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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22화 (22/56)

〈 22화 〉 오우거.

* * *

기분 나쁜 음성이 점점 커져갔다. 인간의 귀로는 도통 알아듣기 어려운 해괴하고 췩췩거리는 발음이었다. 고블린 무리들이 코 앞에 와 있다는 뜻이었다.

소름끼치는 말소리들이 사방을 울리니 건장한 사내들이라도 겁먹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장에서 북을 울려 사기를 올리고 적의 기세를 꺾는 것처럼, 췻췻거리는 고블린들의 소리는 그런 역할이 되었다. 이것을 의도하여 일부러 취익거리는 기괴음을 내는 것이라면 고블린의 지능이 결코 낮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프레데릭은 무언가 중얼거렸다. 상대방을 저격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기도문 같은 웅얼거림이 끝나자 그의 손가락이 활시위를 놓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일었다. 살을 꿰뚫고 단단히 박히는 소리가 났다. 우거진 풀숲 탓에 화살이 어디에 박혔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소리만으로 자신이 고블린 하나를 절명시켰다고 확신했다.

“한놈 잡았다…”

알아챈 것은 지존도 마찬가지였다. 뼈 사이를 지나쳐 장기에 구멍을 내며 살점에 쳐박히는 둔탁한 소리. 프레데릭은 소리만으로도 고블린의 위치를 파악했다. 훌륭한 사수였다.

“활솜씨가 상당하네.”

“고맙다. 검은 머리.”

“화살이 부족하겠군…”

“...”

프레데릭과 지존의 말이 끝나자 마자 췻췻거리는 소리에서 고함으로 바뀌었다.

“@#@@! 취아악! 캬아아악!!!”

고블린들이 사방에서 뛰쳐나왔다. 고블린들의 역겨운 체취가 코를 비뚤어지게 할 정도였다. 한두마리도 아닌 수십, 백여마리의 큰 무리였다.

루돌프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마구 칼부림을 했다.

“으아아악! 꺼져! 고블린 새끼들! 내가 누군지 알아!!!”

길리엄은 허공을 가르는 루돌프의 헛짓거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길리엄은 루돌프와는 쌓아온 경험들 자체가 달랐다. 루돌프의 커다란 체격과 고급스런 장비 탓에 일대일 검술 실력은 비슷할지 몰라도, 몬스터를 상대하는 점에서는 길리엄이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길리엄은 깊은 호흡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를 더욱 견고히 잡았다. 그의 간격에 들어오는 고블린은 즉시 목이 떨어질 것이다.

사아악.

번개보다도 빨랐으리라. 길리엄의 멋드러진 롱소드가 수평을 갈랐다. 대지와 하늘의 지평선을 따라 갈라 버릴 것 같은 기세의 호쾌한 검놀림이었다.

고블린 둘의 머리가 제 몸을 잃고 떨어졌다. 그 모습을 목도한 루돌프는 더욱 길길이 뛰며 칼을 휘둘러댔다.

“끄아아악! 프레데릭! 이거 괜찮은 것 맞지?”

“... 안심하시죠.”

프레데릭은 대답하기도 귀찮아 보였지만 루돌프의 말을 무시하진 않았다. 화살을 쏟아내면서도 고용주를 안심시키는 프레데릭은 참된 고용인의 표본이라 할 만 했다.

지존은 길리엄과 프레데릭의 실력을 보고 안심했다. 하지만 걱정거리는 많았다. 타고 온 말들이 다치면 큰일이었다. 길리엄과 프레데릭을 등지고 말을 보호하기로 했다. 길리엄과 프레데릭은 등을 맡길만한 실력이었다.

그렇게 판단하기가 무섭게 고블린들이 지존을 향해 달려왔다.

“%$$$!!! **$%*!”

“#$%$%&!!!”

글레이브에게 드디어 피맛을 보여줄 때가 왔다. 지존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주먹과 다리로 패죽이는 것과는 다른 감각을 느낄 때다.

절미(味). 본래 요리인들이 쓰는 말이다. 육질을 가를 때 검날을 따라 올라오는 감각을 뜻한다. 맛있는 감각이다. 절미를 느낄 때였다. 힘줄과 뼈를 빗겨가며 근육과 혈관을 끊어내는 선명한 감각. 거울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는 글레이브의 칼날은 무엇보다도 적의 생명을 끊어내는 데에 진미를 맛보게 해줄 것이다.

지존은 뛰쳐올랐다. 손잡이로 땅을 찍었다. 숲의 부드러운 대지는 목봉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그와 동시에 창에 올라타며 몸을 휘돌렸다.

고블린의 내장을 향한 뒷발차기였다. 흥분한 야생마가 맹수의 턱을 깨부수는 뒷발차기와도 닮았다. 맹수의 턱 대신 부숴진 것은 고블린의 위장이었다.

명치를 향해 정확히 들어간 뒷발은 통쾌한 파열감을 느꼈다. 고꾸라져 피를 게워내는 고블린의 턱에 글레이브의 손잡이가 강타했다.

벽돌 깨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목은 돌아가 버렸고, 놈의 목숨도 끝나 버렸다.

동료가 죽어 버리자 고블린들은 더욱 흥분해 들이닥쳤다. 조악한 돌도끼를 치켜들고 돌진하는 녀석들. 지존은 대각선으로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그 한번의 동작으로 네마리의 고블린이 운명을 달리했다. 제일 왼쪽에서 공격했던 놈은 목과 어깨가 떨어져 나가 버렸고, 가장 오른쪽에 있던 녀석은 뱃가죽이 터져 버렸다.

차라리 단숨에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녀석은 쏟아지는 자신의 내장을 다시 담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렸다.

지존은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다. 극도의 공포심에 떨며 죽음을 기다리는 녀석을 끝내주고 싶었지만, 이미 쓰러진 녀석에게 신경을 쓸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 또한 아니었다.

놈들은 물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풀숲의 녹색 빛깔과 놈들의 피부색은 묘할 정도로 닮았다. 계속해서 들이닥치는 녀석들 탓에 모두들 혼란스러웠다.

나중에는 숲 전체가 고블린의 피부처럼 착각될 정도였다. 녹색 강물처럼 쏟아지는 녀석들은 하나 하나 증발하며 빗물이 되었다.

피의 비였다. 글레이브가 놈들을 도륙하며 온갖 곳에 피를 뿌렸다. 말들은 자신의 얼굴에 튀는 피의 소나기들에 잔뜩 겁을 먹고 발길질을 해댔다. 다만 지존이 타고 왔던 말 만이 투레질을 하며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다.

과연 등에 지존을 올릴 만한 명마였다.

지존이 말을 지키느라 신경을 쏟고 있는 사이, 고블린들은 무리의 최약체를 공략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건 루돌프였다.

루돌프를 에워싸고 돌맹이를 던져대며 그를 포위했다. 루돌프는 여전히 칼을 허우적댔지만 그의 칼날은 누구의 살점도 베어내지 못했다.

“으아악! 살려줘!”

루돌프는 잽싸게 투구를 썼다. 그건 좋은 선택이었다. 고블린들의 조잡한 무기로는 투구를 박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의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화살을 쏘아대던 프레데릭은 포위된 루돌프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당장 눈앞에 달려드는 고블린을 대처하기만도 버거웠다. 그건 길리엄 또한 마찬가지였다. 포위된 루돌프와 자신의 위치를 바꾸는 ‘바디 체인지’ 스킬을 쓸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건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내심 루돌프가 고블린들에게 두들겨 맞는걸 말리지 않고 싶기까지 했다. 건방진데 예의도 없고 실력까지 없는 녀석이 몬스터에게 죽는 것은 결국 자기 책임이 아니던가. 그 누구도 그와 함께 모험을 하자며 부추긴 사람도 없었으니.

지존은 루돌프에게 눈길 한번을 주곤 몰려드는 고블린들을 마구 베었다. 루돌프는 결국 겁에 질려 콩벌레처럼 바닥에 웅크렸다.

풀 플레이트 아머의 방호력은 그가 자랑하던 대로 상당한 수준이었다. 고블린들의 조잡한 돌도끼와 쇠붙이로는 루돌프에게 이렇다 할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쇳덩이를 때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소음 속엔 루돌프의 비명도 있었다. 결국 프레데릭은 활을 쏘다 말고 단검을 꺼내 루돌프의 위에 올라탄 고블린들을 마구 찍었다.

그는 활솜씨도 상당했지만 완력이며, 날붙이를 다루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루돌프를 돕기 위해 분주히 칼을 놀리던 프레데릭이 순간 동작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오우거의 등장이었다. 이변을 눈치챈 지존도 얼른 루돌프를 뒤돌아봤다.

“흐아악! 이… 이건 뭐야?”

“진정해요 루돌프! 일단 일어나서 칼을 잡아요!”

프레데릭은 루돌프를 일으켜 칼을 쥐어주었다. 오우거는 사람 몸통만한 나무토막을 들고 루돌프를 향해 후려쳤다.

“아이 씨! 이거 쓰기 진짜 싫은데!”

길리엄이 소리쳤다.

“바디 체인지!”

그의 스킬 사용과 동시에 루돌프와 길리엄의 위치가 바뀌었다. 루돌프를 향해 휘둘러졌던 나무토막은 길리엄의 얼굴을 부숴 버릴 듯 눈 앞까지 와 있었다.

“이이익!”

길리엄은 급히 몸을 틀음과 동시의 오우거의 손목을 노렸다. 사람이었다면 그 손목은 깔끔하게 절단되었을 것이다.

썩은 나무 둔치에 검격을 날린 감각이었다. 칼날은 오우거의 힘줄과 뼈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두꺼비 피부 같은 오우거의 살갗에 한 줄기 칼자국을 냈을 뿐이었다.

길리엄의 머리통을 박살낼 작정으로 휘둘러진 나무토막은 궤도가 틀어져 그의 어깨를 스치고 땅에 쳐박혔다. 조금이라도 덜 움직였으면 어깨뼈가 부숴져 불구가 되었을 것이다.

프레데릭은 오우거가 당황한 틈을 타 검을 놈의 가슴에 꽂았다. 잘 연마된 단검조차 오우거의 바위 같은 갈비뼈 틈을 파고들 수 없었다. 가슴에 단검이 꽂힌 오우거는 더욱 흥분하며 주먹질을 해댔다.

프레데릭과 길리엄은 죽지 않기 위해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우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방법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고개 숙여!”

지존이 소리쳤다. 급작스레 그가 왜 그런 주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급박한 목소리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지존의 글레이브가 큰 반원을 그렸다. 오우거는 예상 밖의 공격에 멈칫거리더니 다시 광분하여 공격했다.

글레이브는 분명 길리엄과 프레데릭의 머리 위로 궤적을 그리며 오우거의 복부를 베어냈다. 그러나 아까와 같이 미친 듯 움직이는 걸 보면 공격이 통하지 않는 듯 했다.

길리엄과 프레데릭은 그 사실을 알아채고 공포에 질렸다.

“젠장..! 오우거를 죽일 방법은 없는 건가?”

“도망쳐야 해! 존의 공격도 통하지 않으면 답이 없어!”

길리엄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려 할 때, 오우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놈의 몸에 무언가 이변이 생긴 것이다.

술을 가득 담은 가죽 부대가 터지는 소리였다.

퍼억!

지존의 글레이브가 지나간 궤적대로 놈이 뱃가죽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검붉은 피가 새어나오며 굵직한 창자가 튀어나왔다.

“크어어어어! 우워어어억!”

놈은 당황을 숨기지 못한 채 소리를 질러댔다.

“이봐 길리엄. 그대로 서 있게.”

지존은 도망치려던 길리엄에게 말했다.

길리엄은 영문도 모른 채 서서 지존을 바라보았다.

“뭐? 갑자기? 헉! 뭐 하는 거야?”

지존은 글레이브를 단단히 붙잡고 지면에서 뛰어올랐다. 벼룩이 튀듯 순식간에 날아오른 지존은 길리엄의 어깨를 밟고 다시 한번 도약했다.

공중에서 글레이브가 또 하나의 반원을 그렸다. 소년의 몸인지라 키가 크지 않다. 글레이브의 손잡이가 길긴 하지만 성인 남성의 두배에 달하는 거구인 오우거의 목을 정확하게 노리긴 힘들었다. 길리엄의 어깨를 밟고 뛰어 올라서야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있었다.

털썩!

돌덩이가 잡초밭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오우거의 머리였다.

머리를 잃은 몸통은 피를 분수처럼 뿜더니 이내 쓰러졌다.

“@#%^$%!”

고블린들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방금 목이 떨어진 오우거는 고블린들의 상당한 전력인 듯 했다. 그걸 믿고 인간을 공격했는데, 그 희망이 꺾인 것이다.

기세가 꺾인 고블린들 중 일부는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프레데릭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시 활을 주워들었다. 도망치는 녀석들의 등에 화살이 꽂혔다.

절미를 맛본 지존은 기세 꺾인 고블린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기 시작했다. 고블린의 생명이 과일이 된 듯 했다. 지존은 과수원을 운영하는 농부였다. 농부가 과일을 따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체의 저항도 없이 고블린들의 목숨이 땅으로 떨어졌다.

“쫓아낸 것 같군.”

온몸에 고블린의 피를 뒤집어 쓴 지존이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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