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맨 몸으로 그리핀을 죽이는 다양한 방법.
* * *
그것은 경동맥이었다. 검처럼, 송곳처럼 내기를 한 점에 모아 강하게 찌른 덕분에 지존의 손은 경동맥까지 파고들었다.
새 특유의 긴 목을 타고 올라 뇌에까지 혈액을 공급하는 임무를 지닌 것이 그리핀의 심장이다. 게다가 사자같은 몸통은 힘이 가득 들어차 있는 모습이다. 근육질의 하반신에 피를 운반하려면 심장의 힘도 상당한 수준이어야 했다. 심장이 강건한 움직임을 할 때마다 경동맥도 크게 떨었다.
혈액이 운반해야 할 유량이 얼마나 많을까. 그 까닭인지, 그리핀의 혈관은 유난히 탄력적이고 두터웠다. 검지와 엄지로 지름을 가늠하며 만지작거리니 그리핀은 몸이 굳은듯 움직임을 멈췄다.
생명줄이 지존의 동작 하나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녀석은 자세를 고쳐 잡지도 못한 채 목을 쭉 빼고 긴장한 상태였다.
뚜둑.
탄성 있는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였다. 지존이 손을 회수하며 손끝을 잡아채자 울끈불끈 춤추던 동맥은 끊어져 버렸다.
쾌속으로 나아가는 혈액들은 비온 뒤에 불어난 대황하처럼 흘렀다. 별안간 균열이 생기니 피는 그야말로 솟구치듯 뿜어졌다. 황하에 둑을 세웠다가 부숴트리면 그 물은 어마어마하게 큰 파도를 일으킬 것이다. 그리핀의 강인한 심장에서 뿜어지는 피는 그것이 연상될 정도였다.
혈구가 가득할 것 같은 걸쭉한 피였다. 묽게 쑤어낸 풀죽 같기도 했다. 지존의 손은 금새 피로 뒤덮여 붉은 장갑을 낀 것처럼 되었다.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그리핀은 기우뚱거리며 균형을 잃기 시작했다.
뇌로 피를 보내는 큰 혈관이 끊어지면 수초 이내에 의식을 잃게 된다. 그리핀은 순식간에 눈앞에 캄캄해지는 듯 했다. 내버려 두면 곧장 쓰러져 죽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존은 그 정도의 틈도 주지 않았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마저 후려찰 수 있을 법한 높은 발차기가 들어갔다. 독수리의 늠름한 표정은 발차기에 의해 뭉개졌다.
터엉!
그리핀은 목에서 피를 흘려대며 즉시 넘어졌다.. 그 일격에 숨이 완벽히 끊어졌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주인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듯, 심장은 맥동을 계속했고, 넘어진 녀석의 목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뜻밖의 이변에 다가오던 그리핀들은 동작을 멈추었다. 머뭇거리는 고갯짓에는 경악이 담겨 있었다. 체구도 작고 무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인간이 저토록 강한 것은 반칙이지 않은가.
초파리인 줄 알고 손을 휘저었더니 말벌떼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리핀들과 지존은 십여초간 서로를 바라봤다. 지존에 의해 경동맥이 끊겨 쓰러진 그리핀에게서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어느새 피 웅덩이가 생겨 발 주변을 에워쌌다.
그 정적이 흐르고서야 그리핀들은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끝난 것이다. 이곳은 자신들의 소굴, 숫자도 월등히 많다. 인간이 도망칠 방법도 없다. 자신들의 둥지를 벗어나려면 암벽을 타야 하는데, 그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냥 뛰어내리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조금 더 적극적인 의미의 자살 행위였다.
“끼에에에에! 끼르르르륵!”
십수마리가 동시에 고함을 치니 기절한 루돌프도 눈을 떴다. 눈을 뜨고 상황을 살피자마자 그는 놀라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뻔 했다. 그리핀이 가득한 둥지 안에 쳐박혀 있는 상황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다시 죽은 척을 하는 것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리핀들이 전혀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루돌프는 살아나갈 방도를 궁리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자신이 널부러져 있는 곳은 값비싸 보이는 은화들이 쌓여 있는 곳이었다. 모든 것이 은화는 아니었다. 진주 목걸이, 금반지 등의 귀금속도 간혹 있었고, 대부분은 녹슬어 버린 농기구와 같은 철물들이었다.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그리핀들이 모아둔 것이 분명했다. 값싼 철물들을 제외하고 귀금속만 긁어 모으면 조그만 봇짐 하나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엎드린 채 어떻게 이걸 가지고 달아날지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이곳의 지형이 어떤 것인지 알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루돌프는 기절한 채로 그리핀에게 붙잡혀 이곳에 쳐박혔다. 지금 이곳이 땅인지, 아니면 목적지였던 바위산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금속 더미 위에 널려 있는 이곳은 입구에서부터 꽤 멀리 있었다. 굴 속 깊숙한 곳이다. 입구까지 전력으로 달리면 십오초는 걸릴 거리였다. 물론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리핀 십수마리가 통로에 얽혀 있는데 어떻게 뛰어나갈 수 있단 말인가.
‘검은 머리 원숭이’ 지존이 그리핀을 모조리 죽이거나, 몰아내는 것 이외의 방법은 없었다. 루돌프는 결국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주변의 은화를 만지작거렸다.
자빠져서 은전이나 주무르고 있는 루돌프와는 대조적으로 지존은 격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용감한 그리핀이 하나하나 지존에게 도전했다.
지존은 얼른 벽을 등지고 섰다. 난전에서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가 눈먼 화살이다. 제 아무리 절정의 고수라 할지라도 등 뒤의 사각에서 공격을 하면 대응하기 몹시 어려운 것이다. 배수의 진을 펼치는 용장의 마음가짐이기도 했다.
첫째로 들어오는 녀석의 공격, 흉악한 앞발은 얼굴 가죽을 뜯어내리라는 의지의 표현처럼 다가왔다. 발톱을 수직으로 휙 그어 버리는데, 숙련된 검사의 일검처럼 간결하고 빨랐다. 지존은 발걸음을 살짝 옮기는 것으로 손쉽게 피해 버렸다.
녀석은 지존의 눈을 향해 부리를 쪼았다. 그것은 지존이 바라는 바였다. 그는 손바닥으로 부리를 후려쳐 궤도를 바꿈과 동시에 반대 손으로 그리핀의 턱을 올려쳤다. 검지와 중지를 이용한 관수였다.
턱밑의 연한 살이 뚫려 버렸다. 지존은 아까 경동맥을 잡아챈 것처럼 혓뿌리을 움켜쥐었다. 힘을 실어 혀를 잡아빼니 그리핀은 격통으로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녀석은 지존을 향해 고개를 숙인 꼴이 되었다. 지존은 얼른 내공을 담은 장법으로 녀석의 이마를 내려쳤다.
그리핀은 눈동자를 마구 흔들며 절명했다. 눈에서는 핏물이 배어나왔는데, 그것은 지존의 발경에 의해 뇌조직이 곤죽이 된 탓이었다. 턱 밑으로 혀가 피 섞인 침을 잔뜩 묻힌 채 늘어져 있었다. 핏덩이가 된 혀는 꼭 무도회장에서 한껏 몸단장을 한 신사의 목에 장식된 리본 같았다. 원하던 대로 그리핀을 꾸며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발경의 침투력이 만족스러웠는지, 지존은 흥이 났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용의 간과 봉황의 골을 천하 제일의 진미로 친다는데 아직 한번도 먹어보질 못했지. 너희들이 혹시 봉황인 것 아니더냐? 니놈들을 다 죽이면 맛을 좀 봐야겠구나. 어서 들어와라.”
또 다른 그리핀들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리니 뒷걸음질 치는 녀석이 반, 성내며 달려드는 녀석이 반이었다. 달려드는 녀석들은 앞서 가버린 녀석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따귀를 맞듯 후려쳐져 반대쪽 귀에서 피를 쏟다가 죽은 녀석, 무릎에 옆구리를 찍히곤 부러진 갈비뼈에 폐를 찔려 죽은 녀석, 뒷꿈치로 뒷통수를 밟혀 죽은 녀석…
수많은 녀석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쓰러졌다. 지존의 희망 사항대로 봉황 골 요리를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핀이라는 몬스터가 중원 사람들이 말하는 봉황이 맞다면 말이다.
그러나 바위산에 그리핀이 한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깎아지른 벽에는 현무암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는데, 그중에 절반은 그리핀의 둥지로 이용되는 구멍이었다. 그리핀의 고함과 살과 뼈가 터지는 소음은 둥지에 있던 그리핀들의 관심을 잔뜩 일으켰다.
여왕을 빼앗긴 벌떼처럼 끊임없이 달려드는데, 지존의 몸은 무한동력을 지닌 영구기관이 아니었다. 그도 결국 사람이었다. 내공은 전성기 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고, 모험 도중의 식사도 형편 없었다.
들어간 것이 부실하면 나오는 것도 허접한 것이 마땅한 일이라, 지존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혈액의 당분은 위험한 수준으로 떨어졌고, 근육에 저장되어 있던 복합당들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그리핀이 몰려들면 이겨낼 방도는 없었다.
공복의 위장 속에서 공명음이 발생하듯, 내공이 떨어져가는 단전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길리엄과 프레데릭은 자신의 말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말도 신경써야 했다. 프레데릭은 루돌프의 말을 맡았다. 루돌프가 사용하는 롱소드는 그의 말에 단단히 고정되었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지존의 글레이브는 길쭉한 것이 영 고정하기가 불편했다. 자신의 주인 만큼이나 자유분방한 병기였다. 자꾸 글레이브가 떨어지려고 하니 길리엄은 하는 수 없이 글레이브를 들춰맨 상태로 말을 달렸다.
말 두마리를 신경쓰며 묵직한 글레이브까지 붙잡아야 하니 여간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얼른 지존을 찾고 싶었다. 지존이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얼른 찾아서 글레이브를 들려주고 싶었다.
앞서가던 프레데릭이 손짓했다. 멈추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우거진 나무 틈새를 달리고 있었다.
“사자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더라고.”
길리엄이 말을 꺼냈다. 뜬금없이 격언을 말하는 길리엄을 뒤돌아보며 프레데릭이 답했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지금 우리는 잡혀가는게 아니라 제 발로 찾아가는 거잖나. 그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는 뜻일세.”
프레데릭은 피식 웃었다.
“참 나. 어쨌건 정신 차려야 살겠지.”
그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벌려 틈새로 바위산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셔 눈을 찡그리는 그는 꼭 화난 인상이 되었다. 그걸 본 길리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는가? 상황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 것 같나?”
“아, 아닐세. 눈이 부셔서. 그것보다 검으로 이 가지들을 좀 쳐주겠나?”
프레데릭은 진지한 표정으로 길리엄에게 부탁했다. 그는 활시위를 걸고 화살을 꺼냈다. 길리엄은 그의 요청대로 나뭇가지를 베어냈다. 몬스터를 베고 적의 뼈를 끊기 위해 수련한 검이었다. 왠만큼 두꺼운 가지도 버터가 잘리듯 잘려나갔다.
길리엄도 베어낸 틈새로 바위산을 바라보니, 프레데릭이 지금 왜 활을 꺼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위산의 벽에 나 있는 한 구멍에 그리핀들이 마구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프레데릭은 그곳을 향해 활을 날려 그리핀을 맞출 생각이었다.
놈들이 저렇게 몰려드는 와중에 지존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리핀들이 저렇게 난리를 피우고 있는 걸 보면 지존이 잘 버텨내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당장 벽을 기어 올라 도울 수 없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프레데릭은 짐 속에서 왠 나무 막대를 꺼내며 길리엄에게 부탁했다.
“길리엄. 조금 뜬금 없는 부탁일 수는 있네만… 내가 활을 쏠 때에 뒤돌아 있을 수 있겠나? 날 안 봤으면 해서 말일세.”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