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제11 화
* * *
긴 붉은 머리카락을 뒷머리 위쪽에서 한번 끈으로 묶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둬서 마치 말의 꼬리를 연상시키는, 포니테일 머리를 한 소녀.
두 어깨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은 하얀 반팔 상의와, 파미유들이 입고 있는 매우 짧은 치마보다도 더 짧아 자칫하면 허벅지 안쪽이 훤히 보일 정도로 노출이 심한 바지를 입고 있는 소녀였지만, 소녀 자신이 두르고 있는 순수하고 청초한 분위기와 잘 단련된 탄력 있는 몸이 어우러져 활기차고, 쾌활한, 소위 말하는 건강미가 한껏 느껴지는 소녀였다.
노출이 심한 복장도 이성을 유혹한다든가, 남자들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는 하나도 의식하지 않고, 그저 활동하기 편하니까 입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하는 소녀.
소녀는 스스로를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완전무결한 검사라고 소개했지만, 어딘가 서툰 면이 있다고 해야 할까. 덜렁이 같은 면이 있다고 해야 할까.
‘지금도 나를 여자애로 착각했고 말이지.’
스스로는 자신을 꼼꼼하다고 생각하여 주위 사람을 보살피기 좋아하는 상냥한 성격지만,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따스한 시선으로 검술과 관련이 없는 일상생활 속에서 덜렁이 같은 그녀를 보살펴줬을 흐뭇한 광경이 레니스는 자연스레 상상이 갔다.
그녀는 계속해서 레니스에게 위태로운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얘기했다.
“아무리 제국의 치안이 좋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도시 안. 숲속은 여전히 위험해.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된다?”
일방적으로 자신을 아이 취급하는 카렐렌에게 레니스가 어안이 벙벙한 레니스. 이럴땐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저 가만히 있었더니, 그녀는 레니스에게 재차 대답을 재촉했다
“대답은?”
일단 레니스는 지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맞춰주기로 하였다
“네……….”
“좋아, 착한 아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카렐렌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레니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뭔가 그리운 느낌이……….’
“그래서 이런 곳엔 어쩌다 혼자 오게 된 거야?”
“그게………, 모험가 길드의 의뢰를 달성하고자.”
“뭐? 너 모험가였어?”
“네, 레니스 프라비라고 합니다.”
“모험가가 된 지 얼마 안 됐나보구나.”
“네……, 뭐, 일단은.”
확실히 오늘 모험가 길드에 가입했으니 그녀의 말도 딱히 틀린 건 아니었기에 레니스는 그렇게 무난하게 답했다.
“이게 혹시 첫 의뢰야?”
“네…….”
뭔가 대화가 이상한 거 같긴 한데,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이것이 첫 의뢰라 그렇게 답했다.
(아하하하하, 너네 지금 뭐하는 거야?)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아가 어이없어하며 하는 말에,
(그러게………, 대체 뭐하고 있는 걸까…….) 라는 맥 빠진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카렐렌이 두 손으로 레니스의 양쪽 볼을 살며시 잡아당기면서───,
“그럼 더더욱 혼자서 오면 안 되지!!! 아무리 쉬운 의뢰 같아 보여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특히 첫 의뢰에서는 모험가 길드에서도 보통 숙련된 선배 모험가와 같이 가길 권유하며, 필요하다면 선배 모험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레니스의 볼을 쭈욱 쭈욱 잡아당기는 카렐렌.
쭈욱 쭈욱
쭈욱 쭈욱
…
쭈욱 쭈욱
쭈욱 쭈욱
“부……, 부드럽네.”
그녀는 살짝 손을 떼어 자신의 볼을 만져본 후,
“나……, 나랑은 살짝 다른 게 마냥 부드럽기만 한 게 아니라 쫀득쫀득하다고 해야 할까.”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중독된 듯 또다시 레니스의 볼을 만지작만지작 거리다가 자신이 지금 하는 행동을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더니, 카렐렌은 레니스에게서 살짝 떨어져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흠흠……, 반성했어?”
“네, 잘못했습니다.”
괜히 부정하면 얘기가 길어질 거 같아서 일단 그렇게 말해뒀다.
“좋……좋아, 음……그래, 응응.”
그녀는 그렇게 갑자기 혼자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자신만의 답을 이끌어낸 후, 혼자 수긍하더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이대로 도시까지 데려다준 후 나 몰라라 해버리면 나도 마음이 찝찝하니까, 내가 오늘 하루 실전에 관해서 가르쳐줄게.”
“아,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뭔가 귀찮은 일에 엮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레니스가 손사레를 쳤지만, 카렐렌에겐 통하지 않았다.
“대답은?”
“……잘 부탁드립니다.”
“좀 더 온몸으로 기뻐하며, 영광으로 여기라고! 비록 짧은 시간뿐이지만, 차기 검후인 이 몸이 직접 가르쳐주는 거니까.”
그녀는 또다시 레니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말하곤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레니스의 앞을 성큼성큼 걸어가며 레니스에게 물었다.
“그래서 수행해야 할 의뢰는 뭐야?”
“오크를 다섯 마리 정도 잡고 그 증거로 마석을 채취해 가져가는 것입니다.”
“흠……, 오크라. 첫 임무로 나쁘지 않지. 그래도 다음부터는 숙련될 때까지 꼭 2인 1조로 해. 보수가 좀 낮아지더라도 안전한 게 최고 아니겠어?”
“네.”
레니스가 반쯤 자포자기하며 말했을 때, 카렐렌이 뒤돌아서 레니스에게 오더니 갑자기 레니스의 몸을 여기저기 더듬기 시작했다.
“헤에. 로브같은 걸 걸치고 있길래 마도사인 줄로만 알았는데, 운동도 상당히 했나 보네? 이거 꽤나 근육이. 꽤나 근육이………어라……?”
그녀의 손은 어느새 레니스의 가슴팍을 가볍게 더듬어 보다가, 고개를 한번 갸우뚱한 뒤, 이번에는 직접 손을 레니스의 옷 앞섬에 집어넣고 가슴을 더듬더니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을 한번 만져보더니 잠시 후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레니스의 등을 팡팡 치기 시작했다.
“저……정말이지, 여,여, 여자끼리 이상한 분위기 내지 말라고. 괜히 나까지 부끄러워졌잖아. 괜찮아. 가슴이 작은 것 정도는. 용기를 내!!!!”
“………”
그녀가 얼굴을 홍당무처럼 빨갛게 물들이더니 계속해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 이건 그거네.)
(자기가 착각한 걸 인정하기 싫어서 눈치채지 못한 걸로 밀고 나가려는 작전인가.)
“마법만 하긴 확실히 아깝네. 소재는 좋은데, 물가에 내놓은 아기처럼 위태로운 면도 많고. 확실히 이대로는 내가 마음이 편치 않겠어.”
그러더니 그녀는 레니스의 얼굴을 유심히 본 후,
“좋………, 좋아, 너 내 제자가 되라.”
“하아?”
“뭐, 나도 바쁜 몸인지라 오랫동안 깊이 있게 가르쳐주지는 못하겠지만, 한동안 시간 날 때마다 가르쳐줄게.”
“아……, 아뇨, 그렇게 폐를 끼칠 수는.”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페이스를 회복한 카렐렌은 레니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허리춤에 있던 자신의 검을 빼내어 레니스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이 레니스의 등에 닿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가슴이 레니스의 등에 눌릴 정도로 꽉 밀착하더니, 레니스의 손등을 그녀의 손바닥으로 감싼 후 팔을 움직여 자세를 취하게 했다.
레니스는 문득 그리운 느낌이 들어 그녀에게 몸을 맡기고 그녀가 하는 대로 놔두기로 했다.
‘확실히 처음 검후와 검성에게 검술 훈련을 받을 때도 이런 느낌이긴 했지.’
그들은 레니스의 의견 따윈 듣지 않고, 강제로 데려와서 레니스에게 검술을 가르쳐주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 후 마족과의 싸움에서 매우 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마족과의 싸움에 모든 것을 바친 레니스의 잿빛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즐거운 추억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이 소녀에게서 떠오른 느낌은 그것과도 비슷하면서 좀 다른 듯한데. 훨씬 까마득히 오래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뿌연 안개에 휩싸인 것마냥 흐릿한 이미지가 한순간 레니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린 소녀인가? 아니 소년인가?
성별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한 어린아이의 실루엣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었다. 머리가 조금 아파온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뭔가 떠오를 것 같을 때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는 거야?)
갑자기 루아가 말을 걸어와 레니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니, 아무것도)
레니스 자신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건지 몰랐기에 모호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루아에 이어서 어느새 레니스의 앞으로 온 카렐렌도 레니스를 보더니
“음……, 꽤 그럴싸한걸?”라고 말한 후 근처의 나무로 가서 적당한 굵기의 나뭇가지를 향해 가볍게 수도를 날린 후 손끝에 날카로운 검기를 담아 나뭇가지를 깎기 시작하더니 즉석에서 나무로 된 검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레니스의 앞에 서서 레니스와 같은 자세를 취하더니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검을 휘두르면서 레니스와 시선을 맞춘다. 그 시선이 뭘 의미하는지 레니스도 이해했기에 그녀를 따라서 검을 휘두른다.
한동안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레니스는 카렐렌을 따라서 검을 휘둘렀다. 그러는 사이 좀 전에 뇌리를 살짝 스치고 갔던 흐릿한 실루엣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잊어갔다.
중간부터 카렐렌은 흥이 돋았는지 아름다운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하던 동작을 멈추고 그녀의 검무가 끝나길 조용히 기다린다.
이윽고 그녀가 만족했는지 검무를 끝내고, 레니스에게 말하였다.
“미안, 네가 너무 잘 따라와줘서 흥이나서말야. 나도 모르게 혼자 신나했네. 오래 기다렸어?”
“아뇨. 그다지. 저도 즐거웠고.”
실제로도 옛날의 추억이 떠올라서 즐거웠기 때문에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러자 카렐렌은 레니스의 미소에 빨려 들어가듯이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자신의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시선을 회피하더니
“그……, 그럼 실전으로 오크를 잡으러 가볼까? 방금한 것들이 별거 아닌 단조로운 입문 동작들이라지만. 실전에서도 충분히 쓸 수 있거든. 내가 먼저 시범을 보여줄게.”
그렇게………, 레니스와 카렐렌은 한동안 오크를 사냥했다.
카렐렌이 먼저 레니스에게 시범을 보이고 레니스가 그대로 따라하는 식으로. 그녀는 레니스가 그녀가 시범을 보인 것 그대로 너무도 손쉽게 오크를 잡는 모습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놀랐지만
“역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완전무결한 나야.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도 그야말로 완벽.”
...
그렇게 레니스와 카렐렌은 저녁때가 다 되어 수도로 돌아왔다.
“원래대로라면 같이 저녁이라도 먹고 싶지만, 오늘은 아는 동생을 만나러 온 거거든. 나는 아무래도 그 애네 집에서 먹어야할 거 같아.”
“네.”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고 시원스레 말하니까 뭔가 분한데.”
“……….”
“뭐, 좋아. 그럼 내일 아침에 여기서 봐.”
레니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후, 카렐렌은 손을 흔든 뒤 활기차게 뛰어나갔다.
‘그럼………, 나도 모험가 길드로 돌아가 볼까.’
카렐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배웅한 후,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레니스는 걸음을 옮겨 모험가 길드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문밖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시끌벅적하던 길드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든 이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정적 속에서 숨을 죽인 채, 레니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할 때, 그런 정적을 깨고 파미유의 멤버들이 밝은 미소와 함께 레니스를 마중해줬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설마 레니스님께 그 정도 의뢰로 무슨 일이 생기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너무 늦게 오시기에, 다른 위험한 문제에 휘말리신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답니다.”
리카에 뒤이어 말하는 레아. 두 사람에게서 진심으로 레니스를 걱정해줬다는 게 전해져 레니스의 마음이 따스해졌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위험한 일에 얽혔거나 그런 것은 아니니까, 마음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레니스가 그렇게 말하자 유이가 레니스에게 팔짱을 껴오며
“저는, 아니 저희는 오히려 그게 더 걱정이었답니다. 위험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혹시 그것은……… 여성이 얽힌 일이 아닌지요?”
쿨럭………!
여성이 얽혔다면 얽힌 일이긴 했지만, .딱히 카렐렌과 뒤가 켕기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하지만 여자로 오해받았다든가, 남들 앞에서 하기에는 미묘한 얘기들이 많아서, 이 일에 관해선 함구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저녁 안드셨죠? 낮에 신세진 것도 있고 하니, 의뢰금 받는 거로 제가 사겠습니다.”
레니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정산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아앗!! 노골적인 말 돌리기, 이건 확실히 뭔가 있군요, 유이 선생님.”
“네, 자세하게 듣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리카부인.”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걸 먹어야겠네요.”
파미유 멤버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너무 비싸지 않은 거로 부탁드립니다.’
차마 입밖으로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간절하게 비는 레니스였다.
...
그리고 그날 저녁 황금사과 상회에 한 소녀가 찾아왔다.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면서도 긴 머리는 뒤로 뺀 뒤 묶어서 밖으로 드러난 새하얗고 가녀린 목덜미가 거리를 지나가는 뭇 남정네들의 시선을 한 번씩 붙잡는 소녀였다.
소녀의 이름은 카렐렌 앤. 황금사과상회 회주의 딸인 아스텔 시즈와는 언니 동생하는 사이였다.
그녀를 알아본 상회의 인물들이 아스텔에게 그녀가 왔단 소식을 빠르게 전했고, 아스텔이 그녀를 마중 나왔다.
아스텔의 모습이 보이자 카렐렌은 아스텔에게 달려가서 아스텔을 꼬옥 끌어안고, 아스텔의 부드러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응석을 부렸다.
아스텔은───,
“가……, 간지러워요, 카렐 언니……”이라고 말하면서도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살짝 지으며 자신의 응석쟁이 언니를 껴안아주며, 아기를 달래듯이 한손으로 카렐렌의 등을 토닥거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뒷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었다.
카렐렌은 아스텔의 부드러운 손길을 만끽하며, 아스텔의 가슴에 더욱 깊이 얼굴을 파묻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