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숲 속의 시선.
* * *
길리엄은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얼굴을 쓸었다. 등을 펴니 뚜두둑 소리가 났다. 그는 피곤한 얼굴을 한 채 지존에게 말했다.
“눈 좀 붙이지 그랬나. 계속 앉아 있던 거야?”
“딱히 졸리질 않아서 주변을 보고 있었다. 혹시 몬스터라도 나타났는데 모두 잠에 빠져 있으면 큰일이지 않는가.”
“음… 뭐 그렇긴 한데… 음, 아니다. 어쨌든 고맙네. 자, 이제 슬슬 출발해 볼까.”
프레데릭은 말 위에 올라타 멀찍이 쳐다보더니 웃음기 띈 얼굴이 되었다.
“검은 머리, 네가 말한 곳이 저곳인가?”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야트막한 바위산이었다. 복숭아가 그에게 일러준 곳도 저쯤이었다. 복숭아가 말하길, 그 바위산은 세력 다툼에서 밀린 어린 그리핀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했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는 조금 약하고 작은 체구의 녀석들이 있다는 곳이었다. 그리핀의 고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숨겨 놓았다는 전설의 보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알만 필요한 것이니 약한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저 곳은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인데… 확실히 그리핀들이 보이는군. 저쪽으로 가는 것도 좋겠어. 어떻게 알았나?”
차마 복숭아가 알려 주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지존은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리핀이라는 것들은 날개 달린 녀석이잖나? 내가 만약 날개가 있다면 어디에 둥지를 틀까 생각해 보니 딱 저런 위치가 좋겠더군.”
프레데릭은 의심스런 눈으로 지존을 흘깃 쳐다봤다.
“흠… 마크 클레망에게 정보를 샀나?”
어디서인지 한번 들어 본 이름이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길드 공고문에 <<이번 달="" 길드의="" 공로자="">> 로 쓰여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성체 그리핀을 죽여 그것을 통째 마을로 가져온 실력자였다.
“정보를 사고 싶다고 살 수 있겠는가? 만나줄 지도 의문이군. 내가 브론즈 등급이 되었을 때도 불만 가득한 놈이 한가득이었다.”
“... 그것도 그렇군. 어쨌든 저쪽을 공략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출발하자구.”
바위산을 향해 떠났다. 울룩불룩 못생긴 복숭아는 짐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누군가 볼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왠 복숭아를 숨겨 두고 있냐면서, 그러나 다들 남의 짐에 신경쓸 여유가 없어졌다.
바위산에 가까워 질수록 그리핀의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프레데릭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루돌프를 쳐다보았다. 그는 뭔가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 항상 대비는 철저히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루돌프는 귀찮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말해 보시오.”
“그… 그리핀이라는 것들은… 반짝이는 걸 굉장히 좋아한단 말이죠?”
“알고 있지. 그쯤은.”
“그래서 말인데… 플레이트 아머의 광택이 그리핀의 시선을 과하게 끌 것 같습니다.”
프레데릭의 말에 루돌프는 인상을 찌푸렸다. 철갑옷은 루돌프가 자랑스러워 마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가격적으로도, 생김새로도 뛰어난 것이었다. 왠만한 모험가는 구비하기도 힘든 고급품이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프레데릭?”
"진흙… 이라던지… 흙으로 광택을 덮어야 할 것 같네요…"
루돌프는 순간 프레데릭을 노려보았다. 루돌프가 멍청하고 감정적인 면모를 보여주지만, 실리적인 이유를 거스를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말에서 내려왔다.
"그리핀이 신나서 나만 공격한다면 안 될 일이지. 뭐, 어쩔 수 없구만. 흙 좀 개어서 문질러 주게."
프레데릭과 길리엄은 가죽 부대에 들은 물을 길바닥에 뿌렸다. 그것을 칼자루로 긁어내더니 반죽처럼 된 흙을 루돌프의 갑옷에 발랐다. 루돌프는 인상을 찌푸리며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닭대가리 놈들 잡으러 가기 정말 힘든 거로군."
"..."
그들은 다시 말에 올라 바위산으로 향했다. 바위산은 꼭 구름을 모자처럼 쓰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달려가고 있으니, 모자가 서서히 검게 물들었다. 이윽고 그 모자는 먹구름이 되었다. 먹구름은 어느새 해를 가렸다.
"씁, 비가 오면 그리핀들은 활동을 잘 안하는 편이지 프레데릭?"
루돌프의 질문이었다. 그리핀은 날개가 물에 젖는 것을 꺼리는 습성이 있어서, 비가 올 때에는 거의 활동을 멈추는 편이었다.
"그렇죠."
"괜히 흙을 발랐군…"
"..."
이윽고 비가 쏟아졌다. 확실히 그리핀은 활동을 멈춘 듯, 이따금씩 울려 퍼지던 그리핀의 포효는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보통은 비가 오면 가던 길을 멈추고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다. 근처에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딱 좋게 생긴 조그마한 동굴도 있었다. 그러나 다들 그곳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전에 서큐버스에게 당한 기억 때문에 들어갈 생각 조차 들지 않는 것이었다.
길리엄은 하늘을 쳐다보며 구름의 상태를 살폈다. 구름은 국지적으로 뭉쳐 있었고, 멀리 떨어진 곳은 아직 햇빛이 들고 있었다. 일종의 소나기였다.
"보아하니 금방 그칠 것 같은 비네. 멈추지 말고 그냥 이동하는게 어떨까? 그리핀이 활동하지 않을 때 얼른 가는게 좋지. 저것들이 날아 다니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냐."
프레데릭은 길리엄의 말에 동의했고, 그들은 모두 분주히 바위산을 향해 이동했다.
길리엄의 판단대로, 우렁차게 비를 쏟아내던 구름은 금새 지쳐 버렸다. 바위산의 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챙 좁은 멋쟁이들의 모자로 변했다.
숲과 산은 참 종잡을 수 없는 존재다. 변덕 심한 꼬맹이 정령이 날씨를 바꾸는 것에 재미를 들리기라도 한 듯,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쏟아지는 햇살로 바뀌었다.
따뜻한 햇살이 말갈기의 털을 말렸다. 축축히 젖은 가죽이며 머리카락이 서서히 활기를 찾았다. 일행의 기분도 좋아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말들의 걸음도 경쾌했다.
그들은 우거진 숲 지대로 돌입했다. 그리핀들의 포효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이젠 걱정할 것이 없었다. 울창한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그들의 모습을 감춰주니, 하늘에 어떤 맹수가 날아다녀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냉철한 시력이 움직임을 포착해도 소용 없었다. 그들의 거대한 날개는 숲 속에선 하등 도움 되지 않는 장식품일 뿐이니까. 프레데릭은 차라리 그들이 강습해주길 원했다. 나뭇가지에 걸려 허둥대는 그리핀을 쏘아 죽이고 그 고기로 실컷 배를 채우고 싶었다.
십여일을 육포와 곡물가루 죽으로 끼니를 때우면 신선한 고기 구이 맛이 어찌나 절실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존, 아까 프레데릭이 하는 말 들었어?”
“뭐라고 했었지?”
“그리핀이 여기로 내려오기라도 하면 자기한테 맡겨만 두라는군. 나무에 걸렸을 때 화살로 고슴도치를 만들어 줄 거래. 그리핀 고기 맛이 꽤 좋다고 그러네. 괜히 막 상상되고 그러지 않아?”
멀리서 바라본 그리핀의 모습을 떠올렸다. 상반신은 독수리의 것이고 하반신은 사자의 것이었다. 어깨에 돋아난날개는 구름도 단번에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처럼 장엄했다. 날짐승의 고기맛과 네발 달린 짐승의 고기맛이 섞인 녀석은 분명 맛있을 것 같았다.
어찌해서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 다니는 녀석들이 중원의 창공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을까 고민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꽤나 우스운 것이었다.
중원에서 있을 적, 미식가들의 탐닉이 얼마나 장대한 것인지 놀란 적이 있었다. 경공술을 이용해서 제비집을 찾아 사방팔방을 쏘다니던 녀석도 있었다. 한 녀석은 바다를 며칠이고 떠다니더니 상어를 때려잡곤 그 지느러미를 뜯어 온 적도 있었다.
중원에 몬스터가 없던 건 아마 미각에 예민한 무림인들이 씨를 말린 탓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길리엄에게 답했다.
“그리핀을 먹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보질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참 맛있을 것 같다. 프레데릭의 요리 솜씨도 꽤나 기대 되는군.”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프레데릭도 한 수 거들었다.
“내가 고기는 또 맛깔나게 굽거든. 그리핀 놈들이 얼른 우릴 찾아서 공격해주길 빌란 말이야. 한번 거하게 배 좀 채우고 알을 찾으러 가야지. 그래야 힘도 나고.”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귀한 걸로 배를 채우며 살아온 루돌프도 그들의 대화에 군침을 다셨다. 새고기 맛과 네발 짐승의 맛이 동시에 나는 고기라니… 별의 별 요리를 먹어본 루돌프도 그런건 아직 접해보질 못했다.
모두들 맛있는 요리 생각을 하며 말 달리던 때, 앞서가던 프레데릭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은 깜짝 놀라며 앞발을 들었다. 말은 영문도 모른 채 놀랐지만 프레데릭은 아주 합당한 이유로 상당히 놀랐다.
코앞에서 달리던 프레데릭이 급정거를 하니 뒤따르던 말들도 모조리 깜짝 놀랐다. 살짝 졸고 있었던 길리엄은 성을 냈다.
“이봐! 프레데릭! 수신호라도 하고 멈춰야지!”
프레데릭은 바싹 얼은채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제대로 음성화되지 않은 읊조림은 동료들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제대로 말해.”
“좆된 것 같다고 말한거야…”
“갑자기 뭔… 응?”
프레데릭을 제외한 세 사람도 금방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나무 틈새에서 번쩍이는 안광. 천리를 꿰뚫어 보는 듯한 맹금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맹금류의 것과는 완벽히 다른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눈썹뼈가 도드라진 역전의 노장이 떠오르는 눈매였다. 불룩한 눈 위의 깃털이 반쯤 눈을 덮은 졸린 눈. 그러나 맥빠져 보이는 졸린 눈이 아니다. 굳이 위협할 가치도 못 느끼겠다는 듯 무심한 눈빛이었다.
젖은 날개의 느낌이 싫어 숲 속으로 들어와 휴식하고 있던 그리핀이었다. 프레데릭의 예상 외로 그리핀들은 울창한 나무들 사이도 유연하게 지나갈 수 있는 듯 했다.
“......”
지존을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어쩔 줄 모른 채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지존은 그리핀의 약점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노력했다. 두툼한 사자의 몸집에 비해 목은 독수리의 것처럼 가늘었다. 목을 노린다면 쉽게 무력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녀석은 가장 먼저 어떻게 공격할까?’
통나무도 쥐어 뜯어 버릴 것처럼 생긴 우악스런 앞발로? 아니면 날카롭게 튀어 나와 있는 노란색 부리로?
인간을 상대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인간이 공격하는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무기를 든 녀석의 경우에는 무기를 활용한 공격이 대부분, 그 궤적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녀석, 그리핀의 경우에는 어떤 공격을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숲 속에서 그리핀을 마주치는 것은 상정 외였다. 활공하는 그리핀들이 급강하 하여 공격하는 것만을 생각했었다. 새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괴이한 몬스터가 어떻게 움직일지 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녀석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곤 반쯤 잠겨 있던 것 같은 눈이 부릅뜨였다. 죄인에게 호통치는 지옥의 염라대왕이 떠오르는 눈이었다. 활짝 열린 눈 속의 홍채도 수축하기 시작했다.
염라대왕이 나무 틈새로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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