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001화 PROLOG.
001화. PROLOG.
이유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켰다. 머리도 맑고 몸 상태도 최상이다. 새벽에 비가 많이 와서 걱정했는데. 창문 밖을 보니 날씨도 화창하게 개어있었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다. 오늘에 맞춰 며칠 전부터 아니, 1년 전부터 애쓴 보람이 있는지 오늘은 정말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오늘은 바로 수능 시험이 있는 날이다. 유민의 성적을 고려하면컨디션 조절만 잘 하고 특별한 변수만 없다면 충분히 서울에 있는 최상위권 대학에 합격할 수 있다.
유민은 화장실로 가서 간단하게 세안을 한 후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이미 어머니와 아직 중학생인 여동생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민. 일어났니? 곧 다 되니 와서 앉아.”
“네. 어머니.”
“오빠. 오늘 계란말이는 내가 했어.”
“그래. 고맙다.”
지금 유민에게 포근한 미소를 지어 주는 이 여인은 유민의 친어머니는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중학교 2학년인 이 발랄하고 귀여운 여동생 역시 친여동생이 아니었다.
유민은 어릴 적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 지금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은 2년 전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한 가족이 되었다. 혼자였던어머니가 하나뿐인 딸과 함께 우리 집으로 들어오며 한 가족이 되었다.
아직 2년밖에 함께 하지 않았지만, 유민은 친어머니, 친여동생처럼 여겼다.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친어머니보다는 지금 어머니가 진짜 친어머니 같았다.
물론사랑스러운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유민은 외동아들이라 항상 누나나 여동생이 갖고 싶었다.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아마도 여동생이 생긴 게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오늘 수능이라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모양이었다. 유민은 식탁에 앉았다. 특별한 날이라서 그런지 식탁에 놓인 음식에는 신경을 쓴 흔적이 보였다.
유민은 우선 여동생이 자랑했던 계란말이부터 맛보았다. 재혼 전까지는 어머니와 단둘이살아서 그럴까? 여동생은 나이에 맞지 않게 요리를 잘한다. 잘게 썰어 넣은 당근과 양파, 파 등으로 색감도, 씹는 느낌도, 영양도 좋아 보였다. 물론 맛도 좋았다.
“오빠. 어때?”
“가영이 계란말이는 언제나 일품이지. 맛있어.”
“헤헤….”
유민은 맛도 있고 영양도 듬뿍인 식사를 마치고가방을 챙겨 현관문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여동생도 현관문까지 따라와 배웅해주었다.
“오빠. 파이팅!”
“유민아. 하던 대로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네.다녀오겠습니다.”
오늘 수능 시험을 칠 장소는 유민이 졸업한 중학교였다. 유민의 집과는 낮은 산 하나 두고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20분이 넘게 걸리지만, 산을 도보로 넘으면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조금 일찍 나와 시간의 구애를 받는 건 아니었지만, 산 공기를 마시며 긴장을 풀고 싶었던 유민은 산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뒷산에는 처량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좁은 도로와 산정상에 작은 절이 있을 뿐이라 평소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다.
유민은 인적없는 조용한 도로를 따라 산을 올랐다. 새벽에 내린 비의 여파인지 도로가 군데군데 패여 있었고 드문드문 산등성에서 굴려 내린 큰 바위도 보였다.
“괜히 산길로 왔나. 그냥 버스를 타고 갈 걸 그랬네.”
유민은 최대한 신발이 젖지 않게 마른 땅을 고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산 정상에 가까워지며 길은 점점 더 가팔라졌다.
유민의 눈에 차가 한 대 보였다. 검은색 고급 세단으로 보이는 그 차량은 도로를 벗어나 길가에 있는 나무를 들이받고 있었다.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빗길에 미끄러진 걸까? 아니면 브레이크 고장이라도 난 걸까? 상당히 세게 들이박았는지 성인 남성이 팔을 벌려 안아도 남을 정도의 굵은 나무가 반쯤 기울어있었고 차량의 앞쪽도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유민은 급하게 달려갔다. 썬팅이 심하게 된 차량은 바짝 붙어야 안이 보였다. 운전석에 한 명, 뒷좌석에 한 명이 있었다. 둘 다 심한 상처를 입었는지 정신을 잃고 있었다.
유민은 문을 열고 싶었지만, 안에서 잠겼는지 열리지 않았다. 유민은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문을 깰 만한 물건을 찾았다.
유민은 적당한 크기의 돌을 주워들고 안에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창문을 깼다. 그리고 문의 잠금 새를 풀고 상처를 입은 두 사람을 살폈다.
일단 둘 다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뒷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은 이마의 상처에서 상당한 출혈이 있었다. 아직 고교생인 유민이 제대로 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놔두면 위험해질 거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유민은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출혈 부위에 대고 힘껏 눌렀다.그리고 반대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119에 신고를 했다.
유민은 현재 장소와 상황을 빠르게 전달했고 곧 출동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유민은 빨갛게 물들어가는 손수건을 보며 손에 더 힘을 주며 지혈을 했다. 아무래도 119차량이 오기까지는 손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늘은 수능을 치는 날이다. 조금 일찍 나오긴 했지만, 사고 난 차량을 발견하고창문을 깨서 문을 열고 지금 상황에 이르기까지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119차량이일찍 도착해준다면 그나마 간신히 시험장에 도착할 것 같았다.
유민은 시험에 대한 걱정, 그리고 지금 생명이 경각에 놓인 이 사람에 대한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유민이 할 수 있는 건 상처 부위를 덮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는 것밖에 없었다.
기다리던 119차량이 도착했다. 이곳으로 오는 산길이 좁기도 했고, 새벽에 쏟아진 비의 여파로 중간중간 도로가 파괴되고 장애물도 있어서인지 예상보다 한참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안전요원들이 두 명의 환자를 차량에서 꺼내고 응급처치를 한 후에 119차량에 실었다.차량이 출발하는 모습을 확인한 유민은 급하게 수능 시험장으로 달렸다.
유민은 숨을 헐떡거리며 시험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수능 시험은 이미 시작했고 유민은 시험장으로 입장할 수도 없었다. 유민은 한동안 멍하니 서서 시험장으로 쓰이는 교실을 바라보았다.
---------- 4년 후 ----------
유민은 답안 작성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탁으로 향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남은 사람은 몇 명 없었다.이 강의의 시험을 보는 학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그냥 포기하고 빨리 나가거나 시간을 끝까지 쓰면서 마지막까지 발악하거나.
그만큼 이 강의의 시험은 어렵다. 하지만 유민은 그 두 부류 모두 해당하지 않았다. 종료 시각을 10분 남기고 모든 답안을 여유 있게 작성할 수 있었다.
“유민 다 푼 거니?”
“네.”
이 강의의 조교인 정수지가 유민이 내민 답안지를 살펴보며 감탄을 했다. 자세히 살펴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모두 정답일 것이다.
“유민. 이번 학기도 과탑이겠네?”
유민은 대학입학 후 한 번도 과탑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과 조교인 수지도 잘 아는사실이었다.
“모르겠어요. 이제 기말 평가 끝났는데요.”
“이번에도 과탑이면 나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하하….”
“물론. 내가 사줄게.”
유민은 수능 시험에 시간을 맞추지 못해 재수를 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명문대인 Y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그 기쁨은 잠시였다. 대학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차 사고로 부모님두 분 다 돌아가셨다.
부모님의 죽음은 유민에게 슬픔과 강한 충격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직 어린 여동생을 챙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졸지에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유민은 틈틈이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학비만이라도 장학금으로 해결해야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휴학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다행히 유민은 올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다녔고 생활비도 여유까지는 없었지만, 부족하지않을 정도로는 벌 수 있었다. 유민은 군대를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현재 23살인 유민은 대학 3학년이었다.
수지는 유민의 과 선배이자 과 조교이다. 그래서 이런 유민의 가정형편을 잘 알고 있었다. 수지는 착하고 성실한 유민이 마음에 들었고 그런 유민의 사정이 너무나 딱하고 안쓰러웠다. 그래서 유민을 볼 때마다 자주 밥을 사주거나 챙겨주었다.
“괜찮아요. 수지 선배. 저 이만 가볼게요.”
“그래. 수고했어.”
유민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여동생인 가영에게는 일찍 들어간다고 미리 말을 해 놨으니 아마도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고3인 가영은 내년에 대학생이 된다. 수재이자 여동생 바라기인 유민의 집중적인 과외를 받았고 거기다 자신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가영은 성적이 좋았다. 유민처럼 수능 시험날 사고가 있었던 것도아니라서 수능 점수도 잘 받았다. 이변이 없는 한 명문대에 충분히 합격할 것이다.
유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신민서였다. 민서는 유민이 과외를 하는 학생이다. 아니 민서는 수능을 치렀고 따라서 과외는 그만두었으니 학생이었다는 표현이 올바르다. 민서는 재수생으로 여동생인 가영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수능을 치렀다.
민서는 유민의 과외를 받으며 성적이 상당히 올랐다. 여동생인 가영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울권의 4년제 대학은 충분한점수였다.
[민서.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웬일이에요. 집에 한 번 찾아오기로 했잖아요. 과외 끝났다고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예요? 기말평가 다 끝났죠? 오늘 올 수 있어요?]
[오늘은 안 되는데…. 동생 만나기로 했어.]
[동생은 매일 보잖아요. 동생. 동생. 맨날 동생 타령이야….]
[미안해. 미리 약속해서….]
[흥. 내가 오빠 보고 싶어서 연락한 줄 아세요? 엄마가 하도 연락하라고 해서 한 거예요.]
유민의 과외로 민서의 성적이 대폭 오르자 민서의 어머니는 상당히 기뻐했다. 그래서 민서의 어머니는 유민을 정말 좋아한다. 매번 과외를 하러 갈 때마다 정성 들인 식사 대접을 해주었고 과외비도 듬뿍 올려주었다. 그 덕분에 유민도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다만 민서 어머니의 유민 사랑은 조금 정도를 넘어섰다. 유민이 착하고 성실하고 대학도 명문대를 다니다 보니 은근히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민서도 유민에게 틱틱거리긴 했지만,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았어. 내일이나 모레 갈게.]
[내일 오세요. 알았죠?]
[그래. 내일 갈게.]
[약속했어요. 흥.]
통화가 끊겼다. 유민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민서 얘는 왜 맨날 자신만 보면 투덜거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말은 잘 들었다. 수업도 열심히 듣고 시킨 과제도 제대로 했다. 어떨 때는 귀엽고 얌전한데 또 어떨 때는 고양이처럼 새침하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했다. 유민의 집은 오래된 24평형 아파트이다. 부모님 사후 원래 살던 집을 처분하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 집도 초반에는 부모님이 남겨준 재산으로 어렵게 유지를 해나갔지만, 여동생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공간은 확보해야 한다는 욕심으로 더 이상 작은 집으로는 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
“오빠. 어서 와요. 씻고 오세요. 식사 준비는 다 됐어요.”
“그래. 수고했어.”
가영은 오빠에게 존댓말을 쓴다. 4살 차이로 그리 많은 나이 차이는 아니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 낯선 유민에게 존댓말을 쓰던 것이 그대로 버릇처럼 입에 붙었다. 부모님 사후로는 유민을 마치 아버지처럼 의존하게 되면서 더욱 고정화 되었다.
유민은 간단하게 손발을 씻은 후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가영이 정성 들여 차려 놓은 음식들이 장만 되어있었다.
유민과 가영은 둘만 살게 되면서 가사를 어느 정도 분담하게 되었다. 유민은 가영이 고3이 되면서모든 가사를 도맡아 하려고 했지만, 평소에는 유민의 말을 모두 따라주고 순종적이던 가영이이때만은 강하게 자기주장을 했다.
“오빠는 돈도 벌어오시고 이것저것 다 해주시잖아요. 식사 준비랑 빨래만이라도 제가 할게요.”
결국, 유민은 항복했다. 원래 모질지 못하고 남들에게 잘 휘둘리는 성격인 유민이 가영에게 이길 수는 없었다.
사실 유민은 가영이 요리해준 음식을 좋아한다. 어머니를 일찍 여윈 유민은 어머니의 손맛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다. 그런 유민에게 어머니의 손맛이라고 하면 새어머니와 새어머니의 요리 실력을물려받은 여동생의 음식뿐이었다.
“원서는 어디 넣기로 했어?”
“Y대 경영학과요.”
Y대 경영학과는 유민이 다니는 대학의 과이다. Y대도 명문대이긴 하지만, 가영은 조금 더 위를 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영은 가사 분담을 할 때처럼 이것 또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유민은 내년이면 4학년이 된다. 유민은 가영이 조금 더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한편 단 1년이긴 하지만, 동생과 같은 과에 다닌다는 것이 어느 정도 기대되기도 했다.
사실 Y대 경영학과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 대학을 높이면서 과를 낮추느니 이것도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유민은 이쯤에서 가영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 알았어. 합격해서 같이 다니자.”
“네. 꼭 그럴게요.이제 내년이면 오빠 후배가 되는 거네요? 호호.”
가영의 미소가 눈부셨다. 그렇게 작고 수줍음 많던 가영도 이제는 완전히 여자가 되었다.키도 커졌고 가슴도 제법 부풀어 올랐다.
유민은 여동생이라서 색안경을 끼는 게 아니라 가영은 정말 예쁘고 몸매도 좋다. 함께 외출하면 남자들의 시선이 여동생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유민은 오랜만에 가영과 함께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며 잡담을 나눴다. 이런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 너무나 행복했다. 그냥 이런 행복이 오랫동안 쭉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영아. 잘 자.”
“오빠도 안녕히 주무세요.”
유민과 가영은 각자의 방으로 헤어져 들어갔다. 유민은 기말 평가가 끝났으니 이제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민서의 과외가 끝났으니 다른 아르바이트도 알아봐야 한다.
유민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뭔가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유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이 잠들었던 방이 아니었다.
“여긴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