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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33화 (33/56)

〈 33화 〉 어쩌다 보니 그리핀 등 위에.

* * *

녀석은 서서히 다가왔다. 황금빛 부리에는 핏방울과 살점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비를 피하는 짧은 순간에도 녀석은 사슴 한 마리를 잡아낸 것이었다.

풀숲에 가려졌던 앞발을 들어올렸다. 지존은 순간 중원의 화가들이 용을 묘사한 그림을 떠올렸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용맹한 용의 앞발, 그것은 태산을 할퀴어 없애버릴 것 같은 우악스러움이 있었다. 그 앞발 부분이 닮았다. 독수리와 용의 것을 닮은 앞발에는 내장이 텅 빈 채 죽어 있는 사슴이 매달려 있었다.

철썩! 빠드득!

녀석은 사슴을 힘껏 내리쳤다. 척추뼈가 뒤틀리며 깨지는 소리가 났다. 위협이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슴에 더 이상 흥미를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녀석은 지존을 뚫어지게 바라보곤 루돌프로 시선을 옮겼다. 루돌프는 반짝이는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는 채였다.

진흙으로 갑옷을 더럽히는 작업을 한번만 더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흙은 비에 의해 모조리 씻겨 내려갔다. 다시 흙을 바를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그리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으므로…

프레데릭은 굳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녹아들어 있었다.

“방금 사냥에 성공했나봐… 일단… 일단 … 가만히 있으면 그냥 갈지도 몰라… 사슴을 먹었으니 배가 부를 거야… 가만히…. 가만히…”

지존이 대답했다.

“저 녀석, 우리한테 관심 있는게 아니야.. 네 말대로 우리 고기엔 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저 녀석… 루돌프의 갑옷을 쳐다보고 있다.”

“...! 그렇군! 젠장… 비 때문에… 지금…. 반짝이겠지…?”

지존과 프레데릭의 말을 들은 루돌프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씨발…”

그는 떨리는 손으로 검집을 잡았다.

그리핀은 루돌프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루돌프가 검을 뽑으려 하는 것을 보곤 흥분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소리를 내질렀다.

“끼르륵! 끼르르르르르르! 끼르르르르!”

고막을 찢는 소리에 긴장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각자의 무장을 움켜쥐었다.

급작스런 돌진이었다. 가장 앞에 있던 프레데릭의 코앞까지 도달하는 데에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얼른 고삐를 틀어 말을 보호함과 동시에 화살 하나를 쥐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프레데릭은 몸부터 떨어졌다. 너무 빠른 상황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탓이었다. 길리엄도 얼른 말을 움직여 프레데릭을 향해 뛰었다. 지존은 글레이브를 단단히 붙잡고 그리핀을 향해 뛰어올랐다. 단번에 목을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공중에서 내공을 모아 후려치려고 하는 찰나, 그리핀은 잽싸게 반응했다.

‘앞발로 후려치나? 아니면 부리로?’

그리핀의 반격에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글레이브는 큰 궤적을 그리며 그리핀의 목을 향했다. 그러나 그리핀의 반격은 앞발로 후려치는 것도, 뱀처럼 유연한 목의 힘으로 쪼는 것도 아니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독특한 공격이었다. 그리핀이기에 할 수 있는, 그리핀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녀석의 거대한 날개가 순식간에 펼쳐지더니, 지존을 향해 힘껏 후려치듯 했다.

금수의 직선적인 공격에 쉽게 당할 지존이 아니었다. 지존은 휘두르던 글레이브를 얼른 회수하여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날개는 지존을 타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핀의 목적은 돌풍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공중에 떠 있던 지존은 상당한 압력의 바람에 직격했다. 공기를 압축한 포를 전신으로 맞는 느낌이었다. 고통은 없었다.

지존은 그대로 바람에 날려 나무에 부딛혔다. 쿵 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윽! 새대가리가 똑똑하구나!”

프레데릭은 얼른 자세를 고쳐 활을 쏘았다. 그리핀은 그것 또한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날개로 몸을 감쌌다. 길리엄의 롱소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길리엄은 있는 힘껏 그리핀의 머리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그리핀의 부릅뜬 눈은 길리엄의 잽싼 동작도 모두 간파했다. 녀석은 부리를 쩍 벌리더니 롱소드를 콱 물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프레데릭의 강궁이 날개에 꽂혔다. 녀석은 잔뜩 신경질을 냈다.

그리핀의 치악력은 대단했다. 롱소드는 바위에 꽂힌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길리엄은 검을 회수하려 몸을 비틀며 안간힘을 썼으나 그리핀은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검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길리엄의 의지도 대단했다. 그리핀이 사냥감을 찢을 때처럼 머리를 터는데, 길리엄은 끝까지 손잡이를 잡고 늘어졌다. 결국 그리핀의 강한 목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지존처럼 공중을 날아 나무에 부딛혔다.

프레데릭의 화살에 화가 난 녀석은 앞발로 프레데릭을 움켜쥐었다. 프레데릭은 고함을 치며 반항했다. 내장마저 우그러뜨릴 것 같은 강한 힘에 프레데릭은 욕설을 참지 못했다.

“끄아악! 이 새대가리 씹새야! 아아악!”

그리핀은 꿈틀거리는 프레데릭은 관심 없다는 듯 바닥에 내려찍어 버렸고, 프레데릭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죽지나 않았으면 다행일 정도의 충격이었다. 습기가 가득한 날씨였는데도 흙먼지가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리핀은 그대로 루돌프를 향해 튀어나갔다. 우악스런 앞발이 그를 덮쳤다. 갑옷의 가슴께가 우그러질 정도의 충격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루돌프는 기절하지 않은 채 바람 빠지는 소리와 신음을 냈다.

“끄흐으으으… 허으으으…”

그리핀은 자신의 포획물이 아직 쌩쌩하다는 것이 영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녀석은 부리로 루돌프의 이마를 찍어버렸다. 루돌프는 그대로 축 늘어져, 독수리의 발톱에 찢긴 죽은 생선처럼 되었다. 투구를 쓰고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투구가 아니었다면 루돌프의 머리는 하늘에서 떨어뜨린 수박 꼴이 되었을 것이다.

지존은 글레이브를 들고 그리핀을 향해 뛰쳐나갔다. 녀석이 루돌프를 쥐고 있느라 정신이 팔린 때가 적기였다. 지존은 그리핀의 목을 두동강낼 작정으로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좌상단에서 우측 하단을 가로지르는 참격은 천년 묵은 참나무도 동강낼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핀은 지존과 싸울 마음이 일절 없었다. 사슴의 내장을 모조리 빼먹었으니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거기에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인간을 얻다니, 그리핀은 아주 흡족한 상태였다. 게다가 지존이 내뿜는 살의는 그리핀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그리핀은 지존을 흘겨본 뒤 하늘을 향해 뛰었다. 사자를 닮은 녀석의 하반신에서 나오는 탄력은 어마어마했다. 찰나의 순간에 나무 높이만큼 뛰어오른 녀석은 그대로 날갯짓을 했다. 루돌프를 쥐고 둥지로 날아갈 생각이었다.

지존의 참격은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공격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지존의 집념은 그리핀이 도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존은 얼른 글레이브를 회수한 뒤 근처의 나무에 던졌다. 글레이브는 나무에 높이 박혔다. 지존은 얼른 뛰어올라 그것을 발판삼아 다시 도약했다. 간신히 그리핀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꼬리를 잡힌 녀석은 지존을 떼어내고 싶다는 듯 날개짓에 더욱 열을 올렸다. 순식간에 사람이 개미만하게 보일 높이가 되었다. 이 높이라면 떨어졌을 때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녀석이 더욱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저지해야만 했다.

꼬리를 붙잡은 채 궁리를 하고 있으니 눈 앞에 쌍방울 두개가 보였다. 누런 털색에, 크기는 주먹보다도 큰 것이었다. 그리핀은 수컷이었던 것이다.

“어찌 되도 모르겠다.”

뜻밖의 이변에 적잖이 피곤해진 지존은 조금 극단적인 대처를 하기로 했다. 왼손으로는 꼬리를 단단히 붙잡고 오른손에 힘을 모았다.

관수(?手). 손가락을 펼친 채 창처럼 찌르는 기술이었다. 힘이 송곳처럼 모이기에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는 기술이지만 그만큼 손가락에 오는 반동이 강한 고급 기술이다. 때문에 복부나 목처럼, 뼈로 쌓여있지 않은 연한 조직에만 가할 수 있는 공격법이다.

고환은 내장처럼 연하다. 그런 중요한 부위를 지존에게 보였으니 그리핀의 운도 참 지지리 없었다. 왼손으로 꼬리를 당김과 동시에 탄환처럼 날아간 지존의 손. 그것은 고환을 꿰뚫고도 모자라 복막까지 도달했다.

몸을 비틀어 손을 잡아빼니 큼지막한 고환 덩어리가 뜯겨나왔다. 피 몇방울이 입에 들어갔지만 별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핀의 거체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움찔거렸다.

녀석은 별안간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고 들썩이니 그 반동에 의해 지존은 펄쩍 날아올랐다. 그 와중에도 그리핀은 루돌프를 꽉 쥔채 놓칠 않았다. 몸집만큼이나 정신력도 강인한 그리핀이었다.

발광하느라 튕겨올려진 지존은 놈의 등 위로 착지할 수 있었다. 약점이 완벽히 드러난 상태였다. 공을 차듯 녀석의 목을 후려차면 목뼈를 부러뜨릴 수 있을 것이고, 하다못해 녀석의 머리까지 기어가서 눈알을 후벼 파버려도 될 것이다.

그러나 지존은 생각을 바꾸었다. 고환을 뜯어 버릴 때까지만 해도 녀석을 추락시킬 마음이었는데, 녀석의 발광에 한번 공중에 떴다가 떨어지니, 이곳에서 추락하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어떤 낙법을 사용해도 근골이 다칠 높이였다. 게다가 혼자도 아니었다. 기절한 상태로 그리핀의 발에 붙들려 있는 루돌프도 생각해야 했다.

“쯧… 어디까지 가려는지 한번 보자…”

고환 한쪽이 뜯겨나가고 복부에도 구멍이 뚫린 그리핀은 그 상태로도 한참을 날았다.

*

길리엄은 기절한 프레데릭을 흔들었다.

“죽은거야? 죽은 거 아니지? 이봐! 좆됐어! 이봐!!!”

눈을 뒤집은 채 뻗어 있던 프레데릭이 숨을 몰아쉬었다.

“으허억! 헉! 흐어어억! 뭐야? 뭐야 씨팔? 뭐 어떻게 된거야?”

“루돌프는 그리핀이 잡아 갔고, 존은 그리핀 꼬리를 붙잡고 날아 갔어. 루돌프는 죽었을지도 몰라.”

프레데릭은 화들짝 놀랐다. 그에게 있어서 루돌프는 고용주였다. 루돌프가 죽어 버리면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걸로 끝나지는 않을 터였다. 루돌프는 마을에서 손꼽히는 재력가의 아들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죽은 걸 안 재력가가 가만히 있을까.

“씨팔! 뭐라고? 루돌프가 죽었다고?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산채로 잡혀 간 거 맞지?”

자신의 말을 듣긴 들은건지 알 수가 없었다. 프레데릭이 눈을 부릅뜨며 질문하는데, 차마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다시 말할 수는 없었다. 길리엄은 약간 낙관적인 말을 하기로 했다.

“어…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아마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 갑옷이 워낙 튼튼하잖아.”

프레데릭은 머리칼을 쥐어뜯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진짜 돌아 버리겠네. 진짜로 말이야. 상황 때문에라도 돌아 버릴 것 같은데, 일이 왜 이렇게 안 풀리는지 모르겠어. 아니 씨팔, 길리엄, 자네도 모험가니까 알 것 아닌가.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이어지는 모험도 있었는가?”

길리엄은 팔짱을 끼곤 곰곰히 생각을 되짚어봤다. 프레데릭의 말대로였다. 이번 모험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고블린이라는 것들은 왠만해서는 소규모로 뭉쳐서 다닌다. 하지만 여행 시작부터 만난 고블린들은 군대에 필적할 정도의 규모였다. 놈들이 부리는 오우거도 마찬가지였다. 오우거라는 녀석들은 고블린보다 훨씬 수가 적었다. 그런 것들이 한번에 몰려오질 않나, 동굴에선 서큐버스에 붙잡혀 죽을 뻔하질 않나.

길리엄은 그에게 질문했다.

“방금 그 그리핀 말이야. 일반적인 그리핀보다 훨씬 크기가 큰거지?”

“그래. 내가 말을 꺼낸 이유도 이거야. 그렇게 큰 그리핀은 거의 없다고. 근데 그런 놈을 만났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모험 열번을 해도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질 않아. 골 아파서 터져 버릴 것 같네.”

“골 아플만 하지. 그리핀이 얼마나 세개 내려쳤는데.”

프레데릭은 길리엄을 흘겨보곤 말했다.

“농담할 기분 아닐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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