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38화 (38/56)

〈 38화 〉 루돌프의 악수. (?手. 바둑이나 장기에서 잘못 두는 나쁜 수.)

* * *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숲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 이전에 그들은 절벽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리핀 사체들에게 가서 뒷다리 몇개를 뜯어냈다.

육식동물은 냄새가 난다는 편견이 있긴 하지만 얼마만의 생고기인가. 보름도 넘게 육포 따위나 씹고 있으면 뱀 고기던 호랑이 고기던 입에 군침이 돌게 된다. 하늘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그들에게, 먹힌다는 것은 얼마나 치욕일까.

지존과 일행들은 그런 것 따윈 생각조차도 하지 않은 채 뒷다리를 잘라갔다. 그리핀의 상징과도 같은 앞발도 모두 잘랐다. 거대화한 닭발 같은 모양이었는데, 이것은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그리핀을 잡았다는 증거로 활용하면 좋을 것이었다. 먹어도 무방하지만, 그것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중원 출신인 지존 뿐이었다. 닭발은 꽤 맛있는 식재인데 서역 사람들은 썩 즐기지 않는 것 같았다.

말을 타고 떠날 채비를 끝내니 길리엄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존, 저거 어떻게 데려갈 생각이야? 너무 위험한 것 아닐까?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도 뭐 빠지게 힘든데... 몬스터라니... 게다가 그리핀! 너무 위험해. 그냥 죽여 버리고 떠나자고."

"아까 좀 타보니까 탈만 한 것 같던데. 다시 한번 해보고 결정하지. 그나저나 풀어 주는 거면 몰라도 죽이고 떠난다니, 굳이 그럴 필요 있는가?"

길리엄은 멋쩍은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그야... 몬스터를 죽이는 건데 뭐 어때서 그래?"

"... 서역인들의 관념은 이해가 되질 않아. 몬스터라고 불릴 뿐, 같은 생명인 것을."

"..."

깃털을 뽑히고 목덜미를 쥐어짜이고, 주먹으로 두들겨 맞은 그리핀이다. 지존은 자신이 너무 과하게 그리핀을 괴롭힌 것이 아닌지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죽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미 무력화 된 녀석이기도 했고.

지존은 통닭처럼 묶여 있는 그리핀에게 다가갔다. 머리를 가리고 있던 천을 거둬내자 그리핀은 생명의 위협이라도 느끼는 듯 꽥꽥거렸다. 독수리의 멋드러진 머리를 하고 있는 녀석 치곤 겁 많은 놈이었다.

"임마. 넌 이제부터 내 거다. 발광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죽이려다가 살려준 것이니 은혜는 알겠지? 영물처럼 생긴 녀석이니 알아 들으리라 믿는다."

"피오오오! 끼오오옥! 끼에에!"

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앞발로 할퀴려 드니 우발적인 짜증이 치솟았다. 지존은 자신도 모르게 뺨을 후려치듯 그리핀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돌발적으로 나온 동작이다 보니 녀석을 때리자마자 후회가 들었다.

"거 참. 힘 쓰게 하지 말거라."

"피오옥..."

아찔한 통증에 별이라도 보았는지 그리핀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동작을 멈추었다. 예상 외로 지존의 폭력은 그리핀을 길들이는 것에 효과적이었다.

밧줄을 모두 풀고 올라타려 하니 다른 이들은 모두 식겁한 채 뒤로 물러섰다. 수 시간 전에 그리핀에게 죽을 뻔한 사람들이니 그러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등에 올라타니 역시 발악을 했다. 그리핀에겐 불쌍하게도 아까와 같은 폭력이 이어졌다. 한참을 두들겨 맞더니 녀석은 결국 온순한 조랑말 꼴이 되었다.

지존은 미안한 마음에 깃털을 쓰다듬으며 일행에게 말했다.

"된 거 같네. 자, 가자."

프레데릭은 얼빠진 눈으로 그 광경을 보다가 말 고삐를 흔들었다.

"정말 귀신 같은 놈이야 저거. 안 그렇습니까 루돌프?"

"흥. 그러게 말이야."

지존은 프레데릭의 말에 피식 웃으며 그리핀을 타고 일행을 따라갔다.

*

승리의 밤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라던가 반란을 진압했다거나 하는 거창한 것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결과로 보면 그보다 더했다. 농민이 수십년 땅을 갈아도 꿈꾸지 못할 거액이 각자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길리엄과 프레데릭은 살아 오면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을 느끼며 싱글벙글했다. 루돌프와 지존은 그에 비해 차분한 편이었는데, 루돌프는 차분함 속에 무언가 껄끄러움이 있었다. 극비리에 첩보 활동을 하는 자객처럼 노심초사했다.

그들은 그리핀 고기를 뜯으며 여행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길리엄은 길거리에서 본 바드를 따라하며 노래 같은 시를 읊었고, 프레데릭은 박자에 맞춰 추임새를 넣었다.

길리엄의 노래 실력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리핀 뒷다리를 뜯으니 여느 요리 부럽지 않았다. 향신료와 소금도 아낌없이 뿌렸다. 승리의 기념이었다.

생포하고 길들인 ­정확히 말하자면 폭력으로 굴복시킨­ 그리핀 앞에서 동족의 고기를 먹는 것은 영 께름칙했기에 녀석의 머리에 천을 씌워 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녀석은 육포를 제법 잘 받아 먹었다.

"루돌프 씨. 저걸 보니 블랑코 축산 협회에서 무슨 생각으로 그리핀 알을 원했는지 알 것도 같군요. 그리핀을 길들여서 목양(??. 양, 또는 가축을 지킴.)용으로 사용할 셈이겠지요?"

프레데릭의 질문이었다.

"그렇지. 아버지의 제안이었어."

"역시 그 분의 생각은 따라갈 수 없군요."

프레데릭이 부친에 대한 칭찬을 했음에도 루돌프는 썩 기쁜 표정을 짓진 않았다. 오히려 약간 착잡한 표정이었다. 그는 혀를 찼다.

"쯧."

혀 끝에서 씁쓸한 맛이 날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고 네 명의 사내들은 기분 좋은 포만감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만의 생고기 구이인지, 이젠 육포를 먹지 못할 것 같았다. 그만큼 맛이 좋았다. 맹수의 고기는 냄새가 난다더니, 그 편견은 다 거짓말인듯 했다.

한시간 정도가 흐르니 모닥불은 확연히 줄어든 크기로 타올랐고, 길리엄과 프레데릭은 코를 골고 있었다.

"커허윽, 컥! 헉! 흠냠냐 쩝... 음... 물이 어디 있나..."

입을 벌리고 코를 골아대니 입 속이 사막처럼 말랐다. 길리엄은 갈증 끝에 잠에서 깨어 물을 찾으려 짐을 뒤적였다. 동시에 일행들을 살펴보니, 왠걸, 루돌프는 자고 있긴 커녕 롱소드를 응시한 채 앉아 있었다.

모닥불의 불빛이 롱소드의 검신에 비추어져 흔들거렸다. 음산한 숲 속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나부끼듯 불길했다.

"안 자고 뭐 합니까 루돌프 씨?"

루돌프는 인상을 쓰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쉿! 조용히 하시오!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지."

프레데릭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 했다. 모험을 떠나기 전, 루돌프가 한 말이 있었다. 그러나 별 대수롭지 않은 농담처럼 여기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었군요... 전 모른 척 하겠습니다. 난 자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시오."

프레데릭은 당장 일어날 끔찍한 사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등을 돌려 눕고 손으로 귀를 막았다.

'나는 지금 자고 있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했다.

루돌프는 잠시동안 더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벌컥 일어섰다. 걸음 소리가 나지 않게 몹시 조심스러웠다. 매사에 열심이라는 법이 없는 루돌프가 이렇게 집중하는 때도 드물었다.

살금 살금.

루돌프는 롱소드를 역수로 쥐었다. 그리고 누워 있는 누군가의 위에 그것을 들어올리고... 심장의 위치를 겨누었다.

몇 초 뒤에 심장이 꿰뚫리고, 그것의 주인은 삶이 끝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돌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빠드득, 관절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름끼치는 소리에 프레데릭은 얼른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심장을 찌르는데 이런 소리가 날 수 있는 건가?'

역시나. 그것은 심장을 꿰뚫는 소리가 아니었다. 루돌프는 목이 기괴한 위치로 돌아간 채 떨면서 고꾸라졌다.

"으아악! 씨발!"

프레데릭은 혼비백산하여 뛰어와 쓰러진 루돌프의 맥을 짚었다. 호흡은 없었고 맥은 맹렬하고 불규칙하게 뛰었다.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중인 것이었다. 천하제일의 명의가 와도 살릴 방법이 없었다.

뜻밖의 큰 소리에 길리엄도 일어나 상황을 살폈다.

*

상황은 이러했다.

기묘한 복숭아를 먹은 탓에 몸에 기운이 가득한 상태의 지존이었다. 보신하는 약재나 음식을 먹은 후에 몸에 열이 오르는 듯 기력이 뻗쳐 잠이 잘 오지 않는 때가 있다.

지존도 마찬가지였다. 기력이 용이라도 된 듯 솟구치려 하니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곤욕이었다. 허벅다리의 두툼한 근육이 자신을 소모해 달라며, 자신을 사용해 달라며 시위를 하는 듯 했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어다니고 싶은 것이었다.

시퍼런 청춘을 증명하듯 자꾸 힘이 들어가는 음경 또한 문제였다. 팡틴, 로즈, 릴리아... 그리고 화원의 왕언니... 그녀의 풍요로운 유방이 자꾸 어른거렸다.

그런 감각을 참아내는 것도 수행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지존은 호흡을 일정히 한 채 상념을 떨쳐내려 애썼다. 한시간도 넘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단전으로 기운을 모았다.

그러나 복숭아가 가져다 준 선물은 일시적인 것이었는지, 기운은 단전을 맴돌기보단 사방을 향했다. 마나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워 있는 지존의 몸이 푸른 불꽃처럼 보였을 것이다.

개활지에서 타오르는 불덩이처럼 마나의 아지랑이가 끝없이 솟았다. 실로 그 복숭아는 대단한 신물(?物. 신령한 물건.)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것을 보존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눈을 감고 하염없이 호흡에 집중하고 누워 있으니 어느새 꿈과 현실의 경계에 들어섰다. 일전에 서큐버스의 동굴에서 자각몽을 의도했던 것과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때는 의식을 집중하려 애썼던 것이고, 지금은 배부르고 안락한 감각에 몸을 맡겨 잠에 빠져들고 싶다는 거다.

그리고 지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꿈에 빠져들었다. 깊은 꿈은 아니었다. 꿈에서 움직이기라도 할라 치면 몸도 따라서 움찔, 반응하는 그런 얕은 잠이었다.

내공의 아지랑이는 끊김 없이 계속 흘러 나오고 있었고, 어느 물체가 그 아지랑이의 발산을 끊었다.

루돌프의 몸과 검이었다.

동굴 속 박쥐가 눈이 멀어도 소리를 통해 사물을 판별하는 것처럼, 발산하던 아지랑이가 무언가에 가로막히자 지존의 무의식은 꿈을 통해 그곳에 적을 조형했다.

꿈.

중원의 어느 조용한 산 중턱, 정자에 걸터앉아 밤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힘이 솟는 것이, 극동의 명약이라는 만년삼을 먹은 듯 했다.

뻐꾹새가 우는 고요한 밤은 왜인지 외로워서, 여인들이 생각났다. 나를 따랐던 그 여자아이... 그런데 얼굴도, 어째서인지 이름의 기억도 희미한 것이 답답했다.

한 여인이 다가와 무언가 말을 전하려 하는데, 중원의 여인이 아니었다. 천축...? 아니, 서역 즈음의 색목인인것 같은데... 아아, 그녀는 로즈였다. 그녀가 왜 중원 산골짝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 그러나 의문을 품을 시간도 사치.

당장에 그녀를 탐하고 싶었다. 솟아오르는 양기를 쏟아내기에 더없이 좋은 여인이었다. 그녀를 옷섶을 잡아 내려 살결을 만지려 하는데, 아뿔싸.

그녀는 로즈의 모습으로 변장한 자객이었다. 그녀가 살수를 펼쳤다. 심장을 정확히 노리는 비수엔 분명 극독이 발라져 있을 터. 그러나 그런 평면적인 공격에 당해줄 범인인가. 지존은 즉시 반격을 했다. 옷섶을 잡았던 손을 튕겨 턱을 후리고, 반대 손은 관자놀이를 찍었다.

아무렴 그 어떤 자객일지라도, 뭉친 색욕 탓에 감각이 무뎌진 상태일지라도, 기운이 솟을 대로 솟아 있는 지존을 상대하기엔 어림 없었다.

빠드드득! 목뼈가 박살 나는 마찰음이 밤중의 산에 메아리쳤다.

"으아악! 씨발!"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