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46화 (46/56)

〈 46화 〉 호부견자일까 견부견자일까.

* * *

비비안느는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팔짱을 낀 채로 지존과 릴리아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는 한참이나 있어서야 말하기 시작했다.

“음… 쉽게 말해서 존, 지금 ‘부탁’ 하는 것 맞지?”

지존은 그녀의 냉정한 눈빛이 익숙하지 않았다. 몸을 안았을 때는 부드럽고 따스한, 이상적인 여인의 몸이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날카롭고 딱딱하기 그지 없었다.

“부탁이라… 그보다는 제안이지. 릴리아가 화원에서 손님을 받으면 화원은 돈을 벌어서 이득이고, 릴리아는 정기를 얻을 수 있으니 이득이지. 벌써 설명 했잖는가.”

비비안느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그럼 우리 쪽에서도 제안을 하나 해야겠어. 날다람쥐 잭 말이야, 기억 하겠지?”

“날 그렇게 의심했는데 기억하지 못하면 바보겠지.”

“그러면 그 녀석을 잡아줘. 이것도 부탁이 아니라 제안이야.”

“...”

귀찮은 노릇이었다. 연약한 여인을 연쇄 살인하는 못난 녀석은 당장에라도 찢어 죽이고 싶긴 하지만, 역시 행동으로 나타나기엔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얼른 이 서역 땅의 고수들을 만나서 스킬이라는 것의 비밀을 알아내고 싶은데, 살인마를 잡아 달라니 시간이 아깝다.

그도 그렇거니와 이것이 부탁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따지자면 릴리아를 화원에 데려온 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져온 격이기도 하다. ­물론, 그녀가 사내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이 전제이지만­

어찌 보면 제안이 아니라 호의로까지 확대 해석을 할 수도 있는 것인데… 비비안느가 야박하게 느껴졌다.

“이게 왜 제안이지? 내 쪽에서 얻는 건 그다지 없을텐데.”

“생각해봐. 날다람쥐 놈 때문에 우리 화원은 운영이 제대로 되질 않고 있어. 릴리아가 여기서 적응하려면 첫 번째로 선행되어야 할 일이야. 그 놈을 없애 버리는 거.”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새삼 비비안느가 어떻게 화원이라는 곳을 세우고 운영해 나가고 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협상과 사업에 있어서 그녀는 절대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었다. 냉철한 여장부였다.

지존은 그녀의 말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의문도 드는 것이, 다른 이들은 뭘 하고 자빠졌길래 그런 녀석 하나 잡지 못하고 범행을 하게 내버려 둔다는 것인가?

“그래. 내가 적격이라면 한번 힘 써보지. 그나저나 관청이나 포졸들은 발정난 광견 하나 어쩌질 못하고 있는 건가? 손가락만 빨고 있는 거야? 아니면 놈이 미꾸라지처럼 달아나는 거야?”

“관청? 포졸? 레인저 같은걸 말하는 거야? 물론 그 사람들도 가만히 보고 있진 않았어. 그 놈은 귀신 같아. 흔적 따윈 없어. 목격자만 가끔 있을 뿐인데, 그마저도 특징이 일치하질 않대.”

“한 놈이 아닐 수도 있겠군. 따라하는 놈이 생겼을 수도 있겠고.”

“어쨌건.”

비비안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팡틴은 내심 존을 어떻게 설득해서 날다람쥐 잭을 잡자고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왕언니가 말 몇마디로 설득을 끝내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팡틴은 로즈의 귀에 속삭였다.

“언니, 우리도 왕언니처럼 되자.”

로즈는 빙그레 웃었다.

*

새벽닭이 울 때가 가까워졌다. 어두울 때 얼른 나가야겠다는 지존을 말려 화원에서 잠들게 했다. 그러나 숙면을 취하진 못했다.

왜 숙면을 취하지 못했는지는 널부러진 세명의 여인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멋진 사내에게 정이 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지 간밤에 육체의 대화가 여러번 오간 탓이다.

비비안느와 로즈는 그나마 좀 사람 다운 자세로 자고 있었지만 팡틴에게는 지존과의 대화가 좀 버거웠던 것 같았다. 그녀는 거의 시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온몸에 힘이 빠진 채 늘어져 자고 있었다.

팡틴을 붙잡고 뒤에서 몸을 흔들었었다. 침대가 부숴질 정도로 허리를 흔들고 정신을 차려보니 팡틴은 절정의 끝에서 기절한 상태였다. 그녀는 기절한 상태 그대로 잠에 빠진 것이었다.

반면 릴리아는 쌩쌩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 또한 기절할 만큼 격렬한 섹스를 한 다음이었으나, 인간과 달리 섹스가 아무리 길고 진했다 한들 인간 여인들처럼 탈진할 일은 없다. 오히려 힘이 솟고 포만감이 가득한 것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자는 척을 했다. 누워 있는 지존의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인간 여인이 된 것 같아. 행복해… 나도 인간 남자랑 결혼하고 살면 매일 이렇게 사내 품 옆에서 아침을 기다릴 수 있을까?”

릴리아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을 하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에 지존은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릴리아는 여전히 자는 척을 했다. 지존은 자신의 가슴에 올려진 릴리아의 손을 잡고 그녀의 귓가에 말했다.

“귀엽네.”

릴리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새빨게졌다. 귀까지 붉게 물들어서, 어둠 속에서도 빛날 것 같았다.

그녀는 자는 척 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천연덕스럽게 막 잠에서 깨어난 것을 연기했다.

“흐음…? 일어나셨어요?”

“오냐. 그래서 너가 귀여운 거야. 릴리아.”

이 말에 그녀의 체온이 어찌나 달아 올랐는지. 물이라도 뿌리면 증기가 나올 듯 했다. 부끄러워 하는 것도 인간 여인에 비해 훨씬 격렬한 편인 듯 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질문했다.

“어딜 가시려는 건가요? 좀 더 쉬시지, 계속 여행하셨잖아요. 몸이 상하면 어떡하나요?”

“어젯밤에 그렇게 몸을 썼는데도 쌩쌩한 걸 보면 모르겠나. 아무렇지도 않아. 원래는 길리엄이랑 프레데릭이 있는 곳으로 바로 날아가려고 했는데, 그건 오늘 밤으로 미뤄야겠어.”

“그러면요?”

“루돌프라는 놈 기억하나? 너를 만나러 꿈 속으로 들어 갔을 때, 그 녀석 때문에 너한테 죽을 뻔 했었지. 너에겐 은인일지도 모르겠지만…”

순간 지존에게 죽을 뻔 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소름이 돋은 릴리아였다. 그러나 그 감정은 이내 사그라졌다. 인간 여인처럼 살아갈 수 있게 된 것 같은 이 현실이 안정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젠 더 이상 동굴에서 기약 없는 생활을 이어가지 않아도 될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의 주인이 멋져 보이기 시작한 것도 있었다. 그 잔인하고 무시무시해 보였던 지존은 이제 멋드러진 미청년처럼 보였다. 그에게 안겼을 때 그가 내뿜는 정기는 무엇보다도 달콤했고, 무엇보다 만족스러웠다. 진심을 다해 그를 섬기기라.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서큐버스는 알기 힘든, 사랑이라는 감정일지도 몰랐다.

“루돌프요? 덩치만 크고 못생긴 놈이요? 그 놈을 맞이하러 가시는 건가요?”

지존은 잠시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이내 눈을 뜬 지존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 놈은 죽었다. 내가 잠결에 죽였지. 그놈 아비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아.”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자식을 죽였는데 그 아비 되는 자에게 내가 죽였다고 말한다니, 선전포고라도 되는 것인가.

릴리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부러 죽인 건 아니었고, 뭣보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어서 괜찮다. 그리고 그놈 아비가 날 죽이려 든다고 해도 상관 없다. 그놈 수준을 보아하니 아비도 생각만큼 대단한 녀석이 아닐 거야. 호부견자(虎??子. 아버지는 훌륭하나 아들은 그에 따르지 못함.)인 꼴이라면 차라리 좋겠군.”

지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헤아릴 수 없는 릴리아로써는 그저 그를 바라보고 그가 무사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감정은 한편으로는 웃긴 것이었는데, 그 누가 자신의 주인을 무사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핀의 뺨따귀를 때려 길들이고 전투적으로 변이한 서큐버스를 빈사 상태로 만드는 사람이 무엇이 두려울까. 그렇게 생각하니 걱정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지존은 병아리처럼 잔뜩 웅크린 채로 잠에 빠진 붕붕이를 쓰다듬었다. 누가 맹수 아니랄까봐 숙면을 방해당하니 매우 불쾌한 듯 했다.

그 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지 말라는 격언도 있지 않겠는가.

붕붕이는 자신을 건드리는 손을 단숨에 절단내기라도 할 듯 부리를 열었다. 그러나 그 맹수의 동작은 즉시 저지당했다. 지존이 뺨을 후려치려 손을 드니 녀석은 병아리처럼 온순해졌다.

과연, 루돌프의 아비를 찾아 감에 있어서 한점 두려움도 없는 지존이었다. 심지어 그것은 도덕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부끄럼 없는 행동이었기도 했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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