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56화 (56/56)

〈 56화 〉 문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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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견이라는 건, 참견 당하는 사람에게도, 참견하는 사람에게도 귀찮은 일일 것이다. 때때로 참견 그 자체에 취미를 붙인 듯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별종들도 있긴 하지만 찬드라가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동남쪽 섬나라에 있다는 성성이 같은 괴물이 사람을 납치해 갔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괴물에게 인간이 희생당한다는 사실은 분개할 만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찬드라가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술기운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행동력을 주기도 하는 법.

그녀는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그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달려나갔다.

“짐승이 사람을 납치해가? 혼쭐을 내 줄 거야!”

라고 소리치면서.

그녀의 근력과 탄력 넘치는 몸은 다리에도 예외란 없었다. 벽돌로 포장된 도시의 바닥이 쿵쾅쿵쾅 울렸다. 일부는 금이 갔을지도 모르겠다. 지진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그녀는 정체불명의 짐승이 여인을 납치했으리라 여겨진 곳으로 향했다.

달려가는 중에도 그 짐승이 하늘을 가르며 나는 듯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녀는 빠르긴 해도 건물들 사이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뛰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그 짐승 보다는 한참이나 늦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간에 높은 성벽도 한번 넘어야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본 녀석의 모습은 성벽을 미끄러지듯 타넘는 모습이었으니까. 밤새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이 있긴 했지만, 찬드라와 ‘그 짐승’, 날다람쥐 잭을 포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성벽 밖은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한 숲속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숲속의 짐승이 두려워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표범이라거나, 또는 커다란 이빨로 무장한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술에 취한 찬드라는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숲속을 헤집고 다녔다. 사실, 그런 것이 나타난들 어쩌랴, 표범은 찬드라의 조르기에 목뼈가 부숴질 것이고, 제 아무리 날카롭고 긴 이빨을 자랑하는 몬스터라 할지라도 그녀의 손아귀에 잡히면 뽑히고 말텐데.

찬드라는 한시간 가량 숲속을 헤맸다. 그리고 한 오두막을 찾았다.

그 한시간 동안 날다람쥐 잭과 추악한 변태 노인은 여인을 묶어두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일들을 벌인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대체로 맞는 편이다. 찬드라의 불길한 예감은 오두막을 지목했다.

‘어느 짐승이 사람을 납치해서 오두막에 들어가겠어?’ 같은 의문이 들 법도 하겠으나, 한참을 달리느라 혈액 순환이 활발해진 찬드라는 오히려 취기가 더 늘었다.

그런 생각 따위가 뇌속에 잔여할 시간은 없었다.

“사람이면 문 열어! 짐승이면 딱 기다리고 있어라! 죽여버릴 테니까! 짐승의 새끼가 사람 귀한줄 모르고 함부로 채가? 그것도 연약한 여인을? 아! 나도 여인이긴 하지? 아, 암튼! 죽여버릴 테니 열어! 열어!!!”

취기가 잔뜩 오른 찬드라가 문을 쿵쿵 두드렸다. 쿵쿵 두드리다 못해 주먹질을 시작했다. 두툼하고 굳은살이 박힌 거권은 술기운에 마취되어 나무문을 부술 듯 두드려도 아픔 하나 느끼지 못했다.

*

변태 영감이 지하실에서 끔찍한 짓을 하고 있을 동안, 잭은 어느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었다.

가면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하얀색이었다. 이렇다할 표정도 없고, 이목구비의 구분도 모호한, 눈구멍이 뚫린 심심한 흰 판이라 표현해야 할 정도다.

“이걸 깜빡 하고 있었군. 노인네가 들어온게 차라리 잘 됐어.”

그는 ‘예술 작품’ 을 만들 때 가면을 쓰곤 했다. 반드시라고 해야 할만큼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었지만, 없으면 허전한, 그런 습관이었다.

‘페르소나’ (persona.)

고대 희랍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말하는 단어다. 심리를 표현할 때에도 쓰이는 이 말은, 마치 연극에서 다른 인격을 연기하듯 자신의 본성과 다른 무엇가를 나타낼 때에도 쓰인다.

날다람쥐 잭에 있어서는 그 용례가 조금 뒤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에겐 가면을 쓰고 ‘예술 작품’ 을 만들 때가 본성이고, 가면을 벗고 세상을 살아가는 때가 연극을 하고 있을 때다.

연기라는 행동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다. 유명한 배우가 남모를 고민 속에 안타까운 결정을 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리듯, 정신을 소모하는 일이다. 그것이 행복을 연기하는 것이건, 또는 파멸을 연기하는 것이건, 그 내용과는 별개로.

그럴 것인데, 날다람쥐 잭은 어떠할까. 인생 자체가 개같은 코미디인 것이다. 빌어먹을, 더러운 본성을 타고났다. 사람을 찢고, 생명을 끊어내고, 피로 바닥을 적시고, 비명이 고막을 흔들어야만 즐거움을 느끼는 쓰레기 같은 본성이었다.

그것을 숨기고 사회의 규범이 허용하는, 도덕의 굴레에서 자신을 연기해야만 했다. 그건 정신이 깨지고 바스라질 정도의 중노동이었다. 매일매일이 정신적 노동이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처형장에 끌려가 사라져 버릴 목숨일 테니.

사실 이것은 역겨운 변호다. 사실 그가 이토록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 한들, 우리는, 대중은 그것에 공감해줄 의무 따윈 없다. 그는 악랄한 범죄자에 불과하며, 퇴치해야할 돌연변이일 뿐이다. 찬드라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술에 취하지 않은 멀쩡한 정신의 찬드라라면 말이다.

방음처리가 잘 된 지하실에서는 간간히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과 함께 들려오는 욕설과 호통, 밖에서 그짓이 끝나길 기다리는 건 기분 나쁜 일이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폭력으로 여인을 망가뜨리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 을 위한 도화지에 상처가 생기는 것 만큼 불쾌한 일은 또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시간 가량이 지나갔다. 돼지처럼 탐욕 가득한 노인은 정력마저 숫돼지를 닮았는지 여인을 유린하는 데에 아직도 열중하고 있었다.

밖에서 별안간 고함이 일었다. 찬드라가 욕설과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

들어본 목소리였다. 찬드라, 그녀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잭이 있는 마을에 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잭은 그녀를 우연히 만났고, 그녀와 대화해본 적도 있었다.

사실, 그녀처럼 눈에 띄는 거구인 사람은 단 하루만 마을에 있더라도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시에는 재잘재잘 시끄러운 새도 많고, 이리저리 소문을 물고 다니는 쥐새끼들도 많으니까.

“문 열어! 안 열면 죽여 버린다!”

이 곳에 누군가 이렇게 침입하려고 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사냥꾼들이 자주 드나드는 숲도 아니었고, 나무꾼이 나무를 하는 숲도 아니었다. 음산하게 나무가 늘어진 이 숲은, 몬스터가 나온다거나 하는 무서운 소문 탓에 사람의 발길이 적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문을 걸어 잠그는 빗장을 튼튼하게 만들어 두지 않았다. 애초에 침입할 사람이 없으니, 문을 잠가두는 건 지하실의 문으로 충분했다. 혹시 누군가 들어 오더라도 지하실만 들어가지 않으면 됐기 때문이었다.

잭은 지금 2가지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지하실로 내려가 노인에게 비상 상황임을 알리고, 그와 힘을 합쳐 찬드라를 죽여 버리는 것이 첫번째 고민이다. 두번째는 몰래 자신만 지붕의 틈으로 빠져나가 도망치는 것이었다.

첫번째 생각을 실행에 옮기려 지하실로 발걸음을 떼려고 할 때, 찬드라의 주먹질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거권에 두들겨지는 문은 빗장이 뜯어지려고 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문짝째로 부숴지려고 하는 소리였다.

그 진동은 오두막 전체에 옮겨져서,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 했다.

“이런 미친… 어떻게 안 거지? 이런 개같은 상황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첫번째 계획은 포기하기로 했다. 노인과 힘을 합친다고 해도 찬드라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무기로 쓸만한 건 지하실에 있는 잡다한 날붙이들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쇠발톱’ 정도다. 짧은 단도로 저 거구의 찬드라를 제압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복부를 찌른다 한들, 두터운 장갑과도 같이 발달된 복근을 찢고 내장을 손상시키는 건 불가능할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열심히 만든 ‘쇠발톱’ 의 형상은 격투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베고 찢는 것에만 치중한 형상, 짐승의 발톱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인체에 깊은 열상을 낼 수는 있겠지만, 찌르기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사람을 절명시킬 때에는 베는 것보다 찌르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자신이 가진 가장 강한 무기인 쇠발톱은 찬드라 같은 전사를 상대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이었다. 그녀 같은 강인한 전사는 피부가 찢어지고, 근육이 드러나고, 뼈가 보여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쇠발톱 이라는 건, 그저 약할 뿐인 여인, 힘 없는 자를 일방적으로 유린할 때에나 쓰일 법한 물건인 것이었다.

“씨팔!”

잭은 가면을 벗어 밟아 버렸다. 가면은 손쉽게 으깨졌다.

잭은 으깨진 가면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붕을 향해 기어올랐다.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은 가면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지하실로 향하는 비밀통로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오직 탈출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에겐 좀 미안한 일이지만, 동시에 조금은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찬드라의 눈썰미가 좋지 않다면 지하실로 향하는 통로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만 도망치면 노인은 찬드라에게 들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의 주먹에 얼굴이 부숴지는 것 보다는 일단 도망치는게 상책일 거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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