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30화 (30/56)

〈 30화 〉 기다려.

* * *

그녀는 팡틴 정도 되는 체구였다. 아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의기양양했을 때의 체격과는 사뭇 달랐다. 뿔과 날개 같은 추한 것들이 사라지니 여느 여인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평범함 이상의 미색을 가지고 있었다.

“릴리아. 갑자기 왜 내 종이 되겠다 한 거냐?”

그녀는 여전히 흐느끼며 대답했다. 눈물이 계속 볼을 타고 흘러 턱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 방법 밖에는 돌려 드릴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녀는 젖가슴과 밑을 가린 채 일어서 아랫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독특한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대략 자궁이 위치한 자리였다.

“계약을 하면 이 문양이 생기고… 그래야 주인님께 마나를 드릴 수 있어요…”

젖가슴을 가린 손의 새끼손가락은 부러져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심한 방식으로 그녀를 윽박지른 것은 아닌지 후회스러웠다.

“너는 몬스터이니 상처는 그런 손가락은 금방 낫는가?”

“사내의 정기를 취할 수만 있다면 금새 나을 수 있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니, 팔을 움직일 때 움찔거리며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갈비뼈 부분 피부가 푸르스름하게 변하고 있는 것도 보였다.

“부러졌나…”

“...”

“그것도 인간과 달리 금방 나을 수 있는 거겠지?”

“네…”

그녀의 종족 이름은 서큐버스였다. 인간의 기준에서는 몬스터로 분류되었다.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을 몬스터라고 표현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으나, 마나를 충분히 축적한 그녀들은 몬스터인 것이 분명했다.

뼈가 부러져도 마나만 충분하다면 며칠만에 말끔히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릴리아가 마나를 얻을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 끝에 더욱 흐느껴 눈물을 흘렸다.

정적 속에서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 소리에 또 다른 소리가 추가되었으니, 그건 바로 프레데릭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였다. 돌맹이를 밟으며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그에게선 분노가 서려 있었다. 마비독이 일으킨 피로감과, 박쥐에게 피부가 찢어진 것에 대한 짜증이 그 분노를 만들었다.

“검은... 머리... 저 썅, 년이.. 뭐라고... 하던가?”

“이제 내가 주인이라고 하는군.”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굳은 혀에서 나오는 어눌함이 분노에 찬 광기를 더욱 무섭게 느끼게 했다. 그는 역수로 쥔 단검을 쥐고 있었다.

“칼로 뭐 하려고?”

“찢어… 야지…”

“... 그건 그만 둬.”

“미, 쳤나? 몬스터… 는, 죽여야… 지…”

그는 언제 마비독에 중독되었냐는 듯 잽싸게 그녀를 향해 뛰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지존의 뒤에 쪼그려 앉아 벌벌 떨었다.

“히이이익! 살, 살려, 주세요! 흐으윽…”

“이리와! 이… 개같은 년!”

지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만 둬.”

“닥쳐!”

달려드는 프레데릭의 멱살을 잡았다. 꽉 잡은 손을 비틀자 프레데릭의 옷이 조여들며 목을 파고들었다.

“으윽! 쿨럭!”

“그만 두라고 했잖아.”

지존은 멱살이 잡힌 채 분노를 삭히지 못하는 그에게 몇가지 혈도를 짚었다. 프레데릭은 눈을 부릅뜬 채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걸 보더니 더욱 놀라 부들거렸다.

지존이 그녀를 건드리자 놀란 고양이라도 된 듯 몸을 들썩이며 놀랐다.

“이 주변엔 너 이외에 너 같은 몽마는 없지?”

“흑… 네…”

“그러면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다. 루돌프라는 녀석이 있어. 그 녀석이 잠들었을 때 놈의 정기를 살짝만 취해라. 약 보름 정도 네가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난 다시 찾아올 생각이다. 그 때까지 이 동굴에서 잠자코 있어라. 네년이 내 종이 맞다면 내 명령은 반드시 듣겠지?”

그녀는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서큐버스와 계약한 주인이 무언가를 명령하면 그 문양에 특별한 신호가 오는 듯 했다.

“알겠습니다…”

지존은 그녀와 몇가지 대화를 나눈 뒤, 기절해 있는 프레데릭을 업고 입구 쪽으로 걸었다. 길리엄과 루돌프가 지존의 행방을 궁금해 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입구에 도착하니, 루돌프는 탈진 끝에 잠에 빠져들은 모양이었고, 길리엄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에 그는 일어나 지존을 반겼다.

“해치운 건가? 프레데릭은 괜찮고?”

“비슷해. 프레데릭은 그냥 기절한 것 뿐이야. 너무 날뛰길래 내가 잠깐 재워뒀다. 넌 몸 상태가 말이 아닌 것 같군.”

“그래... 피가 한참이나 멈추질 않더라구. 볼에선 아직도 피가 나. 근데, 비슷하다는 건 무슨 뜻이지?”

“내 종이 되겠다더군. 그리고 내공을 돌려주었다. 처음 그년, 아니, 릴리아에게 빼앗긴 것보다 더 많이 들어온 느낌이야.”

“뭐? 서큐버스가 종이 되겠다 한거야? 그럼 계약도 했어?”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나?”

“고등한 몬스터랑 계약하는 경우가 있다고 듣긴 했지. 근데 서큐버스랑 계약 했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어. 걱정되는데. 확실하게 무력화 한 것 맞지?”

“그래. 갈비뼈 몇개를 부러뜨리고 손가락 한 마디도 부러뜨려 놓았다. 이상한 짓은 더 못할 거야.”

“무섭군… 어쨌든 이제야 좀 발뻗고 잘 수 있겠어.”

한바탕 사투를 벌인 그들은 바위로 무너져 내린 입구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잠에 들었다. 참으로 무심한 네명의 사내였다.

*

“기다려.”

바위 틈새로 햇살이 들어오려 할 때쯤, 지존이 동굴 깊숙히 숨어 있는 그녀에게 가서 한 말이다.

그 말을 전하고 다시 돌아온 지존은 강한 진각을 밟더니 바위를 밀어찼다. 그렇게 세번을 걷어차니, 자갈 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입구의 바윗덩이들이 무너져 내렸다.

넷은 그렇게 말을 타고 동굴을 떠났다.

새벽녘, 마비가 완전히 풀린 프레데릭은 지존에게 말했다.

“우리 넷 다 잘 살아 있는 걸 보니 네 말이 맞았군. 어젠 네 애완동물을 건드리려 해서 미안하다.”

“그럴 만 하지. 괜찮다.”

프레데릭과 있었던 작은 마찰은 그렇게 해소되었으나, 말을 타고 한참을 가면서도 해소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루돌프 자식은 지존이 자각몽 속에서 사투를 벌일 때 방해를 해 놓고도 태연한 얼굴이었다. 사실상 그 녀석 때문에 이 고생을 한 것임에도.

“루돌프. 나에게 할 말 없나?”

“... 바람이 선선하군.”

당장에라도 뒷통수를 내려쳐 죽여 버리고 싶은 뻔뻔함이었다. 지존은 그 충동에 휩싸여 주먹을 쥐었지만, 다행히도 그 주먹이 루돌프를 향하진 않았다.

일단은 참기로 했다. 그리핀의 알을 찾아서 마을로 돌아올 때 까지는 그게 좋을 것 같았다.

사내들 사이의 정적은 칼날이 숨겨진 폭풍과 같아서, 언제 어디서 그 칼에 찔릴지 알 수 없었다. 그 칼의 주인은 자기 자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 스스로 분노에 살을 입혀가며 적의를 불태우는 것.

누군가를 미워하며 복수심을 불태우면 자신의 마음도 타들어가기 마련이다. 증오는 자기 자신도 아프게 한다.

지존의 경우, 그런 정도 까지는 아니었으나 루돌프를 바라볼 때마다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꽤나 노력을 해야 했다. 불필요한 노기는 속을 상하게 하는 법이라며.

그와 동시에 루돌프의 운명은 반쯤 정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최대한 참아 보지만, 루돌프는 아무래도 죽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새겨졌다.

몬스터를 만나지 않은 며칠간 그것이 조금씩 구체화되었다.

가뜩이나 별 말이 없는 지존이다. 그런 그가 더욱 말을 삼가니 길리엄과 프레데릭도 사뭇 말이 없었다. 루돌프는 밝은 것인지 밝은 척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들을 지껄였다.

부자연스러움도 느껴졌다.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프레데릭이 말하길, 이제 그리핀의 서식지에 가까워졌다고 했다. 길리엄은 그 말에 활짝 웃다가 움찔거렸다.

“아이, 젠장! 웃어서 입술 터졌네. 씁.”

“저런, 꽤 오래 가는데. 난 딱지도 떨어지고 대충 나은 것 같다.”

프레데릭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길리엄과 프레데릭은 둘 다 며칠이 되도록 얼굴 위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박쥐떼에 당한 곳이 하도 많아서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동굴 돌아가면 박쥐 다 잡아서 죽여 버려야겠어.”

“굳이 뭐하러 힘 빼나. 난 얼른 그리핀 알 찾아서 마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 뿐이야.”

길리엄과 프레데릭이 잡담을 하는 사이 푸른 하늘에 정체 모를 소리가 울려퍼졌다. ‘피오오!’ 하는 듯한 높은 음이었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선명하게 들렸다. 맹수의 울음소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프레데릭은 말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었다. 그는 한참동안이나 하늘을 바라보았고, 그의 말도 주인처럼 심각한 눈빛으로 하늘을 보았다.

“다들 들었나? 이게 그리핀이 내는 소리야. 운이 좋다면… 이 근처에서 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음… 말을 잘못 했군. 그건 운이 나쁜 경우다.”

“왜?”

길리엄의 질문이었다.

“준비된 상태로 얼른 알만 구해서 도망쳐야 하는데, 여기서 알을 발견했다는 뜻은… 우리가 준비도 없이 이미 그 영역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니까.”

“꽤 무서운 일이군.”

지존은 그 둘의 대화가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핀이 내는 괴조음과 함께 또 다른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프레데릭이 ‘다들 들었나?’ 라고 했을 때, 지존은 ‘남자 목소리 말인가?’ 라고 되물으려 했다. 머릿속에서 직접 말하는 것 같은 해괴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길리엄과 프레데릭은 그리핀 소리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었고, 지존은 그것이 자신만 듣게 된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목소리는 못 들었나? 남자 목소리 말이야."

지존의 질문에 길리엄은 정색했다. 가뜩이나 그리핀의 울음소리를 들어 잔뜩 긴장한 터였다.

"뭐? 농담은 그만둬 무섭다고."

"음…"

길리엄 만큼은 아니더라도 공포심이 드는 건 당연했다. 뇌속을 울리는 사내의 음성이라니. 자신이 미친 것인가에 대한 공포는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기가 허해진 탓인가. 환청이 들리는군…'

'환청 아니야.'

'...?'

'제안을 하고 싶어.'

'귀신 같은 거냐? 말 걸지 말고 꺼져라. 아니면 내가 미친 건가.'

'그런거 아니야. 대답이나 해. 내 소원이 있단 말이다.'

귀신이라면 해코지를 하던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음성엔 그의 말대로 어떤 소원에 대한 열의가 느껴졌다.

그렇다 한들, 의심을 지울 수는 없었다. 자신이 미쳐버린 것일지도 모르니, 그 음성에 대꾸하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다.

'미친 거 아니라고. 그리핀 알 찾으러 가는 거잖아? 내가 알려주는 길이 훨씬 가까울걸. 나한테 찾아와봐. 내 말이 틀렸으면 가던 길 가면 되잖아.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줄 테니.'

그 음성은 자신의 위치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꽤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뜬금없이 경로를 바꾸자는 지존의 말에 프레데릭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알겠다며 금방 경로를 바꾸었다.

지존이 말하는 방향으로 가도 그리핀의 알을 구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지존은 그 음성이 말한 것대로 근거를 제시했고, 그 근거는 프레데릭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큰 바위가 있었다. 음성이 말한대로였다.

'이제 증명 된건가? 내 말대로 바위가 있지? 그럼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와보라구.'

언덕을 넘으니 분지처럼 움푹 패인 지형이 나왔다. 그곳의 풀들은 모조리 시들어 있었다. 노랗게 질린 잡초들이 가득한 그 분지는, 꼭 죽음을 담아놓은 거대한 그릇 같았다.

그곳에 딱 하나 우뚝 솟아있는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열매 하나만이 생기를 가지고 있었고, 잎사귀며 나뭇가지며 벌레가 먹고 부패하여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정말 재수 없는 곳이네. 산불이라도 났었나? 풀들이 죄 말라 있구만."

루돌프의 혼잣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를 패죽이고 싶어하는 지존조차도 루돌프가 맞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금방 왔네.'

남자의 목소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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