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34화 (34/56)

〈 34화 〉 금수.

* * *

길리엄은 헛기침을 했다. 프레데릭이 꽤나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는데, 이건 길리엄의 예상을 넘어섰던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프레데릭이 받고 있는 짜증은 상상 외였다. 루돌프에게서 사례금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험을 시작했는데, 그리핀을 만나자 마자 이 지경이라니, 그의 입장에선 속 터져 죽을 노릇이었다.

길리엄은 기죽은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아, 음, 미안하네. 놀리려던 것은 아니었다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찾으러 가긴 가야 할 텐데, 솔직히 자신이 없단 말이야. 그리핀 한 마리에 우리가 이렇게 당했는데, 이런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지?"

프레데릭은 다시 차분한 얼굴로 바뀌더니 설명을 했다.

"방금 만난 그리핀은 보통 놈이 아니야. 이런 놈들만 있는게 아니야. 그 놈은 아마 저 바위산에서 한가닥 하는 녀석일 거다. 덩치며, 싸움 실력이며, 우두머리인게 분명해. 그러니까 해볼 만 하다는 소리다."

'초장부터 기절해 버린 녀석이 뭐 보긴 한거냐?' 라는 의문이 입밖으로 나올 뻔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기로 했다.

*

고환 한쪽이 뜯겨나간 그리핀, 철갑옷을 입은 채 앞발에 붙들려 가는 루돌프, 그런 그리핀 등 위에 걸터 앉아 있는 지존.

셋의 괴이한 동행은 바위산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생각 외로 아무 일도 없는 무탈한 동행이었다. 그리핀 녀석은 도착할 때가 되서야 통증이 격하게 일어나는 듯 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긴장 속에선 통증이 줄었다가도 안심하게 되면 참을 수 없게 되는 듯 했다.

녀석은 거칠게 날갯짓을 했다. 녀석은 절벽에 부딛히기 직전까지 속도를 올렸는데, 마치 자해하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절벽에 쳐박기 직전, 녀석은 몸을 틀어 등을 부딛혔다. 금이 나 있던 바위에서 돌맹이들이 마구 떨어질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등에 매달려 있는 지존을 떨궈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평면적인 수에 당할 지존이 아니었다. 그는 절벽이 가까워지기도 전에 그리핀의 속샘을 알아채고 얼른 몸을 놀려 그리핀의 배 부분으로 넘어갔다.

지존의 관수에 의해 구멍이 난 복부에선 창자의 일부가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뜯겨나간 고환이 있던 자리에선 피가 떡져 있었다. 사람이라면 진작에 까무라칠 통증일텐데, 그것을 버티며 한참을 날아 온 그리핀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점도 있었다. 통증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내렸다간 지존의 자비 없는 공격이 쇄도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핀은 단순히 통증을 참아내는 정신력 뿐만 아니라 상황을 파악할 줄 아는 지능도 겸비하고 있었다.

녀석은 절벽에 몸을 부딛히고서도 지존을 떨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둥지로 몸을 날렸다. 둥지라기보단 굴에 가까웠지만 입구가 나뭇가지도 얼기설기 꿰여 있으니 둥지로 봐줄만 한 모양이었다.

둥지에 안착하자마자 굴 깊숙한 곳으로 루돌프를 집어던졌다. 기절해 있는 루돌프는 걷어차인 공처럼 멀리도 날아갔다. 지존은 깃털을 움켜쥔 채 진드기처럼 붙어 있었는데, 녀석은 그걸 떼어내고 싶은지 바닥에 마구 굴렀다.

그렇게 소란이 일어나니 주변의 그리핀이 몰려들었다. 굴 안쪽에서 쉬고 있던 그리핀들도 나왔다. 지존은 원숭이처럼 그리핀의 몸 위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핀은 아마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동료들이 가까이 오자 녀석은 하소연 하듯 끼룩거렸다. 이 빌어먹을 인간 거머리를 좀 떼어 달라는 듯 호소하는 듯 했다.

주변의 그리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서히 다가왔는데, 열 손가락으로도 다 못셀 수의 그리핀이 몰려드니 어떤 강심장이라도 겁먹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었다.

지존이 그리핀들을 둘러보니 자신이 올라타 있는 녀석보다 큰 체구의 것은 없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고환이 뜯긴 이 녀석이 이 바위산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녀석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섬기는 왕이 치명상을 입고 돌아왔다니, 신하 된 입장에서 분노가 얼마나 끓어오를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니 지존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녀석들이 계속 거리를 좁히며 들어오는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때인데, 루돌프는 굴 속 깊숙히 쳐박혔으니… 이걸 어쩌면 좋은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개중 가장 덩치 큰 녀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목을 구부려 부리로 쪼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녀석은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며 어떻게 공격할지 가늠하는 듯 했다.

'그래. 들어와라. 매운 맛을 보여주지.'

그리핀의 등 위에서 반격을 위한 내공을 모았다.

녀석은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앞발질을 하며 부리로 쪼았는데, 녀석의 부리가 향한 곳은 지존이 아닌 그리핀이었다. 지존이 올라타 있는 부상당한 그리핀 말이다.

앞발로 머리를 후려치곤 부리로 눈을 쪼았다.

쩍!

파열음이 굴을 울림과 동시에 그리핀의 비명이 시작되었다.

"끼르르르르! 끼르르륵!"

그리핀들은 비명 소리에 더욱 흥분한 듯 별안간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존에 의해 부상당한 녀석은 몰려드는 그리핀들에게 반항다운 반항도 하지 못했다.

녀석들은 등 위의 지존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마구 공격했다. 멀쩡한 반대쪽 눈도 쪼아서 핏덩이로 만들었고, 앞발로 머리를 움켜쥐곤 바닥에 내려찍었다. 황금빛 부리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뜬금 없는 동족 상잔이라니, 지존은 상상도 못한 괴이한 상황에 그저 두 눈을 멀뚱히 뜨고 지켜보는 것 밖엔 할 수 없었다. 괜히 몸을 움직였다간 녀석들의 부리가 자신을 향할지도 몰랐다.

녀석들은 발버둥치는 녀석을 끊임 없이 공격했고, 눈이 멀어버린 그리핀은 반항다운 반항도 하지 못했다. 그리핀은 배를 보이며 항복의 의사를 보였다.

그러나 항복 따윈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다른 그리핀들은 녀석의 튀어나온 내장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녀석들의 공격에 창자는 마구 뽑혀나왔고, 결국 놈은 바닥을 기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내장을 끌며 간신히 입구까지 기어간 녀석은 결국 둥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지면서도 날갯짓을 했지만 무의미한 동작일 뿐이었다.

동료에게 복수를 맡기기 위해 고환이 뜯기는 격통을 참으며 날아왔건만 이 무슨 끔찍한 최후란 말인가.

중원의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면서 보았던 것 중에는 독특한 사형법도 있었다.

방금 뜯겨 죽은 그리핀을 보니 능지형이 생각났다.

포졸들은 저잣거리에 사형수를 묶어두었다. 집행자는 바구니에서 칼과 각종 약물을 꺼냈었다. 진흙 같은 것을 들고 있는 조수도 있었다. 출혈이 심하게 나타날 것 같은 때에는 그 진흙을 발라 피를 멎게 했다. 그는 능지형을 몇번이나 집행했는지, 칼을 만지는 손놀림에 낭비따윈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베어내니 종국에는 팔다리도 없고 몸통만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사형수는 처음에는 비명을 질러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고, 죽음이 임박했을 때, 눈동자에 생기따윈 없었다.

혼은 이미 빠져나가고 기계적인 호흡만이 몸에 남아있는 듯 했다. 그런 작업이 이어지기를 계속, 살점이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떨어져 나가니, 그제서야 사형수의 숨이 끊어졌다.

사형수의 죄목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상당히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던 것으로만 기억하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극형을 내릴 리 없었다. 관계자들은 시체와 살점들이 담긴 바구니를 대중에게 공개했는데,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대단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을 건지느라 혈안이 된 어부처럼, 대중들은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살점을 주워갔다. 개중에는 살점을 바로 입 안에 넣어 회처럼 즐기는 자도 있었다. 갓난아이를 안고 살점을 쥐어 포대에 싸가는 아낙도 있었고, 며칠을 굶은 듯한 거렁뱅이도 있었다.

살점을 담은 바구니는 금새 바닥이 났고, 시체의 목은 떼어내 높이 걸었다. 능지형이라는 축제는 그렇게 끝이 났다. 발걸음이 느린 탓에 살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탄식과 함께.

당시에 그런 집행을 본 것은 꽤나 충격이었다. 아비지옥이라는 것이 세상에 따로 있을 것인가. 지금 바로 이곳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납득될만한 것은, 그 사형수가 누구에게나 욕 먹을 만한 악한이었다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충격이 이 그리핀들에게서 느껴졌다. 어쩌면 한 수 위의 기괴함이기도 했다. 사형수의 살점을 취하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인 것도 있었다.

극형을 받을 법한 악한을 처단하는 행위로 나온 부산물이라 생각하면 대중들의 행동도 이해가 갈법 했다. 그러나 동료를 느닷없이 몰려와 죽여 버리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희생당한 그리핀은 덩치도 다른 녀석보다 두배는 되어 보임직 했다. 비록 부상 당하긴 했지만 덩치에서 오는 위세는 왕과 같았고, 다가오는 그리핀들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 거리를 좁혀오는 금의위처럼 보였다. 지존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늘의 지배자인 독수리의 머리와 육지의 우두머리인 사자의 몸을 한 녀석들! 하늘, 땅 두 곳의 패자가 섞인 생김새를 했으니 영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하는 짓은 추악하기 그지 없구나! 그냥 새대가리를 한 금수새끼였어! 인의라고는 하나도 없군! 동료의 눈을 쪼아대고 창자를 뽑아 짓이기는 꼴이 역겹기 그지 없구나!"

과거에 사형 집행 광경이 떠올라 한껏 불쾌해진 지존은 그리핀들에게 소리쳤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상대와는 때때로 알 수 없는 정이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인데, 둥지 아래로 떨어져 죽어버린 그리핀에게서 그런 것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끔찍한 방법으로 상처를 낸 탓에 반항도 못 하고 동료에게 죽임을 당한 것도 있었으리라. 그런 것이 괜한 죄책감도 불러 일으키니,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소리치는 지존을 바라보던 그리핀들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굴 속 깊숙한 곳에서도 눈빛은 반짝였다. 태양빛을 반사하는 눈알들은 그 자체로 생물 같은 움직임을 했다.

그리핀들은 지존에게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흡사 지렁이를 눈 앞에 둔 참새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존은 글레이브도, 단검도, 이렇다 할 무기도 없는 맨몸이었다.

그리핀은 맨몸의 인간이 어찌나 허약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빨이 빠지고 발톱이 깨진 호랑이도 인간보다는 강하다.

맨 처음 상처 입은 그리핀에게 공격을 시도한 녀석이 다가왔다. 녀석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느닷없이 지존의 목을 향해 부리를 쪼았다. 부리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따각!

반응하지 못했다면 즉시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지존은 허리를 젖히는 것으로 부리를 피했다. 지존의 머리 바로 위로 그리핀의 머리가 스쳤다.

그리핀은 지존에게 있어 죽음의 간격으로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검지손가락에 내공을 실었다. 솟구치는 내기는 마치 손가락에서 뻗어나온 장검과도 같았다.

독사가 사냥감에 달려드는 것보다도 빠르다. 검지가 그리핀의 목에 쳐박혔다. 빳빳한 깃털이 두꺼운 천갑옷 역할을 하니, 지존의 손가락은 원하는 깊이만큼 들어가질 못했다.

"쯧."

즉시 손을 회수함과 다시 한번 공격을 가했다.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진각을 밟았고, 이전보다 더욱 강해진 검지가 그리핀의 목에 쑤셔박혔다. 검지 끝에 말캉한 것이 느껴졌다.

"이거구나."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