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왕의 유혹에 넘어간 현자-14화 (14/47)

〈 14화 〉 제13 화

* * *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게.”

누구에게 했던 말이었을까.

“꼭 다시 만나러 올게. 그땐…….”

누가 했던 말이었을까.

“아니야, 내가 만나러 갈게. 어디에 있든지 반드시 만나러 갈 테니까!!!”

그렇게 소년과 소녀는 울면서 이별했다.

가슴 한편이 그리움에 사무친다. 이것은 오래된 어린 시절의 기억.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해진 소녀와의 추억.

점점 흐릿해지며 사라져 가는 추억 속 소녀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와, 몽롱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레니스는 필사적인 마음으로 손을 뻗어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만 가는 소녀의 모습을 붙잡아보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레니스의 필사적인 마음의 절규가 담긴 손짓은 소녀에게 끝내 닿지 못하고, 대신 그의 손이 움켜쥔 것은…….

소름이 척수를 타고 등줄기를 저릿하게 만드는, 이 세상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부드러움.

손바닥 안을 통해 전달되는 기분 좋은 근질근질함에 레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어 무의식적으로 계속 만지작거렸다.

동시에 좋은 향기가 그의 코를 간질이고, 귓가에 달콤하고 듣는 이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안타까운 신음성이 들리더니, 누군가의 두 팔이 레니스의 머리를 감싸고는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윽고 얼굴이 부드러움에 감싸인다. 온몸의 신경이 녹아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극상의 촉촉함.

얼굴 전체를 압박하는 그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들다. 허나 코를 통해 은은하게 전해지는 향긋한 살 내음과 맞닿은 체온의 따스함 때문에 그런 불편함 따윈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레니스의 몸은 어느 날씨가 좋은 오후에 잔디밭에 누워 따스한 햇볕을 쬐는 것만 같은, 혹은 오랜 시간 사막을 가로지른 여행자가 갈증에 목이 타들어갈 때 오아시스에 도착하여 미친 듯이 목을 축이곤 만족하여 그 자리서 한숨 돌릴 때와 같은 그러한 안도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레니스의 등 뒤로도 지금 그의 손안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에 못지않은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더니 누군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옷 섬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팍과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고 느릿하게 살살 쓸면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옆으로 누운 채 부드러운 이불에 푹 감싸인 것과는 그 질이 다른, 아무리 솜을 가득 채웠더라도 무기물인 이불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적당한 무게감, 피부와 피부의 접촉면에서 서로의 땀이 살짝 배여 느껴지는 기분 좋은 끈적끈적함과 그저 닿아만 있을 뿐인데도 마음에 안도감을 주는 체온의 따스함에───,

레니스는 모든 것을 잊고 이대로 계속 이 부드러움에 감싸여 잠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창밖에서 비쳐드는 햇살이 그의 몸을 비춰와 아침이 밝아졌음이 느껴졌다.

동시에 어제 카렐렌과 한 약속이 떠올랐다.

비록 자신의 대답 따위 듣지 않고, 그녀가 일방적으로 한 약속이었지만. 그 근본에는 선의가 깔려있기에 레니스쪽에서 약속을 어기는 것은 여러모로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된 거 어차피 나갈 거면 괜히 늦게 나가서 그녀를 기다리게 할 필요도 없겠지. 슬슬 일어나서 나와 파미유들이 먹을 아침을 간단하게 만들어 먹은 후 나가봐야겠다.’

그렇게 레니스가 마음먹었을 때였다. 그의 아랫배를 쓰다듬던 가녀리고 부드러운 손이 손바닥으로 그의 배꼽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이 배꼽 주변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쓰다듬다가 레니스의 배꼽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배꼽 안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그 자극적인 감각에 자는 도중에 뭔가 안타깝고 그리운 꿈을 꾸었던 거 같아서 조금이라도 더 떠올려 보려던 게 싹 날아가 버렸다.

꿈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마지막에 무언가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던 것만이………,

지금 이렇게 레니스가 손에 부드러운 것을 쥐고 있다는 게 증거가 되어 자는 도중에 그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잡으려 했었구나…라는 증거로 남아있었다.

손안의 감촉을 즐기며, 조금 더 이대로 있고 싶다는 마음과, 그만하고 일어나자는 마음이 격렬하게 다투고 있을 때였다.

그의 가슴팍에 얹혀있던 따스한 팔과 배꼽 안쪽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소중한 물건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는…단순히 간지러운 것과는 다른 미지의 자극에 정작 만지작거려지고 있는 곳은 배꼽 주변과 그 안쪽인데도 오히려 발뒤꿈치가 쾌감에 살짝 경련을 일으키며 근질거렸다.

과거 생의 모든 것을 마족 토벌과 그걸 위한 수련에 바쳐 타인과 접촉하는 일 없이 홀로 지냈던 레니스와는 전혀 인연이 없던 이 낯선 쾌감에 취해 멍해진 상태의 그는, 오전에 있는 약속이고 뭐고 전부 내던지고 그냥 이대로 이 손길이 주는 안락함에 몸을 맡기는 거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이래서는 안 되겠지.’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언제까지나 그 상태 그대로 얼굴을 파묻고 있게 하고 싶은 푹신푹신한 것으로부터 고개를 살짝 뗀 후, 레니스는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정말로 간신히 억지로 떴다.

그의 눈앞에는 에메랄드 머리카락의 묘령의 여인이 속옷 차림으로 그 큰 가슴을 과시하며 두 팔을 벌려 그의 얼굴을 감싼 채 무방비하게, 성숙한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기분 좋게 자고 있었다.

파미유의 멤버 중 하나인 유이 안테였다.

그녀의 성숙한 몸과는 반대로 어린아이가 부모의 품 안에서 천진난만하게 자고있는 것만 같은 그녀의 표정이 어우러져 청순하면서도 남자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마성의 매력을 발하고 있었다.

자고 있는 그녀의 입술로 무심코 손을 가져가 입술 아랫부분을 만지작거릴 정도로.

그리고 레니스의 등 뒤에서 그를 꼬옥 껴안고 그의 가슴팍이나 복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은 파미유의 리더인 리카 파르바티였다.

유이와 마찬가지로 성숙한 그녀의 가슴이 레니스의 등을 기분 좋게 압박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세게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섬세한 그녀의 손위에 살며시 손을 얹어 잡은 후 자신에게서 떼어내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레니스가 그렇게 그를 끌어안던 리카의 손을 풀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리카가 이번에는 등 뒤에서 어부바하듯이 레니스의 목 주위로 자신의 팔을 두르고 그의 등에 자신의 몸을 기대며 레니스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는다.

“그만 일어나주세요, 리카씨.”

레니스는 속으로 매우 당황해하면서도 겉으로는 침착하게 그렇게 말하며 등 뒤의 여성을 부드럽게 떼어낸다.

리카가 잠에 취해 눈을 잘 못 뜨면서도 인사를 해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레니스님.”

“네, 리카님도 안녕히 주무셨나요?”

“네…….”

그녀는 살짝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힌 뒤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푹 잔적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그리고 그런 레니스와 리카의 대화에 레니스 앞에서 좀 전까지 두 팔로 그의 머리를 감싼 채 자신의 가슴으로 레니스의 얼굴을 끌어당긴 뒤 세상 물정 모르고 평화롭게 자고 있었던 여성, 유이가 몸을 뒤척이더니 느긋하게 기지개를 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레니스와 시선을 맞추더니 평소 묘하게 요염하던 그녀와는 다르게 화사한 웃음꽃을 피우며 그의 손을 잡은 후 레니스의 손을 그녀의 볼 쪽으로 가져가더니 레니스의 손에 그녀의 뺨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 몸짓이 너무나 귀여워 레니스도 그녀의 뺨을 만지작거리거나 손가락으로 아기 고양이의 턱을 긁어주듯이 그녀의 턱을 매만졌다. 그러자 그녀가 턱을 긁어주는 새끼 고양이가 기분이 좋아 갸르릉 소리를 내며 좀 더 턱을 긁어달라고 요염한 몸짓으로 고개를 치켜들듯이 그녀 또한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레니스에게 졸랐다.

한동안 그렇게 유이를 매만지며 그 얼굴 감촉을 즐기던 레니스는 문득 생각했다.

‘뭐랄까 두 사람 다 오늘따라 묘하게 나한테 들러붙고 응석을 부린다.’

‘뭐지?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렇게 레니스는 어제 일들을 떠올려봤다.

현재 미메시스 대륙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라고 해도 좋을 헤렉스 천년 제국. 그런 헤렉스 제국의 수도 프레세아에서 황제가 거하는 황궁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하늘 높이 솟은 창세의 7인의 탑을 보노라면 어째서인지 가끔 무서운 생각이 들고 만다라는 리카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레니스는 그 심연을 엿보려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저 안에 있는 자들 중 누군가가 자신들을 관(?)하려는 자가 있다는 걸 알아채곤 몽환의 장막으로 자신들을 가려 일시적으로 그곳을 신역으로 만들어 세상의 모든 시선을 차단했다.

그렇더라도 레니스가 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환상으로 가려진 장막을 걷어내고 그 안을 볼 수도 있지만 레니스는 굳이 자신의 동료들의 후손들의 비밀을 파헤칠 이유가 없어서 그 자리서 물러나 파미유 멤버들과 함께 밥이나 먹으러 가기로 할 때였다.

(뭐………, 뭐야? 따……딱히 나는, 네 기를 죽이려고 그런 말 한 건 아니라고? 나……, 나는 그러니까 그게………, 아니 애초에 나 같은 미소녀 마왕과 계약한 게 뭐가 떳떳하지 못하단 거야? 좀 더 자랑스러워하라고!)

(아하하……)

(뭐, 사실은 내가 항상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야. 특히나 지금의 세계는 인간 대 마족처럼 명확한 적과 아군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지.)

(흐음?)

(요컨대 단순히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대립이 아닌 각자가 옳다고 믿는 것의 대립이다. 명확한 정답이라는 게 없는 경우가 많다는 거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정치라는 녀석이겠지. 그리고 나는 정치에는 문외한이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의 활기찬 얼굴을 본다.

지금의 시대는 단순히 내가 내 모든 것을 바쳐 이 세상에 남은 모든 마족들을 박멸해서 생긴 평화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아있는 모두가, 지금을 살고있는 그들이 노력하여 손에 넣은 거겠지.’

그렇다면 그 방식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아직은 내가 필요 이상으로 참견할 필요는 없으리라. 나한테 직접적인 피해를 준다면 다른 문제지만 아직은 그런 것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동료들의 후손들 아닌가. 그들이 싫어할 짓을 할 이유는 조금도 없겠지.’

사실 레니스에게는 그게 가장 큰 이유라고 해도 되리라.

(요컨대 귀찮은 일에 얽히기 싫다는 거네.)

레니스의 말을 다 들은 루아가 단적으로 요약했다.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닐지도…….)

아무 대안 없이 상대방을 반대하기만을 위한 반대가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

이미 이 정도로 평화로운 세상을 구축해놓은 상태다.

자칫 잘못하면 이러한 평화를 깨면서 그들의 방식을 부정해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의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지금의 체재를 반대한다면 그땐 그만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다다르고 싶은 이상향과 거기에 이르는 수단. 즉 대안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레니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들의 세상을 존중하자. 지금의 시대는 그들의 것이니까.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교만이요 오만일 것이다.

그렇게 루아와 어느 정도 대화를 일단락한 후, 레니스가 파미유들과 자리를 이동하여 저녁식사를 할 가게를 다시 물색하기로 할 때였다.

레니스의 옆에서 조신하게 걷고 있던 레아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레니스님 혹시 드시고 싶으신 음식이라든가 염두에 둔 가게가 있으신가요?”

레니스는 잠시 고민해본 후 답하였다.

“음식점은 딱히 염두에 둔 게 없습니다만…그렇군요. 기왕 이렇게 시간이 나서 한가하게 수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 나중을 위해 시간이 된다면 좋은 식재료들을 구할 수 있는 가게들을 좀 알아보고 가면 좋겠군요.”

그 말에 파미유 멤버들이 눈을 빛내면서 앞다투어 레니스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레니스님께선 혹시 요리도 하실 줄 아시나요?”

이건 유이의 질문.

“네, 그냥 그럭저럭 혼자 먹을 정도뿐입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니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래 봬도 150세까지 남자 혼자 생활한 거다. 여자와 인연이 없는 독신남성은 자연히 생활력이 늘기 마련. 내 생활력은 역사에 남을 정도겠지.)

(뭐야, 그게. 150세까지 독신 생활한 게 자랑이야?)

(훗────. 마족의 입맛은 모르겠다만, 네 입맛이 일반적이라면 내가 진심으로 만든 요리를 입에 댄 순간 지금 한 말을 후회하게 될걸?)

(우엑, 기분 나빠───.)

레니스에게 있어 몇 안 되는 즐거움이 식사였기에 그의 음식 솜씨는 자신의 마법만큼이나 높다고 레니스는 내심 자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은 레니스님이 만들어주는 요리로!”

리카가 레니스의 팔짱을 와락 끌어안으며 기운차게 말했다.

“저도 그쪽이 더 흥미가 가는군요. 방 안에 있는 저희 짐 속에 어지간한 조리도구는 다 있어서 굳이 주방을 빌릴 필요도 없고요. 후후후.”

언제나처럼 나긋한 어조로 살짝 미소 지으며 말하는 유이.

“그…그리고, 가능하시다면 미육의 향기에서 받으신 제복을 입고 만들어주실 수 없으실까요?”

뭔가 갑자기 무리한 요구를 해오는 레아에게 레니스는 굳은 얼굴로 웃으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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