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제압.
* * *
갑작스레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파드득 파드득.
새의 날개소리와는 사뭇 다른 독특한 소리였다. 날짐승이 내는 소리라는 것은 정확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두마리의 것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의 날갯짓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진군하는 군대의 말발굽 소리와도 닮았다.
“박쥐다…”
길리엄의 어깨에 반쯤 들춰진 프레데릭의 말이었다.
“박쥐라고? 위험한 건 아니…!”
파바박!
길리엄이 질문을 채 끝내기도 전, 길리엄은 졸도할 뻔 했다. 눈 앞에 순식간에 검은 그물같은 것이 펼쳐지더니 턱에 상당한 충격이 가해졌다.
눈알이 빠지고, 턱뼈가 으스러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헉! 으어윽!”
길리엄은 프레데릭은 놓친 채 넘어져 버렸다. 턱을 만져보니 다행히 제 모양껏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충격이 입에까지 전해졌는지 입술이 터져 피가 새어나왔다. 볼의 살이 어금니에 의해 찢겼는지, 입안에 피맛이 맴돌았다.
“내 귀여운 작은 친구들이야! 인사해!”
다시 한번 동굴 깊숙한 곳에서 소름끼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기분 좋게 일어나면 저런 상쾌한 목소리가 나올까. 목소리엔 즐거움과 활력이 가득했다.
“이 씨발년이…!”
길리엄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얼굴을 강타했던 박쥐는 어느새 프레데릭과 싸우고 있었다. 박쥐들은 왠만한 중형견과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
박쥐는 그의 얼굴을 감싼 채, 발톱으로 눈을 찌르려 애썼다. 프레데릭은 그것을 떼어내려 용을 쓰더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으윽…! 개… 같은… 새끼…!”
도저히 완력으로는 떨어지지 않는 박쥐. 프레데릭은 힘껏 소리치더니 아주 야만적인 공격 수단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박쥐를 떼어내려는 것을 멈추곤 도리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박쥐를 밀어넣었다.
마치 박쥐를 삼키기라도 하는 듯 했다. 그렇게 보였다면 반쯤은 맞았다. 그는 박쥐의 복부를 향해 최대한 입을 가까이 하더니 그것을 그대로 물어 뜯어 버렸다.
“찌에에엑! 끼에에에엑!”
뱃가죽이 터져버린 박쥐가 내는 최후의 비명이었다. 프레데릭은 입 한가득 내장과 가죽을 문 채 힘을 잃은 박쥐를 벽에 찍어버렸다.
얼굴엔 피가 한가득, 입가엔 찢긴 창자가 걸려 있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역겨운 그것들을 퉤 뱉어냈다.
“쓸개를… 씹었나… 역겨워… 뒤져… 버리겠네…”
“괜찮은 것 맞나?”
“안… 괜찮아… 좆같은… 목소리를 내는… 썅년을… 찢어… 죽이면… 괜찮아 질… 것 같군…”
“그래. 찢으러 가세.”
길리엄은 프레데릭을 일으켜 다시 부축했고, 몰려드는 박쥐떼를 향해 뛰어들었다. 피묻은 얼굴에 분노가 서린 눈빛을 발하며 돌진하는 두 사내의 모습은 흡사 몬스터였다.
몬스터가 인간을 죽이러 가는 것인지, 인간이 몬스터를 사냥하러 가는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
텅! 텅! 텅!
멧돼지가 문짝을 향해 쳐박는 소리가 났다. 금속과 살덩이가 맞부딪치면 그런 소리가 난다.
루돌프가 자랑하는 풀 플레이트 아머에 박쥐가 들이박는 소리였다. 박쥐떼가 날아오자마자 루돌프는 투구를 썼다. 그 덕에 박쥐들은 루돌프에게 별다른 피해를 입히진 못했다.
문제는 지존이었다. 그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탓에 박쥐들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눈을 감고 내공을 모으는 것에 온 신경을 써야 하는 상태였다. 운기조식으로 흐트러진 내공을 최대한 모아, 빌어먹을 몽마에게 일격을 날려야 했다.
“살고… 싶으면…! 나를 지켜라!”
결가부좌 한 채, 자신의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박쥐를 낚아채 터트려 죽이면서 외친 말이었다. 그는 그 동작만으로도 지쳐 죽을 지경이었다.
단단한 철갑옷 덕에 아무리 공격을 당해도 치명상은 입지 않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돌프는 얼른 지존을 향해 뛰어 몰려드는 박쥐를 향해 맞섰다.
그것은 용맹이라기보단 공포를 잊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눈 앞에서 지존이(재수 없는 원숭이 새끼라 할지라도)박쥐떼에 찢겨 죽는 꼴을 본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롱소드를 휘적거리며 박쥐떼에 대항했다. 둔하고 느릿하기만 한 검술은 박쥐 한 마리를 가르는 것도 힘겨웠다.
수십번을 플레이트 아머에 몸을 쳐박았다. 박쥐들은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악한 놈들은 철갑옷의 결합부가 약점이라는 것 또한 알아챘다. 녀석들은 거친 소나기가 내리듯 루돌프를 향해 쏟아졌다.
루돌프가 자랑하는 철갑옷도 한계에 다달았다. 그의 체력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반해 박쥐는 너무나도 많았고, 지치지도 않았다.
“허억… 헉… 허억… 이젠 더 이상 안돼…”
루돌프 인생에서 가장 최선을 다한 수십분이었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루돌프를 느낀 지존은 탄식했다.
두번째 죽음이 눈 앞에 와 있는 듯 했다. 개처럼 커다란 박쥐에게 뜯겨 죽는 최후가 보였다. 일갑자가 넘는 햇수를 중원에서 살았으니 서역에서 다시 살아본 얼마간의 시간은 선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정리하려 하는 그 때, 엄청난 어지러움과 함께 눈앞의 시야가 바뀌었다.
길리엄이 몽마의 본체에까지 도달한 후, 스킬을 사용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나체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풍만한 가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매끄러운 다리만 본다면 그랬다.
복부는 근육질로 탄탄해 보였고, 낼름거리는 혓바닥은 뱀의 것을 닮았다. 이마에 커다랗게 달린 뿔은 염소의 것 같았고, 빛나는 듯한 검은 눈은 맹수와 닮았다. 등 뒤로는 시커멓고 커다란 날개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검은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는 혈관이 비추어 보였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인의 몸이었으나 동시에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것들도 공존했다.
눈 앞에서 길리엄이 사라지고 지존이 나타나니 그녀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잠시 주춤했다.
지존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간신히 모아놓은 내공을 한계까지 응축해 다리를 향해 폭발시켰다. 공중에 뛰어오르며 온몸을 돌려 뒷발차기를 했다. 흡사 날뛰는 미친 야생마의 발길질이었다.
이 공격에 실패한다면 두번째는 없었다. 생사를 건 최후의 발차기였다. 다행히 지존의 발뒤꿈치는 그녀의 명치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복부에는 뼈가 없다. 그러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상상 이상의 거대한 충격이 복부를 타고 갈비뼈에까지 도달해 그것을 깨뜨리는 소리였다.
쩍! 우지직!
“헤윽, … 허… 허으… 하으…”
그녀는 복부를 감싸쥔 채 무릎을 꿇었다. 인간이었다면 모든 내장이 짓이겨져 즉사했을 것이다. 그녀는 입을 뻐끔거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느껴본 격통에 숨조차 내쉴 수 없었다. 그녀는 눈물과 침을 흘리며 바람 새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쓰러졌다.
뒤를 돌아보니 프레데릭의 몸에 올라타 발광하던 녀석이 체념한 듯 날아올랐다. 뒤이어 수많은 박쥐떼들이 되돌아 오더니 천장에 붙어 침묵을 유지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쓰러지니 박쥐들도 공격할 의지를 잃은 듯 했다.
뻐끔거리며 움찔거리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몇분이 지나자 그녀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흐윽… 흑… 이제야 간신히… 마나를 모았는데… 이제야 언니들처럼 강해질 수 있었는데… 흐윽… 흑… 흑…”
“...”
그녀가 비록 몬스터이면서 흉악한 것들을 몸에 달고 있었지만,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뿔과 날개, 그리고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매서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더라도, 세상의 어떤 미인과도 견줄 수 있는 뛰어난 미모였다.
그런 그녀가 흐느껴 울고 있으니 사내라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절세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니, 새벽 이슬에 젖은 동양란도 그것보다는 청초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존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 그딴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존은 탈진 탓에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못한 채 지존의 손에 이끌렸다.
철썩!
채찍으로 살갗을 내려치는 소리였다. 지존이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고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내놔…”
“헉, 허윽, 흑흑… 뭘 내놓으라는 거야?”
철썩! 철썩!
그녀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지존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지옥불보다도 뜨거운 분노가 지존의 눈동자에 피어올랐다.
“내놓으라고… 내공… 훔치는 방법을 알면 되돌려 주는 방법도 알겠지?”
그녀는 엉엉 울며 대답했다.
“죽여! 죽여! 살 필요 없어! 그토록 오래 기다려서 얻은 마나인데! 차라리 죽여! 죽이라고!”
다시 한번 철썩 소리가 동굴에 울려퍼졌다. 지존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걷어찼다. 그녀라는 표현이 맞을까? 그녀는 사실 인간 여자의 형상을 한 몬스터인데. 걷어차는 지존의 동작은 그녀를 몬스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돌맹이를 걷어차듯 냉정한 발길질이었다.
“흐윽, 이제 죽일 생각이냐?”
“네년은 죽는다는 것이 참 편한 방법이라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구나. 차라리 죽는게 행복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게 될 텐데… 그래도 좋으냐? 어서 단념하고 내공을 내놓아라. 나도 이렇게 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만…”
“닥쳐! 헛소리 말고 죽여!”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지존을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지존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말로 하려 했는데… 말이 통하질 않는구나.”
지존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손 또한 인간의 것과 별다르지 않았다. 날카로운 손톱을 제외하면 곱디 고운 여인의 손이었다. 지존은 그녀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사람의 손과 똑같군.”
“가지고 노는 거냐…? 빨리 죽여…”
뚜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새끼손가락 끝마디를 부러뜨리는 소리였다.
“꺄아아악! 흐아아악! 무슨 짓이야?”
울먹이며 소리치는 그녀와 달리 지존의 표정은 누구보다 침착했다.
“사람의 손가락은 엄지를 제외하면 세마디... 손가락 관절은 총 스물여덟개가 있다. 내공을 되돌려 줄 때까지 하나씩 부숴뜨릴 생각이다. 손이 끝나면 손목. 팔꿈치. 어깨. 무릎… 사람은 관절이 참 많지… 내놔...”
그녀는 대답을 잃은채 대성통곡을 했다. 동굴이 떠나가라 엉엉 우는 소리는 구슬프기 짝이 없었다. 마치 지존이 악당이 된 것 같았다.
“대답이 없군… 그러면…”
지존이 다시 손을 붙잡고 관절을 부러뜨리려 하니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그만! 흑… 흐윽… 흐흑… 알았어… 알았다고… 주면 될 것 아니야…!”
“첫번째 관절을 부러뜨리기 전에 그랬으면 서로 편했을 것 아니더냐.”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키더니 지존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울음이 섞인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흐극.. 흐으윽… 나 움브라 아스모데우스 릴리아는 맹세합니다.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나의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니, 당신은 나의 왕이요, 주인이며, 절대자이십니다. 부디 저를 가져주십시오.”
“시종 같은 건 필요 없다. 수작 부리지 말아.”
지존은 또다시 머리채를 붙잡았다. 인내심이 바닥까지 난 참이었다. 그 이유엔 지독한 탈력감이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쓰러져 죽을 것 같았다. 굶어 죽기 직전, 어떠한 힘도 없는 끔찍한 기아 상태가 눈앞에 있는 듯 했다.
뺨을 후려치고도 대답이 없으면 새끼손가락 두번째 마디가 으스러질 차례였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흐느꼈다.
“흑.. 흐으으으… 제 마나를 가져가시옵소서. 알겠다 하시면 끝납니다.”
“... 알겠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선 푸르른 빛이 돌기 시작하더니, 갓 지은 쌀밥의 증기처럼 마나가 휘발되었다. 그것은 서서히 뭉치더니 큰 물줄기처럼 되어 지존에게 향했다. 마나의 강물은 지존에게 쏟아졌다.
그녀에게 빼앗긴 내공이 급속도로 돌아왔다. 손발이 후들거리던 것은 멎었고, 흐릿하고 탁하게 보이는 시야는 맑아졌다. 텁텁하고 쓴맛으로 가득찬 입안은 다시 침이 돌았다.
그에 반해 그녀의 체구는 조금씩 작아져 갔고, 눈빛에선 생기를 잃어갔다. 힘차게 펼쳐져 있던 날개는 힘을 잃고 수축했고, 이마에 나 있던 뿔은 어린 양의 것처럼 흔적만 있게 되었다.
탄탄한 복근은 여느 여인처럼 부드럽고 말랑한 살갗이 되었다. 맹수 같은 눈동자는 사람의 것처럼 동그랗게 되었다.
얼마가 지나니 그녀에게 빼앗겼던 내공보다도 많은 양이 그에게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 네년이 뺏어간 것 이상은 필요 없다.”
“... 알겠습니다.”
마나로 이루어진 물줄기는 아지랑이가 되어 사라졌다. 지존의 몸은 최상의 상태가 되어 가뿐하기 그지 없었으나, 그녀는 추위에 떠는 강아지처럼 떨고 있었다. 급격히 마나를 잃어버리니 탈진에 빠진 것 같았다.
지존의 몸이 회복되니 마음에도 약간의 여유가 돌아왔다. 이제서야 그녀가 인격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의 말을 하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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