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왕의 유혹에 넘어간 현자-10화 (10/47)

〈 10화 〉 제9 화

* * *

“바라옵건대 지금 우리가 대지에 흘린 피 위에 세워진 평화가 천 년 이상 지속되기를……….”

용자와 7명의 절대자들은 그러한 바람을 담아 자신들이 세운 나라에 헤렉스 천년 왕국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 후 미메시스 대륙의 중심이 된 헤렉스 천년 왕국은 자연스레 주변국들을 흡수하며 규모를 키웠고, 지금은 일국으로 세계를 상대할 수 있는 미메시스 대륙 단 하나의 제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헤렉스 천년 제국의 수도 프레세아.

그야말로 광명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꿈과 희망이 넘쳐나는 이 도시는 역설적이게도, 그 빛에 의해 만들어진 크나큰 그림자 또한 품고 있었다.

여기는 그러한 밝은 빛이 만들어낸 수도의 어두운 이면.

어둡고 더러운 골목에 한 남자가 있었다. 지저분한 머리카락. 정돈되지 않은 수염. 꾀죄죄한 옷. 그야말로 부랑자 그 자체인 이 남자의 이름은 페블 위크. 모험가 중에서도 가장 최하위 랭크인 브론즈 등급의 모험가이다.

남자가 처음부터 이렇게 자포자기에 빠진 폐인 상태는 아니었다. 아무리 모험가들이 오늘만 사는 하루살이 인생들의 모임이라지만, 그들 모두가 가슴속에 남들에게는 밝히지 못할 작은 꿈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모험가들은 가슴속에 품은 그 꿈을 등불로 삼아 오늘도 어두운 하루를 힘겹게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그 작디작은 가슴속의 빛이 자신의 세상을 밝혀 주리라 믿으며.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의 빛을 손에 넣는 자는 극소수였다.

누구나가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보답 받을 수 있는 세상이면 좋으련만, 세상은 그렇게 상냥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페블 위크는 그렇게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은 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삶에 비관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브론즈 모험가 천 명이 있다면 그중에 실버가 되는 자들은 300명. 그렇다면 그 300명이 되지 못한 남은 700명의 브론즈들은 노력하지 않고 놀았단 말인가?

그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타일렀다.

자신은 열심히 했다. 분명히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주위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을 폐기물 취급했고 남들이 열심히 할 때 놀았다고 여겼다.

자신들은, 적어도 페블 위크 자신은 결코 그러지 않았는데────────.

그렇게 그가 타인의 경멸적인 시선과 자괴감 속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면서 살아가던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막일을 끝내고 밤늦게까지 술을 퍼마시며 회포를 푼 뒤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걸으며 집으로 가던 길에 그는 한 남자와 만났다.

한밤의 어둠보다도 더 짙은 검은 로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검은 가면으로 온 얼굴을 완벽하게 가린 몹시도 수상하고 불길한 자였다.

페블 위크가 남자를 보는 순간 그를 거나하게 취하게 했던 술기운이 싹 달아나며, 동시에 공포와 긴장으로 그의 온몸의 털이 곤두서버렸다.

길드에서 의뢰받은 막일이나 하는 신세로 전락해 실전 감각이 녹슬 대로 녹슨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온몸의 감각이 더없이 예리해진 채 그의 몸은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아니, 분명 그의 의식은 전에 없이 각성하여 전투태세에 들어갔다고 여겼지만, 그러나 그의 몸은 그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어느새 땅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남자 앞에 더없이 공손하게 주저앉아있었다.

그런 그에게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눈앞의 남자는 페블 위크에게 남자치곤 가늘고 톤이 높은 목소리로 자신을 ‘사제’라고 소개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황금의 잔이 쥐어져 있었다.

자신을 ‘사제’라고 칭한 남자는 아무 말 없이 페블 위크의 앞으로 황금의 잔을 내밀었다. 잔 안에는 검은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저 황금의 잔 속에 담긴 검은 액체를 마셔서는 안 된다. 페블의 의식은 또렷하게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같이 붉게 충혈되었고, 동시에 그의 두 손은 덜덜덜 떨면서 무언가 저항할 수 없는 인력에 이끌리듯이 잔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그의 의식이 저항하려 했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그의 떨리는 두 손이 잔을 받들어 입 근처로 가져와 잔에서 나는 향기가 그의 코를 자극한 순간, 그의 이성은 날아가 버리고, 그의 몸은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어미의 젖을 탐하듯 잔 속의 액체를 꿀꺽꿀꺽 탐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순간, 수상쩍은 검은 액체가 목 뒤를 타고 꿀렁꿀렁 넘어가는 그 순간!! 지고의 쾌락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렸다.

창관에서 여자를 안을 때의 쾌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행복과 만족감이 그의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페블 위크에게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이 아무리 남들에게 무능하고, 폐기물 취급을 받더라도, 이 세상에서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사랑해준,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날부터 페블 위크는 그 정체불명의 검은 액체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더 이상 현실은 그에게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저 그의 모든 것은 검은 액체를 위해, 그걸 위해서라면 그는 ‘사제’가 시키는 것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설령 그것이 살인일지라도─────.

하지만 어느 날부터 ‘사제’는 페블의 앞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페블은 갈증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그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점점 폐인이 되어갔다. 조금이라도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하루 종일 술에 젖어 살았고, 결국에는 뒷골목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삶이 괴롭다.

죽을 만큼 괴롭다.

하지만 죽을 수는 없다.

죽더라도 적어도 한번………, 단 한 번이라도 다시금 그 검은 액체를 맛보고 죽고 싶다.

그런 그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았음인가. 자신을 ‘사제’라고 칭했던 남자가 다시금 페블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이전보다도 더 불길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으며, 급기야 짙은 피 냄새마저 페블의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풍기고 있었지만, 페블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사제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페블의 앞을 걸어갔다. 페블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런 사제를 홀린 듯이 뒤따라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제국의 수도를 벗어났을 때 아무 말 없던 사제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역사는 300년 전에 일어났던 마족과의 대전쟁을 탄식의 전쟁이라고 부릅니다만, 용자와 ‘6명’의 절대자들만은 그 전쟁을 원죄의 전쟁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당신은 아시나요?”

그런 영문 모를 사제의 말은 페블에게 닿지 않았다. 지금 페블의 의식은 그저 검은 액체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 검은 액체를 탐하여 이 목마름을 해소하고 싶을 뿐이었다.

사제는 그런 페블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었다.

“후후후, 도대체 무엇이 용자와 다른 절대자들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걸까요. 이런 영겁의 저주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다니……….”

사제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걸음을 멈춘 후,

“───────란 칭호는 오히려 용자에게 어울리지 않습니까.”

어느새 페블과 사제는 숲 안쪽에 있었다. 그곳은 이미 다른 세계가 되어버린 숲이었다. 사제는 페블에게 황금의 잔을 내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이것이 마지막………,

이곳으로 온 이후, ‘사제’의 그 어떤 말도 페블의 귀에 닿지 않았었지만, 그 말만은 페블의 뇌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이걸 마신 다음에는 그럼 자신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는 그 자리에 절망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제의 다리를 붙잡고 울며 애원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으나, 그런 막무가내가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페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페블은 마음을 다잡았다. 오히려 한 번이라도 더 검은 액체를 맛볼 수 있다니, 자신은 행복하다고까지 여겼다.

그렇게 페블은 최후의 검은 액체를 탐닉했다.

미친 듯이 탐했다.

그가 그렇게 마지막 검은 액체를 다 마셨을 때였다.

페블의 두 눈에 어두운 하늘이 갈라지며, 그 갈라진 틈으로 거대한 붉은 뱀이 요사스러운 몸짓으로 지상을 향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뱀은 허공에 멈추더니 입을 찢어지도록 크게 벌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페블의 생에서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는, 같은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미모의 붉은 여인이 나와 땅에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페블을 향해 천천히 내려왔다.

여인은 아무것도 몸에 걸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의 나신은 너무도 성스럽고 아름답다고 여겨져 페블은 음란한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전라의 여인이 페블에게 다가와서 상냥하게 그의 뺨을 쓰다듬기 전까지는……….

그 작고 붉은 입술이 페블의 뺨, 목, 쇄골에 순서대로 새가 쪼듯이 살짝살짝 입맞춤한다. 페블은 여인의 입술이 자신의 몸에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쾌락으로 입에 거품을 흘리면서 하반신에서 온갖 액체를 흘리고 있었다.

어느새 알몸이 된 페블의 가슴과 등을 여인은 가녀린 손가락으로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자세를 낮춰 페블의 젖꼭지와 배꼽을 요염하게 핥고 깨물며 자신의 흔적을 페블의 몸에 새겼다.

여인의 흔적이 자신의 몸에 새겨질 때마다 페블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충족감과 쾌락에 그저 몸을 움찔움찔 떨더니────,

이윽고 페블의 의식은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제의 눈앞에는 새하얀 나무에 목을 매단 수없이 많은 시체들이 있었다. 그 시체들 안에는 조금 전까지 페블이라고 불렸던 남자도 있었다.

사제는 그런 무수한 시체들이 목을 매달고 있는 새하얀 나무를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 없다는 표정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는 곤란한 사람이군요. 또 어디로 사라진 건지.’

사제는 자신의 오랜 악우를 떠올렸다. 자신과는 다르게 너무도 자유분방하고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한 그는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본디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사라져있었다.

‘그렇다고 황금사과 상회를 이렇게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 없으면 없는 대로 가진 패 안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겠지요.’

‘지금만큼은 용자가 자신의 세계에 걸은 저주에 감사해야겠습니다. 덕택에 이런 것도 가능해졌으니까 말이죠.’

그렇게 사제는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사제가 떠난 자리에는 시체들에게서 떨어져 내린 혈액이 마법진을 그리더니 그 안에서 피와 시체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뱀이 하늘로 올라갔다.

그렇게 허공에 올라간 뱀은 자신의 몸을 둥글게 말아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꼬리를 물어 완전한 원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원 안쪽의 공간은 천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

그리고 무대는 다시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모험가 길드 하루살이.

수많은 모험가들에게 있어서 여성 모험가의 존재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동경의 대상이자 낭만이었다.

숱한 남성모험가들이 미모의 여성 모험가와의 낭만적인 모험을 꿈꾼다.

특히 그러한 여성 모험가 중에서도 파미유의 멤버들은 독보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그녀들은 그야말로 남성들의 낭만의 결정체. 아름다운 미모와 자신들보다 낮은 등급의 모험가들에게도 한결같이 밝은 미소로 대해주는 상냥한 성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들만의 가게를 차리겠다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하루하루 활력을 받는 수많은 남성들은 곧이어 그녀들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팬들 사이에선 그녀들이 누구 한 남자의 여인이 되는 게 아니라 언제까지나 모든 남성들의 마음의 안식처로 남도록 사적인 접촉을 금지하며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협정이 자연스레 만들어지게 되었다.

오늘 모험가 길드의 1층 로비는 간만에 활기가 넘쳤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거대상회인 황금사과 상회의 의뢰를 받고 상행에 따라나섰던 파미유의 멤버들이 오늘 수도에 돌아왔단 소식을 다들 일찌감치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의 팬을 자처하는 모험가들은 만사 제쳐두고 다들 이곳에서 그녀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안 제이너. 그 역시 그러한 파미유의 팬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모인 모험가들 중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대다수가 브론즈지만 그는 그보다 윗 단계인 실버 중에서도 곧 골드로 승급이 유력한 모험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남몰래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협정 따윈 개나 줘버리라지.’

물론 지금은 그 역시 숨을 죽이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파미유 멤버 세 명을 전부 부인으로 맞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이라면 능히 그럴 자격이 있으며, 또한 자신이라면 가능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예정된 장밋빛 미래란 그것을 기다리는 것 또한 하나의 즐거움이다. 이미 그의 안에서는 파미유의 멤버들이 자신의 부인이 되는 것이 예정된 조화이기에 이렇게 길드에 와서 그녀들을 기다리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었다.

이미 그녀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날 자식과, 손자, 손녀들의 이름까지 300개 정도 정해두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기분은 곧이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웬처음 보는 녀석이 자신의 부인(이미 그의 안에선 결혼까지 했다.)을 꼬드겨서는 지근거리에서 아주 살갑게 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미유의 멤버들까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상냥한 미소와 필요 이상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레아가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한 소년의 손을 붙잡으며 길드 가입 신청하는 곳으로 안내하는 모습을 본 순간 그는 머리끝까지 피가 쏠렸다.

팬클럽에 몇 개월만 늦게 들어와도 선후배의 차이가 있는 법이었다. 장장 5년 동안 멀리서 바라만 보며 걸어온 고독한 파미유 팬의 길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선배 팬들이 요정들이 누군가의 손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눈물 섞인 협정들을 싸그리 무시하고, 어디 감히 아직 팬클럽은커녕 길드에도 가입하지 않은 것 같은 애송이가 선배 팬들이 다 보는 앞에서 감히 파미유 멤버들과 깨를 볶는단 말인가?

이대로는 질서가 깨지고 만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미래의) 부인들이 더럽혀지고 만다.

그렇게 되기 전에 그녀들을 구해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다.

에안 제이너는 그렇게 비장한 사명감을 품고, 저 자중할 줄 모르는 소년을 응징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에게 다가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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