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44화 (44/56)

〈 44화 〉 대화들. 계획들. 생각들. 그리고 본모습.

* * *

*

프레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그리핀 발을 아주 많이 채집했으니… 안될 것도 없겠군 그래. 활 쏠 때 나를 뒤돌아 서게 했잖아? 그건 분명 대단한 묘술일테니 그랬겠지. 그렇다면야 안될 것 있겠나. 가능할 거라고 보네. 사실 자네 공이 제일 크니까 말이야. 이번에 나는 한 게 없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길리엄이었다. 반면 길리엄의 말을 들은 프레데릭은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약간 불편해 하는 눈치로 그에게 말했다.

“뒤돌아 서게 한거 말일세, 그거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나?”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과민하게 반응하는 프레데릭이 요상할 따름이었다.

“...?”

“혹시 불만이었다 한들 어쩔 수 없어. 혹시… 혹시라도 말이야. 자네 내가 뭘 했는지 본 건 아니겠지?”

프레데릭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대며 길리엄에게 물었다. 허리춤에는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단도가 있었다.

프레데릭은 다소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할 생각이었다. 그가 솔레나리온(편전)을 사용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때때로 모험가에게 있어 자신의 개인 정보라는 것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었고, 비기(??)란 비밀스러움이 있어야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프레데릭에게 있어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프레데릭의 궁술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나, 검술 실력은 길리엄에게 비할 바 없었다.

길리엄의 검 실력이 어딜 가도 으뜸으로 보이는 그런 수준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딜 가도 무시당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40줄의 나이까지 검 하나로 모험가라는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둘 사이의 거리는 대략 한 마신(馬?), 길리엄이 롱소드를 휘두르며 말머리를 치우치면 프레데릭의 경동맥은 충분히 끊어낼 거리였다.

프레데릭은 자신의 손을 허리에 옮기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길리엄의 눈 앞에서라면 달랐다.

진검을 사용한 싸움에서 검술의 실력이 높고 낮음은 의외로 허망한 것이 되곤 한다. 누가 먼저 검을 뽑았느냐가 죽고 사는 것이 누구인지, 마지막에 서 있는 것이 누구인지 결정하곤 했다.

길리엄은 프레데릭이 언제든 그 단도를 자신의 목에 쑤실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프레데릭의 긴장한 손끝이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프레데릭은 순간 길리엄이 칼잡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혹자는 좀 전까지 농담을 섞어가며 말하던 두 사람이 갑작스레 저런 분위기를 띄는지 의아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둘은 모험가, 모험 중에 두 사람이 풀숲으로 들어가 한 사람만 나오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프레데릭.”

“...”

“네 사람으로 출발한 모험이었지.”

“그래.”

“한 사람은 죽어 버리고, 다른 한 사람은 먼저 떠나가서 우릴 기다리겠다는군. 이것 참 쓸쓸해서 어떡하나 몰라.”

“...”

“프레데릭. 자네마저 없어 진다면 쓸쓸해서 말을 탈 수 없을 것 같다네.”

잔뜩 긴장한 프레데릭에 비해 차분한 말투다. 길리엄은 프레데릭이 극단적 행동을 할 요량도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은 엄연히 칼잡이로써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물인데, 고작 짧막한 단도로 내 목을 쑤시려 한다니 어처구니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차분한 말투를 유지했다. 언제나 느긋해 보이는 말투와 몸놀림 덕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길리엄이었다. 이런 걸로는 동요하지 않는다.

“내가 왜 없어 진다는 거지?”

프레데릭의 손은 단도 근처가 아닌, 단도를 쥐고 있었다. 언제든 뛰쳐나갈 생각인 미친 망아지의 기세였다.

그 행동에서 길리엄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이런 썅! 프레데릭! 좆같은 수작질 때려쳐! 다 보인다구! 염병! 칼잡이 앞에서 뭔 개짓거리야? 없어지긴 씨발! 뒤지니까 없어지겠지! 그! 손! 안 놔?! 해 보자는 거야 지금!”

늘 나긋한 자세에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길리엄이 큰소리를 치니 프레데릭은 깜짝 놀랐다. 주변 나무들에 앉아 있던 새들마저 고양이라도 등장한 듯 깜짝 놀라 날아갔다. 뒤따르는 말을 탄 채 시퍼렇게 질려 있는 루돌프의 시체도 깜짝 놀라 넘어갈 음량이었다.

휴화산으로 오랜 세월을 지낸 화산일수록 분화의 강도가 거세다던가. 길리엄의 분노는 염라대왕의 호통 같았다.

언제나 진지해 보이는 프레데릭도 소름이 쭉 돋은 채 두 손을 올렸다. 싸울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표현하는 동작이었다.

“씨발… 흠… 커흠! 미안하네. 자네도 별 생각 없이 한 동작이었겠지. 화내서 미안하네 프레데릭. 그렇지만 뻔히 보이는 걸 가만히 무시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 내가 더 미안하군 길리엄.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걸 들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지.”

“모험을 떠난지 벌써 보름도 한참 넘었지. 날 세는걸 깜빡 할 정도니… 꽤 시간이 흘렀어. 피곤해서 서로 그런 것 아니겠나. 일단 좀 쉬고 가세.”

당장에라도 피를 볼 것 같이 불꽃을 튀기던 두 사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해졌다. 앞서 말했듯, 모험이란 원래 이런 것이었다.

둘은 큼지막한 나무 아래에 말을 세웠다. 두 사내는 약속이라도 한 듯 무기를 말잔등에 올려두었다.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허리에 찬 단도도 마찬가지였다.

위험한 곳을 다니다 보면 칼이 항상 근처에 있어야 안심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반대로 칼이 근처에 있기에 불안함이 생기기도 하는데, 방금과 같은 상황이 그렇다. 있으면 쓰게 되는 것이 도구이고, 늘 가까이 하다보면 피 볼 일이 생기는 것이 무기이다.

두 사내는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기억도 안 나는군.”

나무에 앉아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아, 존은 지금쯤 동굴에 도착했을까. 그 서큐버스 년을 어떻게 할 생각인지 궁금하군.”

길리엄이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니 프레데릭이 말을 이었다.

“그 동방 녀석. 강해지려면 무슨 짓이듯 할 녀석처럼 보였는데. 잡아 먹기라도 하지 않을까 싶네.”

길리엄은 눈이 동그래지며 프레데릭에게 말했다.

“응? 서큐버스를 잡아 먹으면 강해 진다는가? 그렇다면 나도 한점 달라고 하고 싶군.”

“아니, 말이 그렇다는 것 아닌가. 동방 놈들이 별난 것 먹기를 즐긴다고 들어서 한 말일세. 왠지 마물을 먹으면 강해질 것 같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뭐… 그러진 않을테지. 듣자하니 그 서큐버스 년이 존이란 녀석을 주인으로 삼겠다느니 어쩌겠다느니 그러던데, 노예를 잡아먹는 주인은 없을 것 아닌가.”

“흠… 그러고 보니 참 그러네. 궁금해… 자네가 레옹 드 수숑네 파티에 들어가게 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떠날지도 참 궁금하지만… 존이 그년을 어떻게 할지가 훨씬 더 궁금하군.”

프레데릭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심지어 나도 그렇다네.”

*

릴리아의 목덜미를 잡은 채 이리저리 그녀의 면모를 살피는 지존이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움츠려 있는 릴리아에게 말했다.

“그 꼴은 두고 볼 수 없으니. 너는 이제 인간 여인의 삶을 살아야겠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인간의 정기를 갈취하며 삶을 이어가는 존재인 서큐버스에게 인간 여인의 행세를 하라니, 쥐 가죽을 덮어 쓴다고 고양이가 쥐가 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인간들은 저희 서큐버스를 보고 몬스터라 하며 척살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어찌 인간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인간 여인의 삶이라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이나… 어쨌거나 널 죽이지 않고 살릴 방법은 그뿐일 것이다. 너는 미색이 훌륭하니 여러 사내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게다가 너는 정기를 모으면 외견도 바꾸어낼 수 있지 않더냐.”

릴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여인이란 어린애건 백발의 초로한 노년이건 예쁘단 칭찬에 약하다더니, 서큐버스도 예외는 없었다. 몸선이며 얼굴이며 여인을 닮은 것이, 마음 속도 닮은 듯 했다.

“제가 미색이 훌륭한가요… 저는 어머니나 언니들에게 비하면 한참 못생겼는걸요.”

“아니. 그렇지 않다. 너는 ‘화원’ 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곳은 너희 서큐버스라는 종족에게 더없이 좋은 곳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화원의 존재를 알고 있는 돈 많은 사내들에게도 더없이 좋은 일일 것이고… 무엇보다 왕언니라는 사람이 제일로 좋아할 거다.”

“왕언니요…?”

지존은 릴리아에게 자신의 계획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그럴듯 했다. 허나 그럴듯 하게 들리지 않는다 한들 릴리아에게 있어 선택권은 없었다. 만일 지존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곳 동굴을 지나는 사내들의 정을 취하며 사는 것을 택한다면…

그녀는 지존의 철권에 목숨을 잃고 말게 될 것이니까.

한참 그녀에게 설명하던 지존은 릴리아에게 한가지 질문을 했다. 어렵사리 말을 꺼내는 것이라는 듯, 그는 머리를 긁었다.

“그런데 릴리아. 네 본모습이 어떻길래 어머니나 언니들에게 비하면 한참 못생겼다고 하는 것이냐? 나는 네 주인이니 네 본모습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정말이신가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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