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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37화 (37/56)

〈 37화 〉 획득완료.

* * *

지존은 둥지 입구 즉, 굴 입구에서 프레데릭 방향을 보고 있었다. 항복한 개가 배를 보이고 누운 듯한 자세였다.

언뜻 수치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그 자세는 시야의 사각을 최대한 없애기 위한 수였다. 굴 안에서 벽을 등지고 선 이유와도 같았다.

그곳에서 공격해 오는 그리핀들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둥지 안쪽에서도, 바로 머리 위에서 날갯짓을 하며 떠 있는 그리핀들에게서도 공격이 쏟아졌다.

야생 동물이라는 것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 놈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록 녀석들은 더욱 강해진다. 맹수를 마주쳤을 때 뒷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녀석들은 야생의 감으로 지존이 지쳐가는 것을 확실히 알아챘다. 프레데릭이 쏘아 올린 화살이 날아 오는 짧은 순간에도 목숨이 오갈뻔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개처럼 누워 상황을 살핀 덕이 있었다. 복숭아는 지존을 향해 바로 날아오지 않았다. 프레데릭의 근육은 바들바들 떨면서 한계까지 힘을 내고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 명중률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복숭아는 공중에 있는 그리핀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내버려 둔다면 그리핀의 몸통에 맞고 부숴져 떨어질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끝이었다. 지존은 얼른 판단을 끝내고 그리핀을 향해 뛰어올랐다. 녀석을 향해 하늘을 나는 짧은 순간에도 어찌나 많은 생각이 나던지, 그만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전음입밀을 하는 복숭아를 만나질 않나, 이번엔 그걸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리질 않나, 미친 짓이로구나. 정말로 미친 짓이라면 죽을 것이고, 미치지 않았다면 살 것이다. 미친 것이라면 죽어도 무관하다. 미친 정신으로 새 삶을 얻었던들 무슨 덕을 볼까.'

그리핀에게 호쾌한 발차기를 먹였다. 그리고 프레데릭이 쏘아 보내준 복숭아를 잡는 것에도 성공했다.

휘청거리며 퍼덕이는 녀석의 몸에 올라탔다. 복숭아에 단단히 박혀 있는 화살을 뽑아내고 얼른 입에 넣었다.

과즙이 터지면서 뿜어 나오는 푸른 아지랑이는 지존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 정말로 그 복숭아는 신비로운 힘을 담고 있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호흡의 한계를 느끼며 쓰러져가고 있는 참이었다. 복숭아를 씹어 삼킴과 동시에 몸 속 구석구석으로 찔러 들어가는 마나가 느껴졌다. 텅 비기 직전인 단전은 충만한 기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 이제 살 것 같구나!"

활력이 되돌아오니 각성제라도 먹은 듯 즐거워졌다. 어두침침하고 좁아져 있던 시야는 활짝 열렸고, 손가락 마디마디에도 힘이 뻗치는 듯 했다. 지존은 복숭아에서 뽑아 낸 화살을 그리핀의 귓구멍에 쑤셔박았다.

살을 찢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목숨은 즉시 끊어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눈알이 뒤집혀 추락하기 시작했다. 지존은 얼른 놈의 몸통에서 뛰어올라 둥지로 내려갔다. 둥지 깊숙히 쳐박혀 있는 루돌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지존을 가로막는 그리핀들은 각각 한번의 공격으로 무력화 되었다.

일격필살의 기예였다. 벽을 짚어 뛰어 올라 머리를 장법으로 내려치니 한 녀석은 눈알이 터져 죽었다. 손날로 목을 베어버리듯 강하게 타격하니 기절해 버린 녀석도 있고, 공을 차듯 정강이로 앞발을 강타해 다리를 접어 버린 녀석도 있었다.

루돌프는 귀신이 춤추는 듯한 무시무시한 광경을 쳐다보며 눈을 꿈벅였다. 그는 투구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 투구에는 그리핀들이 모아 놓은 금속 쪼가리와 보석들 중에 값비싸 보이는 것들만 엄선한 것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살아 있나?"

지존이 뛰어 오며 물었다. 둥지 속 그리핀들은 모두 죽거나 불구가 되어 있었다. 과연 복숭아를 쏘아 달라고 한 판단은 옳았다. 그 요구대로 응해준 프레데릭에게도 얼마나 고마운지, 목소리엔 즐거움이 녹아들어 있었다.

"물 만난 고기 같군 원숭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루돌프는 괜히 시비를 걸었다. 어쩌면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썩 내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지존은 앉아 있는 루돌프를 보고 생글생글 웃더니 별안간 뺨을 후려쳤다.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큰 소리였다.

절묘한 힘 조절 덕에 루돌프는 기절하진 않았다. 기절 직전의 몽롱함을 느끼며 지존을 올려다 보았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잊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뺨 속이 터져 한가득 피맛이 났다.

"한번 더 원숭이라고 부르면 죽이겠다고 했잖나. 헌데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 그냥 넘어가겠다."

"... 씨팔, 그냥 넘어간 것 치곤 아픈데?"

지존이 다시 한번 손을 들자 그는 시선을 땅으로 한 채 말을 잊지 못했다. 다 죽어가던 녀석이었는데, 별안간 귀신처럼 강해진 것 같았다. 질투심과 동시에 공포심도 일었다.

지존은 피식 웃고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나가자."

"..."

둥지 입구까지 걸어가니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이고, 근처에는 그리핀들이 날갯짓을 하며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지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녀석들이었다. 함부로 공격 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머뭇거리는 녀석들이었지만 루돌프의 눈에는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힘찬 날갯짓이 일으킨 바람이 머리카락을 제낄 정도였으니, 그 힘이 느껴져 더욱 무서웠다.

"여길 어떻게 나갈 수 있지? 절벽을 붙잡고 내려가다간 떨어져 죽던지, 그리핀이 쪼아서 죽던지 둘 중 하나일 것 같은데. 네가 쎈 건 알겠지만, 이건 너에게도 무리 아닌가? 혹시 날 두고 혼자 도망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생각이었다면 둥지 안쪽으로 다시 되돌아 가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방법이 있다."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 으아아아악!"

지존은 루돌프의 어깻죽지를 잡아 그리핀을 향해 던졌다. 루돌프는 포환처럼 날아갔다. 투구 속에 들어 있던 귀금속들이 흩날렸다. 아마 절반은 날아갔을 것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좀 조심했을 텐데, 지존은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씨바아아알! 여기 보석이 들어 있다고오오오!"

낙사할 것 같은 공포와 귀금속을 잃어버린 분노가 섞인 함성이었다. 그리핀의 몸통에 닿기 직전, 그리핀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다행히도 뒤따라 뛰어온 지존이 루돌프를 낚아채 그리핀의 등으로 올렸다.

당연하게도 그리핀은 발광을 했지만 지존이 몇번 깃털을 쥐어 뜯고 후려치니 얌전한 어린양이 되었다.

"흐아아아악! 뭐야! 으아악! 떨어져 죽는다! 아악!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시끄러워! 절벽을 탈 수는 없으니까 이 방법 밖엔 없잖아! 떨어져 뒤지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아아악!"

그리핀의 목을 비틀고 살점을 쥐어짜니 그리핀은 그 방향대로 날았다. 녀석은 지존이 뜻하는 대로 두명을 등에 엎고 프레데릭이 있는 곳을 향했다.

숲 속에서 계속 그들을 바라보던 프레데릭과 길리엄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그리핀은 프레데릭이 있는 숲으로 도착했다.

착지라기보단 추락에 가까운 엉성한 것이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을 굴렀다. 루돌프는 옳다꾸나 하고 얼른 등 위에서 뛰어내렸다. 긴 항해를 마치고 육지를 밟은 선원처럼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반면 지존은 흙바닥에 몸을 비벼대는 그리핀 위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이 새끼! 얌전히 있지 못해!"

가만히 있으라며 그리핀을 두들겨 패는 지존이었다. 녀석은 반항을 계속했고, 지존은 녀석의 목에 팔을 둘러 조였다. 그리핀은 빼액 비명을 지르더니 목 쉰 소리를 내다가 쓰러졌다.

주변에 있던 말들은 갑작스런 소란에 깜짝 놀라 뒷걸음을 쳤다. 말들은 한참을 떨어져 인간이 맹수를 괴롭히는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들과 마찬가지로 놀란 프레데릭과 길리엄이 말했다.

"괜찮은 겁니까? 도대체 이 뭔..."

루돌프가 프레데릭을 바라보니 그는 코피로 흥건한 목덜미를 하고 있었고,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보는대로 별 이상 없이 무사하네. 프레데릭, 당신은 왜 그런 꼴이 된 건가?"

그리핀을 기절시키고 걸어온 지존이 말을 끊었다. 그는 프레데릭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강궁을 당기느라 엄청나게 무리한 모양이구만. 미안하네. 그리고 고맙네. 그나저나 밧줄 있으면 좀 주게. 저걸 좀 묶어 둬야겠어. 쓸모가 많을 것 같아. 어쩌면 타고 다닐 수도 있겠지."

프레데릭은 코를 쓱 문지르고 말했다.

"밧줄은 내가 탄 말 등짐에 있소. 무사히 와서 다행이구만. 그나저나 복숭아는 왜 달라고 한 건가? 그거 날리느라 이렇게 된 거 아니겠나. 지금 어깨가 엄청나게 시려. 힘줄이 끊어지는 줄 알았네."

"글쎄. 복숭아만 먹으면 일이 잘 풀릴 것 같지 말인가. 뭐, 뜻대로 되었으니 다 잘 된거 아닌가."

생글거리며 대답하는 지존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나 참. 별 미친 생각을 다 했군 그래."

지존은 그 말에 껄껄 웃었다.

"푸하하 그래. 나도 내가 미친 줄 알았지 뭔가."

지존은 기절해 있는 그리핀을 동여매고, 천으로 눈을 가렸다. 녀석이 도망치지 못하게 근처의 나무에도 묶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늘의 제왕과도 같은 그리핀을 묶어두니 닭백숙을 위해 묶어둔 생닭 같았다. 그리핀이 지성이 있는 존재라면 수치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을 할 법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들은 기절해 있는 그리핀 옆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루돌프가 찾아낸 보석 덕분에 잔뜩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지존은 얼른 다시 절벽 위의 둥지에 올라 보석과 알을 가져 오자는 의견을 진정시키고 식사부터 하자고 제안했다. 다들 그의 뜻대로 마음을 가라 앉힌 채 육포를 씹었다.

지존은 식사를 마치고 다시 절벽을 올랐다. 길리엄의 롱소드를 등에 매고 기어 올라 갔다. 글레이브를 챙기고 싶었지만, 한 손으로 쓰기엔 불편한 점이 많았기에 길리엄의 것을 빌린 것이었다. 절벽을 오르는 중에 글레이브를 휘두르기는 영 힘들 테니까. 나머지 셋은 절벽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뒤여서인지, 그리핀은 아까보다 사뭇 얌전해졌고, 절벽을 오르는 그를 방해하려는 그리핀은 몇 없었다.

지존은 둥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알 세개를 구했다. 반항하는 그리핀의 목을 베어 등에 매고 다니니 그리핀은 더 이상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다가오면 품고 있던 알도 포기한 채 도망쳐 버렸다.

알 세개를 가죽부대에 넣어 밧줄에 묶은 뒤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전달했다. 이대로 다시 절벽을 내려가기엔 영 심심했던 지존은 다시 둥지를 뒤지며 보석을 찾아다녔다. 루돌프의 요청 사항이기도 했다.

잠시 뒤 묵직해진 보따리를 절벽으로 내린 뒤 기어 내려왔다. 가죽 부대에 빵빵하게 담긴 귀금속들은 사람 하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수 있는 거액이었다.

부랑자가 그것을 얻는다면 단숨에 귀족처럼 대우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일 것이었다. 길리엄, 프레데릭, 루돌프와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도 어마어마하게 많을 양이었다.

모두들 기뻐하니 지존도 기분이 좋았다. 루돌프는 귀금속들을 뒤적거리며 낄낄거리더니 그에게 말했다.

"이봐. 아까 시비 걸었던 거 미안하다. 널 대려오길 아주 잘했어. 큭큭큭 이제 나도 아버지에게 인정 받을 수 있겠군."

"아버지라? 아버지에게 인정 받기 위해 모험을 하겠다 한 거였나?"

"몰라도 돼. 그 이상은."

루돌프 답지 않게 사과를 하다니. 지존은 그가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서큐버스의 동굴에서 모두를 죽일 뻔한 개짓거리를 하고도 뻔뻔했던 루돌프였다.

무언가 꺼림칙했지만, 목표한 알을 얻은 것과 거기에 더불어 엄청난 양의 귀금속을 얻었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금전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지존조차도 들뜨게 할 정도의 거액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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