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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23화 (23/56)

〈 23화 〉 소굴.

* * *

우락부락한 숫소를 사람의 형상으로 빚는다면 오우거의 덩치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거체의 주인이 머리를 잃고 쓰러지니 고블린들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포심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건 지능이 없는 것이다. 생각이 있다면 지존의 글레이브는 자신의 생명을 뜯어갈 죽음의 낫처럼 보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고블린들은 오우거의 거체가 땅바닥에 쳐박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남은 몇몇은 찝찝한 기분이 표정에 잔뜩 들어난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해내고자 할 때 소모한 시간과 재화에 사로잡혀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포기하는 것이 더 경제적인 일임에도, 노름빚에 빠진 자가 이젠 깔끔히 뒤돌아 서는 것이 옳은 때라는 걸 알았음에도.

일부 고블린은 동료가 죽어나간 상황에 분노했다. 그들은 지존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노름꾼처럼 거길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순순히 포위되어 죽을 것이지, 감히 동료를 무참히 베어 죽이다니… 짜증나는 인간 새끼들…'

고블린들은 다시 한번 지존과 일행을 향해 덤벼들었고, 그것들은 지존에 의해 손쉽게 저지당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던 어느 명석하고 잽싼 고블린이 있었다. 녀석은 나무 뒤에 살며시 숨어 기회를 엿보았다.

놈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지존과 일행들을 쏘아보더니 냅다 달려들었다.

"@#*&☆!"

"뭐야! 이 새끼가!"

길리엄이 막아섰지만 녀석은 잽싸게 땅을 구르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단검이라도 꺼내는 것인 줄 알았다.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을 것이다.

푸훅!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프레데릭에게 날아갔다. 마침 프레데릭은 루돌프의 상태를 살펴보느라 시선을 빼앗겨 있었다.

"윽! 뭐야!"

고블린의 조악한 대롱에서 발사된 독침은 프레데릭의 연한 목에 박혔다.

지존과 그의 일행이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사이 그 고블린은 숲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영리한 녀석이었다.

녀석의 녹색 피부는 이 숲이 자신들의 것임을 증명하듯 너무도 손쉽게 잎사귀 사이로 녹아 없어지듯 했다. 지존의 빠릿한 눈길로도 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길리엄은 화들짝 놀라 프레데릭에게 달려갔다. 토끼눈을 뜬 길리엄에 비해 프레데릭은 꽤 침착했다.

"이봐! 괜찮나? 목에 맞은 건가? 개 같은 고블린 새끼들이 진짜!!"

"으… 따끔하긴 한데, 괜찮겠지 뭐."

루돌프의 정신은 아직도 혼비백산한 채 돌아오지 않고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하기사 고블린의 돌도끼에 전신이 찍혔으니 제 아무리 철갑을 입었다 한들 얼얼할 것이다.

루돌프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지존은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길리엄은 지존이 화가 나 루돌프를 찌르기라도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지존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칼 깨끗한 칼이야. 어디 맞았나? 보여줘."

지존이 루돌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한들 아직 죽일 생각은 없었나보다. 그는 루돌프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대신 프레데릭이 독침을 맞은 부위를 물었다.

"으… 욱씬거리네. 여기."

프레데릭이 손가락으로 턱 밑을 가리키자 지존은 단숨에 그의 살을 쨌다. 프레데릭이 놀라 움찔 하는 것이 멈추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열십자로 째진 프레데릭의 살거죽에선 분홍빛에 가깝게 변한 피가 흘러내렸다.

"으윽, 뭐야? 무슨 짓을 한거야 검은머리?"

"독을 빼야지. 안 그러면 위험할 수도 있다. 팔 다리도 아니고 목인데, 자칫하면 큰일날 수가 있으니.”

지존은 말이 끝나자 마자 프레데릭의 목을 물었다. 피를 빨아내기 위해서였다. 마치 흡혈귀가 빠는 모양처럼 되었지만 별 수 없었다.

“이봐 그럴 필요까진 없어. 조치를 해준 건 고맙다만…”

“독 앞에 장사 없다네 프레데릭.”

지존은 붉은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 프레데릭은 자신의 건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벌떡 일어났다.

“그래봐야 고블린들이 쓰는 독일텐데. 그런 조잡한 독 따위 통하지 않, 않,, 어? 혀가, 혀 윽, 매비, 비비 으, 막, …”

“...”

프레데릭은 폭삭 주저앉더니 뭔가 말하려 애썼다. 아무래도 혀와 입 근육이 마비되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 했다. 목도 빳빳히 굳어선, 혈관이 불거졌다. 다만 말을 제대로 못할 뿐, 프레데릭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마도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좆됐구나…”

길리엄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탄식했다. 루돌프는 그 답지 않게 프레데릭을 부축하여 말 위에 올리려 애썼다.

“괘,, 괘,, 괘안,... 괘안아…”

지존과 길리엄, 루돌프는 그를 들어올려 말 위에 묶었다. 묶이는 와중에도 그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건 달리 없었다. 하룻밤이 지난 뒤 회복되기만을 바랄 뿐.

해는 다 떨어져 버렸다. 지존과 일행들은 말 없이 천막을 거두고 프레데릭에게 물을 먹인 뒤 말에 올랐다.

밤에 숲속을 움직이는 건 방향을 잃을 위험이 크기에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프레데릭이 혹시라도 낙마하지 않을까 살피며 한밤의 숲을 나아갔다.

*

밤중에 우거진 숲속을 다니니 시각이라는 감각이 올바르게 있는 상태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딜 봐도 똑같아 보였다. 아까와 같은 장소를 다시 한번 지나치는 듯한 기시감이 소름끼쳤다. (*기시감: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데도 언제 어디선가 이미 경험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

그러던 중 동굴을 발견했다. 깊은 동굴처럼 보이진 않았다. 길리엄은 안도했다. 항상 똑같은 것만 같은 수풀을 바라보다 이색적인 무언가를 발견한 탓이다. 최소한,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다는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이다.

“으, 으아, 으으, 흐으.. 으.”

“이봐 프레데릭. 안심하고 있어. 오늘은 여기까지 이동하면 될 것 같군. 존,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마땅한 곳이 없군. 오늘은 여기서 자야겠어.”

루돌프 또한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잔뜩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자니 그를 모험에 데리고 온 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시 기고만장하고 예의 따윈 옛날 옛적에 모닥불에 구워 먹은 것 같은 녀석이 잠자코 있으니 속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프레데릭은 말에 내려 와서도 혀를 굴리려 애썼다.

“이이 이이 도으 이, 으이…”

“프레데릭. 일단 다른 걱정은 잊고 푹 쉬게. 중독된 상태에서 자꾸 용을 쓰면 안 좋아.”

지존은 프레데릭의 맥을 짚어 보았다. 규칙적으로 맥동하는 심박은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얼굴 근처에 횃불을 가져다 대고 눈동자를 바라보니 홍채의 수축 또한 문제가 없었다. 안색도 생각보다 괜찮았고 손톱을 눌렀다 떼어도 금새 분홍빛으로 돌아오는 걸 보면 혈액순환 또한 나쁘지 않은 상태인 것 같았다.

지존은 의술에 정통한 편은 아니었지만 옛적에 사천 지방에서 만난 강호들 덕에 독에 대한 지식은 조금 있었다. 그들에게 배운 대로 프레데릭을 진찰하니 목숨이 중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지식이 만일 틀렸다 할지라도 무언가 조치를 해줄 방법은 없었지만.

“길리엄, 일단 눈좀 붙이게. 난 잠깐 주변을 살피고 올테니.”

“그렇잖아도 뻗기 직전이었지. 그럼 먼저 좀 쉬고 있을게.”

지존은 잠시 말 위에 올라타 동굴 근처에서 별을 바라보았다. 별을 보며 대강의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혼란한 머릿속을 식히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별자리는 중원의 것과 달랐다. 피에르가 한번 읊어준 별자리에 대한 지식을 잊지 않고 되돌아보았다.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팡틴과 로즈, 비비안느가 떠올랐다. 그녀들은 하늘을 수놓은 별들보다 더 빛나고 아름다운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중원에서 지니고 있던 몸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강대한 내공을 지니고 있던 지존이었으나 세월은 세월이었다.

시간을 버텨내는 장사는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몸은 혈기가 흐르는 새파란 청년의 몸이었다. 반가운 감각이었다.

‘프레데릭이 독에 빠져 고생하고 있는데 여인들 생각이나 하다니. 나도 참 변했군. 아, 변하긴 변했지…’

지존은 허탈한 듯한 미소를 띄며 동굴 안으로 되돌아갔다.

길리엄은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고 있었고, 루돌프는 갑옷을 벗지도 않은 채 뒤돌아 누워 있었다. 프레데릭 또한 차분한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있었다. 지존도 그들을 따라 눈을 붙이기로 했다.

꿈을 꾸었다.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꿈이란 것이 늘 그렇듯이. 그러나 이번 꿈은 무언가 묘한 것이 있었다.

향기가 언제 이토록 다채롭게 느껴졌었던가,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이 원래 비단결처럼 부드러웠었던가.

지존은 꿈 속에서 무언가 증폭된 듯한 감각을 느끼며 길을 걸었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중원의 건물 양식인지, 서역의 풍경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곳이 마을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의구심 또한 들지 않았다. 마을이란 본래 이렇게 생겼던 것처럼 자연스레 다가왔다. 마을에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옆에 누군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그것 또한 상관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런 꿈이었다.

바람은 서서히 따뜻해지며 몸을 휘감았다. 바람은 매혹적인 향기를 담아 왔다. 그것은 콧속을 타고 뇌를 간질였다. 몽롱한 듯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손에는 어느 순간 타인의 손을 잡고 있는 감각을 느꼈고 눈 앞에는 여인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마을이 서역풍의 모양인지 또는 중원의 것인지 알 수 없던 것처럼 그녀도 인종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녀의 피부는 투명하리만치 햐얬으면서 태초의 공허만큼 검었다. 그것 또한 아무렴 상관 없었다.

“기다렸어 자기. 왜 이제 와?”

“...”

“정말이야. 항상 보고 싶었어. 항상 당신 품에 안기는 것만 생각 했는걸.”

“...”

“따라와줘 자기. 따라와줄 거지? 자, 내 손을 놓치지 마. 좋은 곳으로 갈거야. 행복한 곳으로, 당신과 나밖에 없는 곳으로.”

“넌 누구지? 난 당신을 아는가? 여긴 어디고?”

그녀는 지존의 입에 가녀린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쉿, 자기, 그게 중요해? 뭘 망설이는 거야? 난 당신을 계속 기다려 왔는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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