말이 없어지자 레니스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묻는 레아. 대답 대신 레니스는 원래 하려던 질문을 바꿔서 물어보기로 했다.
“특별히 못 드시거나 먹기 꺼려하시는 재료가 있으신가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평소 즐겨먹거나 좋아하는 요리 중에서 그녀들이 좋아할 것 같은 요리를 고르자. 이 선택지가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혹시라도 요리에 들어갈 재료에 그녀들이 싫어하는 재료가 들어가면 안 되니까 미리 물어두자.
하지만 그런 레니스의 마음 씀씀이를 알아줘서인가 리카, 유이, 레아는 레니스를 보며 밝게 웃더니 그녀들이 싫어하는 음식뿐 아니라,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혹은 어떠한 요리를 먹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다소 과장을 섞어가며 즐겁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그런 사소한 배려에 레니스 역시 마음이 따스해졌다.
질문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뭐든지 좋아요.’라는 애매한 대답보다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을 말해주는 게 편하다.
하지만 대답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특히 과연 이런 걸 말해도 될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혹은 자신은 별 거 아닌 거 같다고 말을 꺼냈지만, 상대방은 과한 요구라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상대방이 자신을 배려하듯이, 자신 또한 상대방을 배려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리라.
이 경우 먼저 질문을 한 사람의 경우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까 조금 더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건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줄 문제겠지.
하지만 파미유의 멤버들은 그 짧은 시간에 레니스가 어떤 생각으로 말을 흐렸고, 그녀들을 배려하여 질문을 했는지까지 고려한 다음에 레니스를 배려해줬다.
굉장히 사소할 수도 있지만 이런 작은 부분에서도 그녀들의 섬세한 배려가 묻어나는 게 평소 그녀들의 사람됨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이거 그녀들의 배려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요리에 좀 더 공을 들여야겠는 걸…….’
물론 처음부터 대충 할 생각은 없었지만, 다시 한번 속으로 작게 결심하는 레니스.
“저희는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답니다. 다만 느끼한 것도 괜찮긴 한데, 너무 느끼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샌드위치에 치즈 1장이 들어간 것은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2장이 들어가면 조금 힘들단 느낌일까요…….”
나긋한 어조로 굉장히 구체적으로 말하는 유이.
“저는 오늘 하루 스튜는 가급적 피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길드에서 의뢰를 받고 상행에 가면 야영할 때 워낙 수프를 자주 먹어서……, 가급적 야영할 때도 끓인 요리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다양하게 준비하려 하지만 그것도 결국 한계가 있거든요.”
이번에는 자신의 의견을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레아.
“저는 레니스님이 만들어주신 요리라면 어떤 것이든지 기대되기에 메뉴에 관해서는 상관없습니다만, 굳이 말하자면 상큼한 음료가 마시고 싶군요.”
마지막으로 리카가 시원하게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그녀들의 얘기를 들으며 어느 정도 무얼 만들면 좋을지 정했기 때문에 레니스는 그녀들에게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재료를 사러 가죠.”
“네!”
그렇게 레니스들은 돼지고기와 고기의 잡내를 없애고 고기의 육질을 높여줄 허브, 파슬리를 비롯한 야채들, 그리고 리카의 요구대로 상큼한 음료를 만들기 위한 자몽.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레니스가 만들 모든 요리의 비장의 무기가 될 토마토와 배를 사러 갔다.
신선한 재료들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거리 한 곳에 몰려있어서 식재만을 사고팔기 위한 사람들을 위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장보기였지만, 당초 레니스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오래 걸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비록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각 재료들을 그래도 레니스와 인연을 맺은 황금사과상회와 연관된 가계에서 사기 위해 파미유의 멤버들에게 그러한 가계를 물어봐서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게 발품을 팔은 보람은 있어서 재료의 질도 최고였고, 파미유의 멤버들이 애교 있게 레니스가 황금사과상회와 작은 연이 있어서 일부러 다른 곳에서 안 사고 황금사과상회와 관련 있는 가게로 왔다는 점을 어필해서 그런지 가게 주인들이 웃으면서 덤도 많이 주었다.
장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레니스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레니스 옆에서 짐을 나눠 들고 같이 걸어가는 파미유 멤버들을 보며 레니스는 생각했다.
(행복이란 것이 거창하고 멀리 있는 게 아니겠지. 이런 바로 옆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이야말로 진정 소중한 행복일 거야.)
레니스가 그런 생각을 하며, 파미유 멤버들과 함께 걸음을 옮겨 주점 ‘은의 눈물’ 최상층에 있는 방으로 돌아가려할 때였다. 레니스들과 마찬가지로 장을 보러왔다가 마치고 돌아가는지 옷가게 ‘미육의 향기’의 여주인인 미사 엘리자티를 보게 됐다.
한숨 한 번만 쉬어도 그녀를 보고 있던 뭇 남자들의 가슴을 애절하게 만들 것만 같은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분위기의 미망인. 연한 갈색의 긴 웨이브 머리카락에 가슴이 다 파이고 배꼽마저 드러난 노출적인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
그녀를 한 번이라도 안을 수 있다면 목숨마저 바칠 수 있을 무수한 남자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만 같은 그녀는 레니스가 그녀를 알아차렸을 때 그녀도 레니스를 알아차리고 레니스와 파미유를 향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후후, 도련님. 벌써 또 만나는구나. 저녁 장 보러 온 거니?”
“네, 같이 드시겠어요?”
레니스가 그렇게 묻자 그녀는 레니스와 파미들을 한번 쓱 훑어보더니
“후후 권유는 고맙지만, 오늘은 젊은이들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도록 양보할게. 그럼 또 보자.”
그리고 그녀는 레니스에게 다가와 레니스의 뺨에 살짝 입술을 맞추더니 작은 목소리로
“여자에게 봉사 받는 기쁨을 알고 싶다면 언제든지 찾아오렴…….”
이렇게 속삭이고 떠나갔다.
‘하하…진심인가…농담인가.’
아마도 그저 장난감 취급당한 거 같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기에 레니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조금 전의 광경을 보고 얼굴을 분홍빛으로 살짝 물들인 레아와 어째서인지 눈을 빛내는 리카, 유이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
(의외로 너 자신이 제일 맘에 들어 하고 있는 거 아니냐?)
한창 레니스가 요리를 하고 있는 와중에 루아가 말을 걸어왔다.
못 들은 척하고 돼지고기에 곁들일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 익숙한 손길로 허브와 파슬리를 잘게 썬 후 칠리소스에 비빈다.
하지만 레니스의 침묵에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루아의 말
(혹시 정말로 여장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반했다든가……. 호에에~ 완전 기분나빠;;;)
그랬다.
레니스는 지금 옷가게 ‘미육의 향기’의 여주인인 미사에게 받은 레니스한테 딱 맞춰서 제작된 메이드복을 입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원래 파미유들이 입고 있는 섹시한 메이드복 보다 치마도 더 짧을 뿐 아니라 상의는 가슴 위에만 얇은 천으로 겨우 가리는 수준이라 허리와 배꼽이 훤히 드러났다.
파미유 멤버들의 제복이 소녀들 특유의 풋풋함과 상큼함을 강조하면서 언뜻언뜻 보일락 말락하지만 끝내 보이지는 않는………, 스커트 안쪽의 비밀의 화원을 상상하게 만드는 메이드복이라면 레니스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입고 있는 사람도 부끄럽지만 보는 사람은 더 부끄러워 시야를 어디에 둬야할지 모를 만큼 적나라하고 도발적인 옷이었다.
어째선지 파미유 멤버들은 다 입은 레니스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히면서 아까보다 더 좋아했지만…….
특히 레아의 경우엔 코피를 콸콸 흘리고 있었다.
여관 ‘은의 눈물’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레니스의 옆에서 아기사슴같이 맑고 영롱한 눈을 하던 그녀들이 방에 올라오자마자 초식동물을 노리는 맹수와 같은 눈으로 돌변해선 레니스를 덮치더니 레니스가 입고 있던 옷을 강제로 벗기고 미사에게 받은 메이드복으로 갈아입혔다.
그녀들이 너무 즐거워하길래 레니스는 반쯤 체념한 채 그녀들의 손길에 실 끊어진 인형처럼 몸을 맡겼다.
애써 의식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가장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루아에게 저렇게 지적당하니 가슴이 쓰라리다.
(뭐…나만 조금 부끄러울 뿐, 그녀들 모두가 좋아하길래 그냥 그러려니 하고………)
(정말이지, 그런 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니까.)
루아는 그런 레니스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음? 루아 뭐라 했나?)
(아무 말도 안 했네요!! 여장이 취미인 갈 데까지 간 동정에게 할 말은 없거든!!!)
쿨럭………!
…
레니스가 허브와 파슬리를 칠리소스에 어느 정도 버무리고는 그가 만들 드레싱의 숨김 맛 정도가 아니라 핵심이 될 배를 꺼내 손안에 든다. 그리고는 배의 껍질을 얇게 까는 동시에 배를 얼음 마법으로 차갑게 한 다음 강판에 갈아 시원한 배즙으로 만들어 다시 야채와 버무리고 있을 때였다.
그런 레니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리카, 유이, 레아는 남자인 레니스는 끼어들기 힘든 여성들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장인이네, 레니스님.”
“장인이군요, 레니스님.”
“장인이시네요, 레니스님.”
“가끔은 봉사 받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레니스님 요리하시는 모습이 저희보다 더 숙련되신 거 같아서…살짝 여자로서의 자신감이 사라질 것 같기도…”
“그러게…메이드복도 무섭도록 잘 어울리시고 말이지…….”
“그래도 요리 잘하는 남자라니 소녀의 마음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지 않아요?”
“지금 모습은 소녀보다 더 소녀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시지만 확실히 확 하고 달아오르네.”
“다음에는 같이 요리했으면 좋겠어요, 분명 더 즐거울 거에요!”
그렇게 요리가 완성되어 레니스와 파미유들은 다 같이 식탁에 모여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했다.
구운 돼지고기에 칠리소스의 매콤한 맛과 배즙의 깊은 단맛이 어우러진 파슬리 샐러드를 겻들어 먹는 요리도 호평이었지만, 특히 파미유들이 좋아했던 건 토마토와 자몽을 얼린 다음 갈아서 만든 과일음료였다.
얼마나 호평이었냐면 레니스는 그 뒤에 3번을 더 만들어 밤늦게까지 과일음료를 마시면서 파미유 멤버들이 그동안 모험가 길드에서 받은 의뢰를 하면서 겪었던 일이라든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옷을 갈아입고 다 같이 그대로 깊은 잠에 들었다.
(흠…역시 딱히 별일 없었군.)
(아니,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루아가 뭐라고 했지만, 무시하고 레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파미유들이 먹을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식빵에 버터를 바른 후 양상추, 올리브, 피클, 그리고 햄과 치즈를 넣어서 만든 간단한 샌드위치다.
그리고 잠시 후 만나기로 약속했던 카렐렌을 떠올린다.
‘그녀는 과연 어떨까…아침 먹고 나오려나. 다른 사람의 일에는 열심이지만, 자기 일에는 묘하게 서툴 거 같은 그녀라…혹시 모르니 그녀 몫의 도시락도 준비해야겠다.’
준비가 다 끝나자 여전히 잠에 취해있는 리카, 레아, 유이에게 말한다.
“저는 지금부터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 오겠습니다. 아마 저녁때나 돼야 올 거 같아요. 먼저 일어난 김에 여러분 몫까지 식사 준비해놨으니 일어나시면 드세요. 그럼.”
레니스의 말이 끝나자 잠에 취해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도 그녀들이
“감사합니다, 레니스님. 다녀오세요.” 라고 했다.
그렇게 레니스는 그녀들을 뒤로하고 카렐렌을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인 어제 그녀와 헤어졌던 수도 프레세아의 외곽으로 향했다.
…
레니스가 떠난 뒤 잠시 후……, 방에 남아있던 리카, 유이, 레아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서로 한동안 말없이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기묘하지만 어딘가 근질근질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리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푹 자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리카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는 유이와 레아.
모종의 이유로 그녀들은 언제나 자나 깨나 긴장을 유지하며 스스로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길드의 의뢰를 받아 떠나 야영을 하게 됐을 때는 물론이고, 비교적 치안이 유지되는 도시 안에서 생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제…레니스의 곁에서 잤을 때는…마치 그곳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라는 안도감에 휩싸여 어린 시절 아버지나 어머니의 품에서 잠들었을 때보다도 더한 아늑함에 감싸여 푹 자버렸다.
그녀들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레니스님 게다가 그 나이 대의 소년답지 않게 어른의 포용력 같은 거도 느껴져서……,”
“네…저희들의 조금 무리하다 싶은 장난도 여유 있게 다 받아주시고…….”
“그래서 그런지 자꾸 응석부리게 되네.”
그리고 레아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말했다.
“그…그리고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뭐랄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려도 상관없다라는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어딘가 세상사에 달관한 듯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만 같은…좋겠네요, 레니스님께 사랑받을 여자는…….”
어째선지 세 명의 소녀들은 각자 순간적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자신을 갈구하는 레니스의 모습을 떠올리곤 부끄러움에 허벅지 안쪽이 근질거려와 살짝 몸을 배배 꼬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