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31화 (31/56)

〈 31화 〉 날 좀 먹어 줘.

* * *

어디서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길리엄, 프레데릭, 루돌프는 말라붙은 나무 아래로 말을 움직였다.

땅은 생기 하나 없는 죽음의 것이라,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창백하게 질린 시체의 얼굴을 밟는 느낌이었다. 말 타는 감각이 소름끼쳤다. 풀이 자라있는 땅은 밟을 때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이 분지의 땅에서는 그저 푸석함 뿐이었다.

지존이 두리번 거리고 움직이질 않으니, 멀리서 길리엄이 소리쳤다. 그들은 벌써 나무 아래에 내려 짐을 풀고 있었다.

“얼른 와! 여기서 좀 쉬었다 가면 좋겠어!”

한동안 말이 없던 저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래. 뭘 멀뚱히 있어? 난 저들과 같이 있다. 나무 아래로 와.’

혹시 *전음입밀? (*?音??. 내공을 이용하여 소리 없이 소통하는 것.)

그것을 사용할 정도의 고수가 서역에 있는 걸까? 불안한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네놈 대체 뭐 하는 놈이냐? 허튼 짓 말고 정체를 밝혀.’

‘그러니까, 나무 아래로 오라니까.’

‘...’

지존도 일행과 함께 말에서 내렸다. 글레이브를 쥔 채 사방을 경계하니, 길리엄과 프레데릭은 의아하게 쳐다봤다.

“잠깐 눈 좀 붙이지 그래? 뭘 그리 굳어 있나? 사방에 풀도 없이 뻥 뚫려 있으니 몬스터가 나타나도 금방 알 수 있어.”

저음의 알 수 없는 목소리도 프레데릭의 말을 들었는지,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 생각보다 겁이 많군. 이제 머리를 들어서 날 찾아봐.’

목소리의 요청대로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들을 세세히 쳐다보았다. 그곳에 웅크려 있는 정체 모를 고수 따윈 없었다. 왠 복숭아 하나만이 달랑 달려 있을 뿐이었다. 울퉁불퉁하고 못생긴 복숭아였다.

얼기설기 말라 있는 가지들 사이에 이파리 하나 없이 매달려 있는 복숭아는 존재감이 상당했다.

‘복숭아…?’

‘그래. 나는 복숭아다.’

‘......’

서역에도 복숭아가 있다는 것이 꽤 놀라운 일이었다. 이내 놀랄 만한 일은 그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복숭아가 말을 한다고?

전음입밀을 하는 무림 고수는 몇 있었다. 실제로 만나 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복숭아라니, 그런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자신이 드디어 미쳤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견고해지는 순간이었다.

‘너 안 미쳤어. 날 먹어 달라고 부른 거야.’

‘먹어 달라고? 그럼 아무 놈에게나 먹히면 될 것이지. 나한테 먹혀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음… 설명 하자면 긴데…’

주변을 둘러 보니, 다른 이들은 팔을 베고 누워 눈을 붙이고 있었다. 며칠간 계속 이동하는 것에 집중한 탓에 피로가 몰려온 것이다.

릴리아에게 본래 가지고 있던 내공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은 덕에 피로감은 없었다. 딱히 할 것도, 눈을 붙일 필요도 없다. 지존은 자신의 망상일지도 모르는 음성과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

1년쯤 전이었다. 먹구름이 아주 크게 뭉치며 분지 위를 뒤덮었었다. 멀리서 보면 활화산이 연기를 토해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뇌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날은 그가 지상에 것들에 대한 불만이 꽤 많았던 때이리라. 그는 분노가 담긴 창을 지면에 내리꽂았고, 거대한 번개의 창은 복숭아 나무에 직격했다.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떨어진 번개는 나무를 타고 땅으로 사라졌다. 전격이 지나간 자리는 뇌신의 분노가 이토록 무섭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큰 상흔을 남겼다. 나무껍질은 잔뜩 갈라지고 터져버렸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와중에 불까지 붙었지만, 다행히 그 나무는 목숨을 부지했다. 그리고 그 때, 떨어지지 않고 용케 붙어 있는 꽃봉오리가 있었다.

그는 그 때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지나간 뒤 생각해 보니, 통증을 느꼈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 의식이 생겼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때 즈음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었다.

생각하는 복숭아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다.

‘말도 안 되는구만. 그렇지 않아?’

‘...’

생각하는 복숭아에게 대답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째르르 울어대는 벌레도, 이따금 상쾌함을 몰고 와주는 바람도. 하늘 위에서 곡선을 그리며 불을 뿜어대는 햇님도. 자신에게 양분을 아낌없이 전달해 주는 나무도.

소통할 수 있는 존재 따위는 없었다. 고독한 시간들이었지만, 그를 버티게 해준 것은 어머니였다. 그는 자신의 모체, 그러니까 나무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늘 말을 걸었다. 대답 따위는 없었지만 그건 꽤 위로가 되었다.

그녀에게서 수액을 공급 받는 감각은 어머니에게 안겨 젖을 빠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낱 복숭아인 그가 그런 개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는 알게 되었다. 번개와 함께 말이다.

정말로 심심하지만 순탄한 시간이 이어지던 중,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었다. 벌레와 새들이 탐스럽게 익은 과육을 노리고 찾아온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깊숙한 곳에 위치한 그는 다른 동료 복숭아들의 살이 뜯기는 걸 보며 무지막지한 공포를 느꼈다. 이윽고 탐험심 넘치는 새가 그를 발견했다.

아무도 말 걸어주지 않는 고독 속에서 삶을 끝내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여러번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어찌나 끔찍하던지 모른다.

반항할 수단도 무엇도 없던 그 때, 어머니가 마나를 나누어 주셨다. 어머니의 마나를 자신도 모르게 훔친 것인지, 어머니가 진짜로 나누어 준 것인지는 모른다.

마나가 생기니 마나를 응축해 쏘아내는 것으로 새에게 한방 먹일 수 있었다. 정신이 빠질 정도로 강한 타격을 입히니 새는 도망쳤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것이었다. 그 때부터는 사투의 시기였다. 벌레가 기어오면 마나로 쳐내고, 새들이 쪼기 전에 놀래켜 버렸다.

매일 매일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도 까먹어 버렸다.

‘이렇게 먹혀 버릴 수는 없어!’

그 생각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동료 복숭아들은 벌레에게 먹히거나, 새들에게 당하거나, 바람에 떨어져 버렸다. 오직 자신만이 어머니에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자신도 누군가가 먹어 줘야 세상에 나온 의미를 다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도 들었다. 벌레한테 먹혔어야 했나? 새에게 쪼였어야 했나? 심란한 시간들이었다.

때때로 모험가 집단이 복숭아 나무가 있던 분지 밑을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지존처럼 복숭아의 말을 알아듣는 녀석은 한 명도 없었다.

‘형편 없는 놈들 뿐이군. 먹혀줄 만한 녀석이 하나도 없단 말이지.’

하루 하루 그렇게 생각했다.

‘이젠 정말 따분해. 그냥 끝내 버릴까.’

마나를 응축해 자신을 매달고 있는 꼭지를 끊어 버리면 이 지긋지긋한 삶도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신세를 한탄하기를 여러 차례, 어느새 그런 생각도 끝이 났다.

갑작스레 추위가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 그녀의 주위를 감싸던 풍성한 잎사귀들은 모조리 떨어져 나갔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수액도 차츰 말라가기 시작했다.

‘자살을 생각한게 엊그제 같은데, 얼어 터질 추위가 오니까 또 살고 싶네.’

마나를 최대한 모아가며 추위와 맞섰다. 어머니는 언제부터인지 잠에 빠져들었다. 살아 있는 것인지 의심될 정도로 고요했다.

어떤 말을 해도 무반응이었던 어머니였으나, 이젠 정말로 완벽한 무반응이었다. 더욱 고독해졌다. 하지만 살고 싶었다. 살고 싶어서,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자고 있는 어머니의 마나를 끌어당겼다.

그건 죄악감마저 느껴졌다. 그렇지만 당장에라도 얼어 붙을 것 같은 추위는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살아간다는 것이 그토록 끔찍한 것인지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그런 슬픔 속에서 열망은 더더욱 커져갔다.

‘이렇게… 이렇게 간신히 살아 있는데, 반드시 나는 멋진 최후를 맞아야지. 절대 얼어 죽지 않을 거다.’

독심이었다.

어머니에게서 훔칠 마나도 바닥, 정신마저 흐릿해지는 추위 속에 또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어머니의 몸을 타고 마나를 뻗쳐, 대지의 마나를 흡수했다.

흙 속에 숨어 봄을 기다리는 씨앗들의 마나도 삼켜버렸고, 하찮은 미물들의 것도 모조리 끌어당겼다. 더욱 깊숙히, 더 넓게,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주변의 모든 마나를 흡수하며 겨울을 버텼다.

그리고 봄이 되었다. 어머니는 제대로 깨어나지 못했다. 잎눈과 꽃눈은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시체가 되어버린 어머니에게 매달려 있었다. 없는 눈으로 눈물을 흘렸고, 없는 가슴이 찢어졌다. 그래도 살아 나갔다.

봄의 기운에 피어오른 잡초들도 모조리 말라버렸다. 복숭아가 살아 남기 위해선 그런 방법 밖에는 없었다. 분지는 죽음을 담는 그릇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버티며 가슴은 찢어져 가고, 눈물은 완벽히 말라 버렸다. 그리고 끝내 한 녀석을 발견했다. 그게 바로 지존이었다.

'그렇게 된 거지. 거의 한계였는데, 마침 네가 지나가는걸 알아채서 다행이야.'

복숭아가 안심한 듯한 말을 했다.

망상이라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만약, 자신이 미친 거라면 이전에 들었던 재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바드(Bard)같다더니, 내 상상 속에서 나온 이야기라면 확실히 재능이 있군.'

혼잣말 같은 생각이었다. 복숭아는 아무래도 생각을 읽는 재주가 뛰어났는지 참견을 했다.

'별로 재능 없어.'

'너에게 한 말 아니다.'

'그래. 그런데 넌 대체 누구지? 날 먹을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마지막 가는 길이 행복할 것 같아.'

'난 이 몸에 들어오기 전, 중원에서 지존이라 불렸던 사람이다. 무림에 속한 자라면 모두 날 두려워 했었다.'

'그래서 그런가… 내가 널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하지? 네 마나는 엄청 이질적이야. 네가 지나갈 때 확 알아챌 수 있었지. 몬스터의 습격 같은 건 없었나?'

복숭아가 말한 대로, 여기까지 오는 여정은 생각 외로 험했다. 첫날부터 고블린 무리를 만났고, 그 무리에는 오우거도 들어 있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동굴은 서큐버스가 은거하고 있는 곳이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악운이 강했다.

'습격이 좀 많았지.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나?'

'내가 널 찾아낸 거랑 비슷한 이치야. 다른 몬스터도 널 쉽게 찾아낼 거고, 널 잡아먹고 싶어할 거다. 네 마나는 흔한 느낌이 아니야.'

'내공… 이라는 것이 서역에서는 마나라고 불리는 것인지… 살짝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런 거겠나?'

'그래, 그렇겠지. 내공인지 뭔지인지 독특한 마나를 뿜어내는 놈에게 먹히다니 영광이군. 자 내가 말하는 대로 몸을 움직여 봐.'

복숭아는 지존의 위치를 좌표평면상에 위치한 점처럼 미세하게 바꾸고 싶어 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지존은 그의 뜻대로 걸음을 옮겼다.

'왼쪽으로 한걸음 더. 아 됐다. 거기 가만히 서 있어. 음… 그리고 내 몸을 먹는건 좀 빨리 하도록 해. 한 삼일 안에는 먹어야 할 거야. 난 빨리 상할 것 같아.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분명 너한테 도움이 될 테니 감사하고. 물론 나도 감사하고 있어. 그럼…'

복숭아는 마나를 응축시켜 꼭지 부근에 이동시켰다. 마나가 뒤틀리며 물리력을 생성했다. 꼭지가 떨어지고, 그는 지존의 정수리에 정확히 떨어졌다.

툭.

'크흐흐… 사람 머리통에 한번 쳐박고 싶었거든. 소원을 이뤘네! 아아… 갑자기 확 졸리네… 이봐… 고맙다… 먹어줘서…'

그의 음성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더니 결국 꺼져 버렸다. 그 이후로는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 보니 일행들은 모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루돌프는 벌써 잠에 들어 있었다.

지존은 울룩불룩 못생긴 복숭아를 옷으로 쓱 닦고 짐가방에 넣었다. 복숭아의 뜻대로 상하기 전에 먹을 생각이었다.

비록 1년여간을 살아 있던 존재이지만, 평생을 먹히기 위해 노력한 복숭아였다. 그 일념으로 살아남은 녀석의 꿈을 좌지우지 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살인도 수백번 했는데, 괴이한 복숭아의 유언을 들었다고 마음이 싱숭생숭 해지다니.

청년의 몸으로 살아가는 건 참 새로운 일들이 많았다.

피오오!

그리핀의 음성이 다시 한번 하늘을 가득 채워나갔다. 그 소리에 누워 있던 사내들은 하나 둘 눈을 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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