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서역에 도착한 천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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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눈물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거센 빗물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턱밑까지 눈물이 내리기 전에 사라지니 울어도 우는 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전념할 수 있음이었다.
이렇듯 찬드라의 여행 첫날은 끝날 줄 모르는 빗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진탕을 지나다 낙마하여 죽을 뻔한 것은 약과라 할 수 있겠다. 그녀가 서역에까지 도달하는 긴 여정에 비한다면 말이었다.
도중에 강도나 도적떼에 쫓기기도 여러번, 그녀가 괴력의 소유자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살아 남지 못했으리라. 들리는 마을마다 식량도 넉넉히 구입했고, 돈을 그다지 아낌없이 썼는데도 서역에 도착해서 보니 둘째가 챙겨준 노잣돈보다 도리어 늘어 있었다.
이 괴이한 현상의 이유는 찬드라의 거권에 절명한 강도 덕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도의 봇짐 덕이었다.
여행자 한 명을 털어 먹으려는 도적의 수준도 알만 하지 않은가. 그들은 대게 형편 없는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찬드라의 용력에 상대가 되질 않는 놈들이었다.
비유하자면 꿀단지를 뒤집어쓴 채 배고픈 곰에게 뛰어가는 꼴이라고나 할까, 꼭 찬드라에게 용돈을 챙겨주고 싶어서 안달난 바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개중에는 위험한 도적도 없진 않았지만, 나중엔 도적 놈들이 덤벼들길 바랄 때도 있었다.
어차피 찬드라 자신을 죽이거나 해하려 한 악한들이니, 정당방위 차원에서 죽여 버리거나 불구로 만들어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행 중의 심심풀이 땅콩이 되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경제적 관점으로 보자면 여행 중인 그녀에게 있어 주 수입원이기도 했다. 급전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거저 생긴 금덩이를 마다하는 것도 바보일 테다.
찬드라의 거체 덕에 그녀를 여인으로 알아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근육이 많이 빠진 여행 후반기에는 몰라도, 막 여행을 시작한 그녀의 어깨 근육은 황소처럼 우람했다. 로브를 뒤집어 쓰고, 헐렁하고 허름하게 다니니 대체 그 누가 여인인 줄 알까.
그 덕에 희롱하는 남정네들이 잘 꼬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다만 개중에 극히 드물게 찬드라가 여인인 것을 깨닫는 이도 있었다.
그녀가 로브를 벗거나, 또는 씻기 위해 옷차림을 가볍게 했을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나곤 했다. 그녀의 젖가슴은 발달된 근육 만큼이나 존재감을 발했다. 평소에는 로브 속에 숨겨져 있으니 알 겨를이 없지만, 땀 좀 닦으려 웃옷을 벗으면 쳐다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풍만했으니 말이었다.
허나 찬드라가 여인인 것을 간파한 경우에, 그 끝은 썩 좋게 끝나질 못했다.
그들은 도적떼처럼 찬드라를 둘러싸 제압하고 겁탈하길 원했다. 매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으나 몸은 근육질의 투사 같은 여인인데 왜 남자들의 정력을 동하게 하느냐 묻는다면, 그 이유는 이해하기 조금 어려운 것들이었다.
굳이 그 까닭을 파헤치자면...
산해진미만 먹다 보면 때론 투박하거나 거친 음식이 생각나곤 하는 법이다.
찬드라에게 삿된 욕망을 품은 사내들이 딱 그런 경우였다. 미색을 맛으로 표현한다면 천하일미라 할 수 있는 여인들, 비단결처럼 고운 피부, 우윳빛깔의 아기 궁둥이 같은 살갗만 품다 보니 질리는 것이다.
그런 호색가들에게 투박하고 야성적인 찬드라 같은 여인은 그야말로 희귀한 별식이요, 금광석 같았으리라. 그런 강인한 여인을 복종시키고 탐하는 것은 각별한 느낌일 것이다. 거구의 근육질 미녀를 무릎 꿇리고 제 물건을 물리고 싶은 정복욕이 그런 사내들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러한 몇번의 시도들은 일전의 강도들이 찬드라의 거권에 뭉게졌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최후와 별반 다를 것 없이 그들의 봇짐은 찬드라의 노잣돈의 큰 보탬이 될 뿐이었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여행 중에는 곤봉을 돌리고 바위를 들어 올리며 근육 단련에 힘쓰지 못하니 자연히 몸이 부드러워지고 여성스레 보여진 탓도 있으리라.
아마 여성스러워진 찬드라의 모습을 그녀의 부모님이 보았다면 참 좋아했을 텐데.
어쨌거나 그녀는 길고 긴 여정 끝에 무사히 서역의 땅에 도착했다. 날다람쥐 잭이 날뛰는 마을에 도착한 것이 며칠 전이다. 지존이 붕붕이를 타고 화원에 도착한 날을 기점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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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을 떨치는 연쇄살인범들의 범행은, 때론 불규칙해 보이거나 충동을 이기지 못한 동물적인 짓들이라 오해할 수 있으나 실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는 그들을 옹호하거나 살인을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날다람쥐 잭은 자신의 짓거리들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결코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싸구려 살인마가 아니라고 말이다. 어디 나를 한번 잡아 보라는, 세상을 향한 도전이자 유희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요즘 영 옛날 같지가 않네…’
날다람쥐 잭이 최근 하는 생각이었다.
주기를 가지고 살인을 해야 하는데, 규칙을 가지고 살인을 해야 하는데, 최근엔 그 엄격한 규율들에서 탈피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벌써 열명도 넘는 인간을 도살했는데 잡히긴 커녕 추측만 무성해지니 재미가 없어진 탓도 있다. 같은 자극이 반복되면 결국 익숙해지는 법이므로.
그래서 살인 수법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기존에는 둔기를 써서 일격에 죽여 버리는 것을 선호했다. 이번엔 색다른 맛을 즐겨 보기로 했다. 새로운 무기를 쓸 생각이었다.
맹수의 발톱처럼 굽은 모양을 한 단도였다. 조금 더 자세히 그 생김새를 묘사하자면 인니(??. 인도네시아)의 농부들이 풀을 베는 것에 쓰는 초승달형의 칼이었다.
거친 풀 무더기를 베어버리고 생선의 배를 따서 내장을 꺼낼 때에 유용한 모양인데, 이것이 살인에 적용되어도 유용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서역인들은 이런 형태의 도검은 사용하질 않았는데, 자신의 용도에 맞게 물건을 만들어낸 날다람쥐 잭의 재주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짐승 발톱처럼 생긴 이 칼을 쇠발톱이라 부르기로 했다.
쇠발톱의 칼날은 톱처럼 울퉁불퉁 하면서도 예리하기 그지 없었다. 두터운 가죽도 종이처럼 찢어버리고 발톱처럼 굽은 형상 덕에 깊숙히 파고들었다. 톱처럼 생긴 날 덕에 상처도 너덜너덜, 지저분하게 만드니 지혈도 용이하지 않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고통도 더욱 크다.
그야말로 미치광이 연쇄살인마 날다람쥐가 기뻐할 만한 물건인 것이다. 이런 도구도 손쉽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데, 살인 연습이나 하는 것에 낭비하지 않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발명에 힘썼다면 좋았을 것이다.
칼날을 더욱 예리하게 다듬은 날, 잭은 밤이 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이전의 범행은 단순히 목숨을 빼았는 것이었다. 그 때에는 그 정도여도 충분히 흥분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
이젠 그런 담백한 맛은 원하지 않았다. 좀 더 비린내가 나고, 좀 더 화려하고, 더욱 지저분한, 살인 그 자체만이 아닌 과정에서도 쾌감을 찾겠다는 말이었다.
범행에 쓸 무기를 이렇게 공들여 만든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이번 작업은 기대감이 컸다. 어서 해가 떨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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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드라는 저녁이 되어 숙소를 나섰다. 서역의 음식은 꽤 맛이 좋았다. 오늘 저녁은 어떤 고기 요리를 맛볼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길을 걷다 보니 눈에 띄는 간판이 있었다. 서역의 문자는 잘 읽을 수 없기에 정확히 어떤 가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술병 같은 것이 그려진 것으로 음식점 같은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대게 술을 파는 곳은 음식 맛도 괜찮은 법이다. 찬드라가 이해한 서역의 술집이란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신기하게 생긴 곳이니 한번 들어가 보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구석진 곳에 노인 하나가 약주하고 있었다. 그 외의 손님은 없었다. 약간 음산함을 풍기는 곳이었지만, 왜인지 풍겨오는 독특한 내음이 식욕을 돋구었다.
다만 음식점 치고는 영 어울리지 않은 장식들이 몇가지 있었는데, 각종 동물들의 박제들이 그것이었다. 고양이 박제라던가, 족제비 박제라던가 하는 독특한 것들이었다.
“아, 어서 오십쇼. 저희 가게는 처음이십니까?”
여자의 목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찬드라는 고개를 끄덕이곤 주인장 앞에 앉았다. 주인장은 잔을 닦고 있었다.
주인장의 인상은 콧수염을 멋드러지게 기른 사내였다. 그는 마른 체구였지만 속에 무언가 옹골찬 것이 들어 있어 근력이 느껴졌다.
“저희 가게는 그… 음식이 주 상품이 아니고 제가 직접 만든 술을 위주로 파는 곳이라… 음, 그러니까 처음 오신 분들은 이렇게 설명을 안 해 드리면 불쾌해 하셔서 하는 말이거든요.”
찬드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술이라, 그러고 보니 서역에 도착할 때까지 술에 제대로 취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긴장해야 하는 여행자에게 술은 상당한 사치품인 것이었다.
기왕 들어온 김에 술이나 몇잔 마시고 나가면 좋을 것 같았다.
찬드라는 목소리를 최대한 내리깔아 사내의 목소리를 연기하며 말했다.
“술 좀 마시려 하는데, 뭐 괜찮은 거 있소?”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주인장은 잠시 머뭇거렸다. 거구의 체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 약쑥으로 담근 술이 제일 맛 좋다고들 하죠. 그 외에는 소화에 도움이 되는 술도 있구요, 아니면 박하향이 나는 것도 있고, 많습니다요. 취향껏 말씀해 주시면 괜찮은 걸 드리겠습니다.”
“약쑥으로 담근 술이라는 거 한잔 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는 묵직한 병을 들어 코르크를 열었다. 엄숙하고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생긴 주인장에 비해 코르크 열리는 소리는 어울리지 않게 맑고 경쾌해서 약간 웃음이 나왔다.
찬드라의 피식거림에도 그는 신경쓰지 않고 잔에 술을 따랐다.
쑥의 초록 빛깔이 아른거리는 맑은 술이었다. 술잔의 밑바닥까지 그대로 보이는 투명함이었는데, 여지껏 이렇게 맑은 술은 처음 본 것이었다.
그것은 증류주에 약쑥을 넣은 일종의 담금주였는데, 찬드라는 서역의 증류주라는 건 처음이었기에 그토록 신기해 했던 것이었다.
증류라는 과정은 복잡하고 각종 장비도 필요하기에, 한평생 투박하게 살아온 찬드라는 접할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비싸기도 했고.
그녀의 눈 앞에 푸르스름한 액체가 찰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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