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붕붕붕 아주 작은 그리핀, 꼬마 붕붕(??)이가 나간다.
* * *
프레데릭의 고함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길리엄은 눈을 뜨자마자 보인 충격적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몸이 굳었다.
잠결에 사람을 죽인 지존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으나 죄책감 따윌 느끼진 않았다. 루돌프는 롱소드를 땅에 쳐박고 주저앉아 있었다.
즉, 놈이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칼질을 할 속셈이었던 것도 금방 알아챘고, 자신은 잠결에 옆으로 굴러 피한 뒤 일어서 그의 목을 꺾어버린 것이다.
프레데릭은 달려 오자마자 루돌프를 뉘인 뒤 생명 활동을 검사했다. 검사라기보단 검시에 가까웠다. 맥은 미약하게 뛰고 있지만 곧 멎을 것이었고, 횡격막의 수축은 일절 없었다.
목이 평상시엔 불가능한 방향으로 꺾이며 연수와 척수에 비가역적 손상이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프레데릭은 루돌프를 살려낼 방법이 단 한가지도 없다는 걸 인정한 뒤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씨팔! 젠장! 이 썅!!!"
그러곤 루돌프의 롱소드를 들더니 애꿎은 나무에게 걸어갔다.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나무를 마구 찍어대었다. 분노를 담아 휘두른 마지막 칼질은 힘이 꽤나 많이 실린 탓인지 나무에 단단히 박혀 빠지지 않았다.
"..."
길리엄은 여전히 굳은 채였고, 지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존은 나무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던 프레데릭에게 가서 말했다.
"화내야 할 것은 나 아닌가?"
"...?"
"자네는 루돌프가 날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겠지. 나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루돌프의 목을 꺾자마자 너는 달려 왔어. 그리고 나는 네 목소리에 잠이 확 달아났고."
"뭘 말하고 싶은 거냐 검은 머리?"
"보고 있었잖아."
"..."
"화내진 않을 거다. 화가 나지도 않고."
지존은 나무에 단단히 박혀 있는 롱소드를 뽑았다. 꼭 쇠가 부러지는 듯한 강한 파열음을 내며 빠졌다. 프레데릭은 지존의 괴력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 공포심이 느껴졌다. 지존이 자신을 해하진 않을지, 만약 그렇게 한다면 자신은 그에게 반항다운 반항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별다른 힘을 쓰지도 않고 그리핀을 도륙내는 모습을 봤다. 지존은 그런 인간이었다. 자신이 그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딱 한가지.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뽑아 목덜미를 기습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탈출구로 보였다.
프레데릭은 지존이 눈치채지 못할 아주 미세한 속도로 허리춤의 단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헛된 시도였다.
지존은 즉시 그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비틀듯 쥐어짜는 지존의 손아귀는 프레데릭의 손목을 당장에라도 탈구 시킬 듯 했다.
지존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지."
방법이 없다. 지존이 하라는대로 해야 했다. 지존은 프레데릭을 모닥불 앞에 앉혔다. 아직도 입을 벌린 채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길리엄도 자리에 앉았다.
*
아침이 되었다. 밤에 무슨 대화가 오갔을까. 다행히도 루돌프의 목뼈가 부서진 이후에 더 이상 폭력은 없었다.
남은 셋은 이전보다 더욱 친해진 듯 했다.
지존은 그리핀에게 육포를 준 뒤 녀석의 등에 올랐다. 녀석의 머리는 독수리와 똑 닮아서, 날카로운 부리 안에 이빨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빠드득 소리를 내며 육포를 잘도 씹어 먹었다.
"프레데릭, 길리엄. 매사냥 해본 적 있나?"
둘은 고개를 저었다.
"육포를 잘 받아 먹는 걸 보니 사냥용 매 한마리를 얻은 기분이군. 사냥매는 가끔 도망치기도 하지. 그러면 어떻게 하는지 아나?"
"매사냥이 뭔지도 모르는데 알리가 있겠나 존."
"그냥 내버려 두면 돌아 오는 녀석이 태반이지. 녀석들은 소금 뿌린 고기 맛을 잊지 못해. 다행히도 이 놈도 육포를 잘 먹는 걸 보니 이제 도망치지 못할 거야. 야생에서 소금과 향신료에 절인 고기 맛을 어디서 보겠나?"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난 걱정 말라는 뜻이지. 밤에 말했다시피, 그리핀이랑 먼저 마을에 도착하겠다. 루돌프의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리핀 알 세개를 주겠다고 약속할 거다. 그렇지만 보석과 귀금속을 나눈 것은 주지 않을 거다. 말하지도 않을 생각이다. 그건 내가 갖겠다."
걱정은 개뿔. 오히려 그가 탄 그리핀의 안위를 걱정하는게 옳다. 그가 쥐어 뜯은 그리핀의 목 부분에는 울혈이 붉은 반점이 되어 박혀 있었다.
다만 의아한 것은 루돌프의 귀금속 몫을 욕심 내는 모습이었다. 지존은 딱히 그런 느낌의 인간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물욕을 내니 신기해 보였다.
"알았다. 네가 그러겠다는데 뭘 어쩌겠나."
"그럼, 열흘 뒤쯤 보자고."
"떨어져 죽지 말게."
길리엄의 농담이었다.
지존이 급조한 그리핀 목줄을 잡아당기니 육포를 씹던 녀석은 날개를 펼쳤다. 날개 끝에서 끝까지 재면 두 사람의 키를 합한 것과 맞먹을 듯 했다.
녀석은 우렁찬 소리로 하늘을 향해 소리치곤 힘껏 도약했다.
과연 사자의 하반신, 나무만큼 높이 뛴 녀석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깜짝 놀랄 정도로 하늘을 올랐다.
녀석은 꽤나 영리해서, 지존이 고삐를 당기면 그 방향을 향해 날았다. 따로 가르치려 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랬다.
눈 깜짝할 새에 일행의 크기는 개미보다도 작아졌다. 그리핀의 힘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사람 하나를 태우고도 화살처럼 날다니.
지존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그리핀에게 말을 걸었다.
"이 녀석아. 너 육포랑 뭐 이것저것 고기 먹으면서 나랑 같이 사는게 더 좋지? 돼지도 멧돼지보다 집돼지 맛이 더 좋단다."
그리핀은 지존의 말에 반응했다. 알아 듣는 것인지 아닌지는 하늘도 모른다. 녀석은 온 천지가 울리도록 소리쳤다.
"피오오!"
기분이 썩 괜찮은 듯 했다. 지존은 가방을 뒤져 육포 하나를 꺼내 녀석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빨도 없는 것이 자근자근 잘 씹어 먹는 것 같구나. 아무래도 이름을 지어 주긴 해야겠는데. 뭐가 좋으려나..."
구름을 헤치고 산봉우리를 헤치고 하늘을 날아갔다. 순식간에 달라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지존이었다.
중원에는 이라는 재미난 책이 있다. 각종 기이한 생물과 현상에 대한 서적인데, 그와 비슷한 종류로 라는 책이 있다.
제해(??)라 하는 사람은 괴이한 일을 잘 아는 사람이다. 제해는 이렇게 말했다.
“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 옮겨 갈 때에는 '그 큰 날개로' 바다의 수면을 3천 리나 친다.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 꼭대기까지 오른다. 그리하여 여기 북쪽 바다 상공을 떠나서 6개월을 계속 난 뒤에야 비로소 한 번 크게 숨을 내쉬는 것이다.”
대단히 큰 상상의 새 중 하나가 붕이란 것이다. 중원에 있을 적에는 봉황이나 주작, 붕이란 것들이 모두 거짓부렁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서역에서 만나고 본 것들을 생각하면 이나 에서 말하는 것들이 단순 헛소리는 아니리라 생각이 들었다.
지존은 그리핀의 이름을 짓기 위해 한참을 더 생각하다가 결정을 했다. 최종 후보 두개는 이러했다.
황봉이, 붕붕이였다. 하나는 황색 몸통을 한 봉황이란 뜻이요, 다른 것은 앞서 말한 붕(?)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지존은 자신의 감각적 작명 실력에 스스로 감탄하며 그리핀에게 말했다.
"붕붕아! (??!) 너 이름 지어봤다. 붕붕이다! 어떠냐? 멋진 이름이 아니더냐? 붕이란 동물보다 두배로 커지고 두배로 멋진 그리핀이 되라는 뜻이다!"
붕붕이는 자신의 등 위의 인간이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먹을 수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존은 녀석이 맘에 든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만족스럽게 외쳤다.
"붕붕아! 더 빨리 가보자!"
"피오오오!"
두 생물의 외침에 맞추어 칼날도 무언가 말을 했다. 등에 걸린 글레이브에 바람이 갈리며 공명했다.
무생물과 생물의 화음은 어떤 적이 오더라도 넘어설 수 있으리라 자신하는 용맹한 포효처럼 들렸다.
*
몇 밤을 지내고 나니 금새 동굴에 도착했다. 말을 타고 왔으면 이틀은 더 달려야 도착했으리라. 붕붕이를 얻게 된 것이 참 즐거워지는 순간이었다.
서큐버스 릴리아가 몸을 숨기고 있는 동굴이었다. 지존은 그녀와 한 약속대로 그녀를 대리러 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만 동굴에 들어가 릴리아를 만나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룰 생각이었다.
제일 먼저 사냥을 한 뒤 동굴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녀와 함께 마을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붕붕이의 먹성이 워낙 뛰어난 탓에 육포가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녀석을 먹이기 위해서라도 사냥을 해야만 했다. 해가 지기 전 사냥을 마치기 위해 얼른 활을 꺼냈다.
동굴 근처의 나무 밑둥에 그리핀을 매어두었다. 녀석의 날카로운 부리는 밧줄 따위 두부처럼 잘라낼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녀석의 머리통을 천으로 덮어야 했다. 끊어야 할 밧줄이 보이지 않으면 끊기도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얼굴을 덮이기 싫어 발악하는 붕붕이와 씨름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 박쥐 한 마리가 날아왔다. 녀석은 지존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왠 녀석이 자꾸 시야에 들어와 얼쩡거리니 손을 휘저었다. 그럼에도 박쥐는 지존 주위를 맴돌다가 동굴로 들어갔다가를 반복했다.
"허 참. 저리 가거라. 정신 없게 왜 자꾸 날아 다니느냐? 저리 가라니까?"
녀석을 확 베어 버릴까 글레이브를 들고 노려 보는데, 아무래도 박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지칠 법도 한데, 자꾸 동굴 입구와 지존을 왔다갔다 반복하니 기이한 것이다.
지존은 녀석을 따라 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붕붕이는 얼굴에 천이 씌워진 이후엔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비실비실 날아가는 박쥐를 쫓아 동굴로 들어갔다. 한참을 걷다 보니 깊숙한 곳에 왠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이 있었다.
아주 작고 마른 여인이었는데, 산발한 머리카락에 온 몸이 가려져 형체를 잘 분간할 수 없었다.
릴리아일까 생각 해보기도 했지만, 릴리아의 체구는 저렇게 작지 않았었다.
"뉘인가? 살아 있으면 말 해보라. 죽었다면 묻어 주겠다."
"..."
그녀는 뭔가 말 하려고 했으나 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최소한 죽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지존이 그녀에게 다가가 귀를 가까이 하니 그제서야 그녀가 웅얼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인님..."
"주인님이라고? 릴리아? 릴리아 너는 이렇게 조그맣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뼈를 붙이고... 상한... 내장을 수복하는 데에... 너무 많은 마나를... 사용해 버렸습니다..."
겨울날의 나뭇가지처럼 수척한 그녀를 바라보니 죄악감이 들었다. 그녀의 갈비뼈가 부숴지고 내장에 심각한 손상이 생긴 까닭은 지존의 공격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정당방위로써의 공격이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하인이 되겠다 한 이후로 그녀는 옛 제자처럼 소중한 것이다.
지존은 아랫사람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중원에서의 삶을 끝마칠 때에도 심복들이 그에게 주술을 걸어 영생을 기원했으리라.
지존은 미안한 마음이 잔뜩 녹아난 목소리로 릴리아에게 말했다.
"어찌하면 되겠느냐?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여기서 나를 기다린 탓인가? 육포 같은 먹을 것이 동굴 바깥 짐에 들어 있다. 가지러 갔다 오마.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녀는 앙상한 팔로 지존의 머리를 껴안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주인님... 저는 인간들이 몬스터라 부르는 존재... 서큐버스 입니다... 먹을... 것...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마나입니다. 마나가... 필요합니다."
마나라, 신령스런 복숭아를 먹은 탓에 넘쳐 흐르는 것이 내공이자 마나였다. 지존은 그것을 어찌하여 넘겨줄 수 있는지 물었다.
"마나라! 어떻게 마나를 줄 수 있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