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몬순Monsoon.
* * *
"눈 앞에서 죽었소."
판텔로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애병을 잃은 장수가 내는 통곡이라거나 또는 그와 비슷한 분노를 내지를 생각인가? 지존은 그렇게 생각했다.
때때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이란, 사람을 순간 멍하게 만든다. 그 멍한 상태 같았다. 판텔로프가 아편 연기도 빨지 않고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말이다.
그런데 나오는 말이라고는,
"어떻게?"
극도로 건조한 말투였다.
"..."
"묻잖는가?"
"목이 꺾여 죽었소. 즉사였소."
"목이 꺾였다라? 그래, 닭처럼 모가지가 비틀려 죽었단 말이지?"
"... 그렇소."
아편 연기가 방을 가득 에워싸고 지존과 판텔로프의 시야를 어지럽힐 때쯤, 문을 두두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시종이었다.
"마실 것 좀 가져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오너라."
문이 열렸다.
*
지하실의 문은 철로 되어 있어서, 여닫는 소리가 상당했다. 기름칠을 잊은지 한참이나 지난 듯한 경첩은 끔찍한 비명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지하실에서 귀족에게 고문을 받는 여인들의 것과도 닮았다.
틀에 묶여 각종 변태스러운 고문을 당하던 찬드라는 잠시 의식을 잃었었다.
오랜 시간 잠을 재우지 않으니, 활시위가 돌연 끊어지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기절한 찬드라를 다시 깨워서 괴롭힐 정도의 정력이 남지 않았던 귀족은 지하실을 떠났었다.
그 속에서 찬드라는 묶인 채 슬픈 꿈을 꾸고 있었다.
끼이이익! 쿵!
한 사내의 등장과 함께 찬드라는 두려움에 떨며 정신을 되찾았다. 이젠 또 어떤 성고문을 당할지 수치스러움이 온몸을 삼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등불에 일렁이는 그림자는 귀족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둘째 오빠! 여긴 어떻게?”
“찬드라! 여기 있었구나! 이런 젠장! 얼른 풀어 줄게!”
그러나 쉽게 풀릴 고문틀이 아니었다. 열쇠는 구하지 못했는데 시간은 없었다. 시간을 지체한다면 곧 돌아올 귀족에게 들키고 말 것이었다.
찬드라는 둘째 오빠가 자신을 풀어 주려 하니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귀족이 자신을 괴롭히고 성욕의 배출구로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대로 도망 간다면 가족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명목상 신부로써 귀족의 집에 들어온 것인데, 신부가 가출을 해 버리는 꼴이 되어 버리니 난감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쇠사슬을 어떻게든 끊어 보려는 둘째에게 찬드라가 말했다.
“오빠! 이대로 내가 도망친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지 않아? 첫째 오빠는 알고 있어?”
“... 형은 지금 상황까지는 모르지. 그래도 대충 얘기가 끝난거야! 이 귀족 가문이 의외로 내실이 약하다는 것도 파악했고, 귀족 놈에게 당한 집안이 한 둘이 아니라 원성이 꽤 자자하더라.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탓이었지.”
“내실이 약하다는게 여기서 왜 나와? 그거랑 지금 도망쳐도 되는거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타파사 집안이 이 가문을 먹어 버리기에 좋은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우리는 단체로 속아 사랑하는 여동생을 한낱 성노리개로 쓰이도록 했어. 그러니 명분도 있다.”
찬드라는 순간 울컥 하는 감정이 일어 소리를 높였다.
“명분? 설마 명분을 세우려고 날…!”
철썩! 살을 에는 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둘째가 벼락같이 화를 내며 찬드라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그러곤 눈물을 흘렸다.
“뭐라고! 널 팔아 넘긴 걸로 알아? 상황이 그렇게 된 거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여기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잣집이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거기에 시집 가게 되었으니 잘 되었다고만 생각했지!”
둘째는 형제들의 마음을 오해하는 찬드라가 순간 미워 손이 나갔다. 이내 후회함과 동시에 찬드라의 처지가 불쌍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울컥이는 것은 찬드라도 마찬가지, 그녀도 울음을 터트렸다.
“흑… 흑…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데!”
“서방으로 가! 넌 이제 남편을 뿌리치고 도망친 여인이 된 것이니 이쪽에선 더 이상 살기 힘들거야. 네 힘이면 너가 원하던 대로 살 수 있을거야.”
“정말 괜찮을까? 도망쳐도 괜찮은 거야?”
“그래, 뒷일은 오빠들한테 맡겨!”
찬드라는 둘째의 눈을 응시했다. 둘째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올곧았고, 찬드라는 그 속에서 과거의 둘째를 떠올렸다.
둘째 오빠는 항상 찬드라를 이해하려고 하는 편이었다. 첫째 오빠는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늘 찬드라를 탐탁찮아 했는데, 그 이유는 찬드라가 여자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괴력 덕분에 타파사 형제는 뒷골목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첫째는 찬드라를 집 안에만 가둬두고 바느질이나 시켰을 것이었다.
다만 둘째는 늘 과묵한 편이었다. 뒤에서 지켜보다가 찬드라가 슬퍼할 때 가끔씩 위로해 주는, 그런 오빠였다.
서방으로 가라는 둘째의 말은 이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이곳에서 찬드라는 그냥 여인일 뿐이었다.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리고, 육아하고, 그것의 반복.
성인 남자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려 나무에 걸어 버리는 괴력의 찬드라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할까? 그건 무언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들이 마음에 걸렸던 둘째였다. 그래서 그는 찬드라가 귀족의 집에 간 날 똘마니들을 불러 정보를 얻게 했다.
똘마니들이 얻어온 정보들은 상상 이상이었다. 귀족은 이상 성벽을 가지고 있어서, 정실 부인은 혹사를 당하다 죽었고, 첩으로 들어간 여인들은 모두 불구가 되거나 폐인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둘째가 찬드라를 구하러 올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았다. 귀족의 가문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려 하는 중이었기에, 금전적으로 쪼들리고 있었다. 아랫사람들은 귀족의 행패에 질려 충성심을 잃었다.
뿌리부터 흔들려 가고 있는 거목이었다. 거기에 더해, 귀족은 욕심에 비해 능력이 탐탁찮았다. 탈세와 범죄 행각을 막기 위한 뇌물 공세는 관리들이 생각한 것에 비해 너무 적었다.
그리고 타파사 일가가 뒷세계를 장악한 마을에 발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첫째에게 있어 역린이었고, 가문을 없앨 만한 큰 분쟁의 첫 단추가 되어 주었다.
“정말 괜찮은 거지?”
그녀의 질문에 둘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구속하고 있던 틀에서는 기이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까드득! 뿌드득! 까가가각!
찬드라가 힘을 쓰기 시작하니 그녀를 속박하고 있던 나무틀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며 비틀리고 부숴졌다. 그녀를 구속하기엔 턱없이 연약한 구속구들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반항했더라면 귀족은 아마 지하실에서 터져 죽었으리라. 그녀의 근육과 힘은 더 이상 자신을 가두지 않고 뻗어나갔다.
둘째는 그 경이로운 힘에 순간 입을 벌렸다. 그러나 놀랄 시간도 부족했다. 얼른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톱과 각종 도구로 사슬을 끊었다. 나체의 찬드라는 채찍질과 같은 변태적 행위로 인해 상처가 온몸을 덮고 있었다. 둘째는 얼른 그녀에게 옷을 입히고 금과 은이 담긴 주머니를 쥐어주었다.
“지금 밖은 비가 엄청나게 오고 있어. 지하실이라 빗소리도 듣지 못했지? 비가 온 덕분에 보초 서는 놈들도 별로 없어. 얼른 말을 훔쳐서 달아나! 서방으로 가서 자유롭게 살아!”
“나도 같이 싸울래! 내가 오빠들보다 싸움도 잘 할걸! 난대없이 서쪽으로 가라니 말도 안 돼!”
“바보 같은 소리 마! 네가 있으면 우리 타파사 형제가 널 빼돌린 게 되고, 그래서는 명분이 서질 않아! 그렇다고 숨어 살거야? 평생? 명예롭지 못하게? 남편을 버리고 떠난, 과부만도 못한 여자의 삶을 살겠다는 거냐?”
“그런…!”
지하실을 빠져나온 둘째와 찬드라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마굿간으로 뛰어갔다. 이 시기 아랫녘은 몬순(Monsoon. 작중에선 열대 몬순 기후를 말한다.)으로 인한 폭우로 물난리가 심한 때였다. 이번엔 그 어느 때보다 비가 거세게 내렸고, 이건 찬드라의 탈출에 무엇보다 좋은 기회였다.
굳게 잠겨 있는 마구간을 걷어차니 큰 소리와 함께 빗장이 부숴졌다. 거센 빗소리는 그 정도의 파열음은 쉽게 묻어 버렸고, 주변엔 어떤 사람도 없었다.
덩치 큰 말을 골라 올라탔다. 둘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동생아. 배움이 짧은 이 오빠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최선인 것 같다. 서쪽에는 모험가라는 직업도 있대, 그건 실력만 있으면 되는 거라 너처럼 힘센 사람은 거기서도 대접 받을 수 있을 거다. 여기서 네 큰 날개는 무겁고 쓸모 없는 깃털 뭉치일 뿐이야. 그쪽에 가선 마음껏 날아봐라.”
무언가 대답 하기도 전, 누군가 소리쳤다. 마침 소변이 마려워 뒷간에 가려던 한 귀족의 부하가 마굿간이 열려 있는 걸 보았다. 녀석이 얼른 뛰어와 찬드라와 둘째를 보고 소리친 것이었다.
“뭐야! 왠 녀석이야!”
둘째는 말의 엉덩이를 때려 달리게 했다.
“오빠! 어떡하려고 그래!”
“어디로든 가서! 날개를 마음껏 펼쳐!”
“오빠!”
둘째는 부하에게 달려갔고, 엉덩이를 맞은 말은 밖을 향해 내달렸다.
폭우에 잠겨 둘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고삐를 잡아 당겨도 말은 왜인지 멈추려 하지 않았다. 찬드라는 그렇게 빗속을 나아가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