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제2 화
* * *
레니스와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루아는 대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의식을 행하였고, 주어진 천명을 부정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루아가 지닌 힘의 대부분이 레니스에게로 흘러들게 되었다.
그렇게───,
역천(??)에 도달하여 일순(一?)을 이룬 레니스가 루아가 펼친 아공간에서 나와 이름 모를 숲에 현계하였을 때였다.
근처에 있던 사나운 몬스터들이 레니스를 단순히 간만에 나타난 먹음직스러운 사냥감 정도로 여기고 그를 포위하듯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지만,
레니스가 자신 안에 자리 잡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상반된 기운을 확인하기 위한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의해 레니스를 둘러싼 무수한 몬스터들은 자신들의 죽음조차 느끼지 못한 채 일제히 털썩털썩 소리를 내며 그 자리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레니스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몬스터의 육중한 몸이 대지에 쓰러지기도 전에 이미 그 자리서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숲을 벗어나 대도시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았던 그였지만………,
의외라고 하면 의외랄까?
아니면, 오히려 현자였던 그에게 더없이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그는 지금 느긋한 걸음으로 숲속을 여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이 시대에 사는 누군가가 본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식상해 보이는 그저 그런 평범한 숲이었지만,
그 평범함이 레니스에게는 무척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하늘에는 먹구름이 땅에는 탄식과 비애를 호소하는 기도밖에 없었으니까……….
그건 물론 숲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생명으로 넘쳐흘러야 할 곳에도 시냇물 대신 핏물이 흘렀고, 싱그러운 풀 내음 대신 역한 시체 썩는 내만이 자욱했었다.
그렇기에───,
그저 자연스럽게 꽃이 피고, 나무에는 열매가 맺히고───,
그런 너무나도 당연한 광경이 레니스에게는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노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저 이렇게 걷고 있기만 해도 가슴 한켠이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그런 레니스의 마음을 헤아려서일까.
루아 역시 어느 정도 레니스를 배려해 영체화한 상태로 그의 곁에서 조용히 걷고 있었다.
아니,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게 어쩌면 단순히 그녀에게도 꽤나 마음에 들어서일지도……….
한동안 그렇게 레니스와 루아가 별다른 말 없이 걷기를 잠시.
먼저 질린 것은 루아였다.
처음에야 그녀에게도 무척 신선했지만, 아무래도 비슷비슷한 광경이 계속되다 보니 물렸나 보다.
레니스를 배려해 조용히 있던 그녀가 더 이상은 한계라는 듯이 먼저 물꼬를 텄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정했어?”
“글쎄……, 어떠려나.”
루아의 질문에 레니스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듯이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뗐다.
“역시 우선은 정보 수집부터려나. 마족이 사라진 이후 세계가 어떻게 개편되었는지도 조금 흥미가 일고.”
레니스가 그렇게 어느정도 앞으로의 방향을 정리함과 동시였다.
레니스의 뜻이 정해진 순간 거미줄이 사방으로 단번에 쫙 뻗어 나가는 듯이 레니스의 감각이 숲 전체로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그의 의식이 광대한 숲 전체를 뒤 훑고 난 후 막 숲을 벗어나 세상 바깥으로 향할 때였다.
그는 숲의 외곽에서 시선을 일순 멈추고 말았다.
그곳에는───,
레니스가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불길한 핏빛의 결계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현자인 그나 마왕인 루아의 시선으로 볼 땐 조잡한 결계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부정함만은 진짜였다.
조금 신경이 쓰인 레니스는 의식을 살짝 집중하여 결계의 내부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비치는 풍경이 순식간에 점점 확대되더니 아주 먼 곳에 있는 결계의 안이───,
한 폭의 지옥도가 마치 그의 코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게 되었다.
동시에───,
“히익……!”
“까……, 깜짝이야. 이런 걸 할거라면 적어도 미리 말해주라고!!”
레니스 주위의 공기가 급속도로 내려가며 주변이 얼어붙고, 레니스에게서 루아조차 손사래 칠 정도로 섬뜩한 한기를 느낀 그녀가 무심결에 작은 비명을 지르며 곁에 있는 레니스에게 작은 불만을 토로했다.
레니스는 그런 루아의 반응에 신경쓰지 않고 조금 낮은 목소리로 루아에게 물었다.
“루아, 어떻게 생각하지?”
레니스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루아는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평정을 되찾았다. 재빨리 자신을 가다듬은 그녀는 시선을 던져 레니스가 보고 있는 광경을 그녀 역시 스윽 훑었다.
거대한 상회와 그 호위로 추정되는 일단의 무리들이 인간의 시체 목 부분에서부터 무수히 피어난 팔을 휘두르는 몬스터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다.
그것은 나무였다.
인간의 시체로 구성된 모독의 나무였다.
그 시체 나무가 채찍처럼 휘두르는 무수한 팔은 또 수없이 많은 눈동자로 뒤덮여 있어서, 그것들과 마주하는 자들은 눈동자들이 깜빡일 때마다 마치 온몸에 지네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본능적인 혐오감과 두려움에 빠져 언제 의식을 놓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쉬운 상황은 아니네. 괜찮은 호위가 한 명, 그럭저럭 싹수가 보이는 마법사가 한 명 있어서 당분간은 버티겠지만, 그것도 시간문제겠지.”
“아니, 그런 걸 물은 게 아니다. 부정함의 끝에 닿아있던 네 의견을 물은 거다.”
“아아──, 그런 거였어?”
“………되다 만 것들이네. 정확히는 만들어지다 만 것들이지만.”
루아는 레니스와 다른 의미로 불쾌하다는 듯이 착 가라앉은 서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답했다.
“그렇군. 아니길 바랐건만.”
“그나저나 뭐야, 곧바로 도와주러 가지 않는 거야? 당장이라도 도와주러 갈 줄 알았는데 말야.”
“혹시 마기의 영향 때문일까? 그런 거라면 앞으로의 행보가 무척 기대되는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군. 딱히 그런 건 아니다.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이 있어서 말이지.”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가능하다면 얼굴 정돈 한번 보고 싶은걸.”
루아에게 그렇게 말한 뒤 나는 루아의 말을 뒤로하며 좀 더 찬찬히 인간집단들을 관찰했다. 루아의 말대로 분명 다급한 상황이긴 하나 그래도 찰나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시체를 토대로 삼아 피어난 무수한 팔들을 채찍처럼 휘두르고 있는 괴물의 근원을 본다. 그러자 이윽고 나는 그것이 여기서 아주 먼 곳에 있는 누군가와 이어진 인형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의도 또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히 저것들 하나하나가 핏빛 결계의 기둥이 된다거나 눈앞의 인간들을 살해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닌 좀 더 큰 무언가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의도가 상당히 불순하군……….
여기선 좀 더 파헤쳐볼까.
그렇게 레니스가 마물들과 이어진 심령의 실을 거슬러 올라가 저것들의 주인을 보려할 때였다.
갑자기 사태가 크게 변했다.
이대로는 다 같이 서서히 말라죽을 뿐이란 걸 깨닫고 각오를 굳혔는지,
루아가 장래가 꽤 유망해 보인다고 언급했던 은발의 마법사 소녀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
“리노아! 뒤는 맡길게. 부디 아버지를 부탁해!!!”
“아가씨!!!”
마법사 소녀에게 리노아라고 불린 이 중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난 검사가 은발의 소녀를 미처 제지하기도 전이었다.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은 후 마력고갈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그 뒤 괴물들에게 자신의 육체가 무참하게 짓이겨진다 해도, 한순간이나마 결계에 거대한 빈틈을 만들어 거기로 리노아와 자신의 아버지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듯이, 그녀가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은 대규모 마법의 영창에 들어갔다.
하지만───,
푸슉!
푸화악!
소녀가 영창에 들어감과 동시에 괴물의 온몸을 뒤덮고 있는 눈동자들로부터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오며 눈동자들이 터져나가더니, 그 속에서 무수한 팔들이 튀어나왔다.
썩어 문드러진 살점이 바닥에 탁한 핏물과 함께 뚝뚝 떨어져 내리다 보니 듬성듬성 그 안의 뼈마디가 엿보이는 너덜너덜한 무수한 팔들은 허공의 한 점을 향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감기기 시작하더니 하나의 거대하고 날카로운 검이 되어 그 끝이 소녀를 향해 쏘아졌다.
“아……, 안돼!!!”
“아가씨!!!!!”
그 자리의 모두가 소녀의 확실한 죽음을 예감했다.
그들이 절규하며 소녀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는 것보다도 빠르게 이미 무수한 시체들이 기괴하게 얽히고 섥혀 완성된 거대한 한 자루 죽음의 검은 소녀의 몸 한가운데를 꿰뚫기 직전이었다.
그때───────, 그들은 절망 속에서 보았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의 얼핏 봐선 소년인지 단발의 미소녀인지 구분이 잘되지 않을 정도로 신비로운 외모를 한 소년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소녀의 등 뒤에 나타나 소녀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을.
그리고 전율했다.
그 단 한 명의 무척이나 온화한 분위기를 지닌 소년이 이 절망적인 전황을 한순간에 타개하는 가공스런 모습에!!!
...
황금사과 상회 회주의 딸이자, 장래가 촉망받는 마법사이기도 한 소녀, 아스텔 시즈는 조금 전 자신이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확신했다.
자신을 향해 얄미울 정도로 올곧게 날아오는 사이함으로 가득 찬 한 자루 거대한 검.
그 안에서 언뜻 흘러나오는 사령의 기운만으로도 자신을 포함한 이곳에 있는 전원이 수십, 수백 개의 날카로운 검에 온몸을 꿰뚫려 죽는 환상을 보았고, 아스텔은 곧이어 자신의 몸에 닥쳐올 참상과 고통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러나───,
소녀에게 소녀가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고, 대신에 소녀는 한줄기 청량한 바람과 자신의 등을 부드럽게 지탱해주는 따스함을 느꼈다.
그 청량한 바람은 핏빛의 사이한 결계 내부의 음산함과 온몸을 옭죄게 하는 주박마저 단번에 날려버렸고, 등 뒤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은 그녀에게 마치 어린 시절 아버지 품에 안겼던 것과도 같은 안도감을 주었다.
그녀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조심조심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자 그녀의 등 뒤에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붉은 기운이 도는 너무도 아름다운 눈을 가진 소년이 자신을 등 뒤에서부터 감싸며 오른손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맞잡아 그녀가 시간이 부족해 끝내 영창을 마무리하지 못했던 마법을 안쪽에서부터 더욱 강하게 재구성하여 괴물의 가공할 일격을 막아냈다.
긴장이 풀렸음인가 무심코 다리에 힘이 빠져 쓰려지려는 자신의 허리를 부드럽게 왼손으로 끌어안아 지탱해주며 소년이 그녀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으신가요? 미력하지만 가세하겠습니다.”
그 부드러운 미소와 등 뒤로부터 전해져오는 온기가 주는 안도감에 소녀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감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상인의 딸답지 않게 말을 더듬고 얼굴을 붉히며 무심코 소년의 시선을 회피하고 말았다.
소년은 그런 소녀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다시 한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무수히 많은 모독의 나무들을 향해 느긋한 발걸음으로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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