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21화 (21/56)

〈 21화 〉 그리핀의 요새로.

* * *

재미 없는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대화의 대부분은 루돌프의 자화자찬이었다. 길리엄은 입에 고기를 쑤셔 넣느라 별 말이 없었고, 지존은 원체 말이 없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루돌프는 눈치도 없이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늘여갔다. 길리엄의 배가 가득 차 더 이상 고기를 씹을 수 없게 되어서야 루돌프와의 점심 식사 시간은 끝이 났다.

밖으로 나온 길리엄은 과식 탓에 걷기가 불편한 정도였다. 가난한 모험가로 살아가다 보니 진미가 눈 앞에 있으면 눈이 돌아가 버린다.

“우욱, 배 터져 죽을 것 같군. 넌 뭐 얼마 먹지도 않냐? 있을 때 먹어 둬야지.”

“루돌프 놈이 눈 앞에 있는데 입맛이 있을리가.”

길리엄은 터질 것 같은 복부를 움켜쥐며 돌연 화를 냈다.

“아 맞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못 가게 말렸어야지. 그런 놈이랑 같이 그리핀 알 찾으러 가면 골치 아파 죽어 버릴걸? 놈이 뭐 몬스터를 잡아 보기나 했겠어? 귀한 집에서 태어나서 대충 기사 수업이니 뭐니 하는 고상한 거나 하는 척 했겠지. 그 놈이 열심히 수업을 들었을 것 같지도 않고.”

“의뢰주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딱히 뭐라 하고 싶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핀에게 뜯겨 죽는 꼴을 보고 싶기도 하고.”

“대체 뭔… 그랬다간 걔네 아버지가 난리 칠걸?”

“...”

*

며칠이 흘렀다. 스미스는 지존의 몸에 딱 맞는 글레이브를 완성했다. 스미스는 운철을 섞었다며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작품을 들려주었다. 지존은 머리카락 하나를 날 위에 올려 보았고, 그건 미세한 산들바람에 두동강이 났다.

섬뜩할 정도로 잘 세워진 날이었다. 검신은 어찌나 곱게 갈았는지, 거울로 착각할 정도였다. 티 한점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끈했다.

미친 황소의 두터운 목도 단번에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지존은 그 값으로 스미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불했다. 스미스는 놀리는 거냐며 욕지거리를 했지만 이전에 그가 쇠수레 뒤켠에 동전을 끼워둔 것처럼 돈을 쥐여주고 도망쳐 버렸다.

“야! 야 이 씨브랄 새끼야! 내가 부자 될라고 칼 만드는 사람처럼 보이냐? 야! 거기 안 서?!”

스미스는 관절염 탓에 절뚝이며 지존을 쫓았지만 하늘을 걷는 듯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는 그를 따라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좋은 물건은 비싸기 마련이오! 다음에 또 보겠소!”

“이 씨팔! 너 다음에 보면 가만 안둬!”

기어코 거금 받기를 거부하는 스미스도 참 독특한 사람이다. 그걸 또 무시하며 돈을 내고 도망치는 지존도 기인이라면 기인이었다.

글레이브를 찾으러 간 날에는 길리엄과 피에르 둘 다 동행했는데, 지존이 도망치는 바람에 둘 다 뜻밖의 운동을 하게 되었다. 스미스는 지팡이를(심지어 이 지팡이는 머리에 쇠를 박아둔 흉기나 마찬가지인 물건이었다.)꺼내 휘두르며 한참을 쫓아왔다.

글레이브는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손에 딱 맞았다. 스미스의 실력 덕도 있었지만 중원에서 월도를 휘두르던 실력 또한 어디 가지 않는 것이다. 말 위에 올라 월도를 휘두르면 적들은 그저 추수꾼 앞에 선 벼일 뿐이었다. 그의 검이 가르는 궤적은 달도 베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구도 준비하고, 만전을 기하고 있으니 루돌프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곧 떠나자고.

떠나자는 말에 의외로 기뻐한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길리엄이었다. 매일같이 대련을 하자며 글레이브를 휘두르는 지존 때문에 수명이 절반은 단축되었을 것이다. 새파란 칼날이 눈 앞을 지나갈 때마다 목숨이 두동강 나는 것 같았다.

*

말 네마리, 사람 넷이 마을 대문을 나섰다. 지존의 체구가 가장 작았으나 타고 있는 말은 지존의 것이 가장 컸다. 루돌프는 그 사실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한 가지 더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있었다. 팡틴과 로즈가 지존이 문 밖을 나서는 모습을 배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로즈 그 괘씸한 년. 동방 원숭이 새끼에게 정신줄 놓은 년.’ 그녀를 보자마자 뺨을 올려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지존이 옆에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로즈 또한 부글거리는 시선을 느꼈는지, 지존에게 몇마디를 하곤 발걸음을 돌렸다.

“존, 다치지 말고 돌아와. 또 봐야지. 왕언니가 너 화원에서 살라고 노래를 부르시더라.”

팡틴도 거들었다.

“그... 있잖아 존… 나 아직도 다른 남자는 몰라… 무사히 돌아와. 알았지? 너를 좀 더 알고 싶어…”

“누가 보면 전장에 나가는 줄 알겠군. 그리핀 이라는 새대가리들 알 주우러 가는 것 뿐이다. 걱정 마라. 피에르 녀석이나 챙겨줘. 기도 한다면서 먹지도 않고 나무 아래서 수행만 하던데. 그러다 죽겠어.”

체구가 좋은 지존의 말은 자신보다 다른 말이 앞서 가는 것이 영 불쾌한 듯 보폭을 늘렸다. 녀석이 유달리 기운이 넘치는 까닭엔 대머리 여관 주인의 덕도 있었다.

장사가 시원찮은 판국에 여러 손님을 데려오고 장기 투숙까지 하는 지존은 보물과 다름 없는 존재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말에 여물을 두번이고 세번이고 넣어 주고 싶어 졌었다.

천리마를 모르는 사람은 천리마를 쇠약하게 만든다. 천리마는 식사량이 많다. 하지만 다른 말들과 똑같이 여물을 주면 비루먹은 말이 되어 버리고 만다.

지존이 용병 패거리에서 훔쳐 타고 온 녀석이 천리마는 아니었지만 그에 준하는 강한 천성을 타고난 놈이었다. 대머리 주인이 여물도 넉넉히 챙겨주니 기력이 오르기가 꼭 용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둘째로 덩치 큰 말은 루돌프의 고용인이 타고 있는 말이었다. 뽐내기 좋아하는 루돌프가 어째서 자신이 그 말을 타지 않고 고용인에게 양보했는지 궁금할 수 있다. 그런 의아함은 루돌프가 살짝 의도한 것도 있었다.

좋은 것은 자신의 고용인에게 양보하는 참된 고용자의 모습을 과시하고 싶어서였다. 아쉽게도 루돌프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으니까.

‘쯧, 애비 잘 만나서 잘 먹고 잘 사는 놈 아니랄까봐 말도 못생긴 거나 타고 다니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돌프는 인자한 자신의 모습에 취해 가슴을 펴고 당당해 보이려 애썼다.

고용인의 이름은 프레데릭. 지존, 길리엄, 프레데릭, 루돌프는 초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따르는 말들이 거슬린 지존의 말이 독단으로 뛰쳐 나간 탓에 한동안 달려야 했다. 지존은 혈기왕성한 자신의 말을 말리지 않았다. 자신이 젊었던 때에 동료들과 함께 경주를 하며 놀았던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루돌프의 못되먹은 성격이 앞서 나가는 지존에 짜증을 품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의외로 루돌프는 그런 생각까지 하진 않았다. 기사 수업이니 뭐니 큰소리를 쳤었다. 그런 고급스러운 수업을 들었지만(길리엄의 예상대로 수업을 제대로 들은 적은 없었다.)진짜 모험가와 함께 말을 달린 것은 처음이었다. 들뜬 기분이었다.

한참을 달렸다. 노을이 지려고 할 때쯤 야영을 준비했다. 나뭇가지를 주워 천을 올리는 것으로 간단한 쉼터를 만들고 있었다. 길리엄은 모험가 답게 손재주가 좋았다.

루돌프는 귀한 집 자식 아니랄까봐 그런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점잖고 말 없는 프레데릭은 멋들어지게 자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루돌프의 어설픈 동작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프레데릭은 결국 마지못해 자신이 루돌프의 몫까지 도맡아 했다. 내버려 뒀다간 천년이 걸려도 완성하지 못할 테니.

길리엄은 그런 루돌프가 못마땅하기 그지 없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지존의 표현을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루돌프는 ‘돈줄’ 이었으니까.

불을 피우려 부싯돌을 때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언어로는 들리지 않았다.

“@#@$#$@.”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지존이었다. 그는 모두들 조용히 시키곤 소리의 방향을 찾기 시작했다. 특정한 한 방향은 아니었다. 사방에서 조금씩 들리는 소리였다.

모험을 막 시작한 들뜬 기분이 가라앉아 차분해졌다. 세상 물정 모르는 루돌프도 약간은 진지한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지존과 일행이 야영지로 택한 장소는 개활지가 아니었다. 울창한 숲이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림은 잔가지들이 우거져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았다. 지존은 눈을 감고 들려오는 소리들에 집중했다.

“@#@$#$.”

“@#.”

“#@#$.”

길리엄은 길쭉한 롱소드를 뽑아 당장에라도 참격을 날릴 자세를 취했다. 프레데릭은 활시위를 걸고 입에 화살을 물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도 화살을 끼웠다. 숙련된 궁수만 할 수 있는 손모양이었다. 그는 십을 세기도 전에 화살 다섯발을 쏠 수 있는 사내였다.

“고블린 무리인 것 같다. 찾으려 해도 찾기 힘든 놈들인데, 이번엔 제 발로 찾아 오는구나. 개똥 같은 새끼들.”

지존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길리엄은 더욱 긴장했다.

“첫날부터 공격을 받을 줄은 몰랐네.”

프레데릭은 아무 말 없이 숲속에 활을 겨누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냥 지나가는 놈들일지도 모르지.”

다들 신경을 곤두세운 채 어디에서 고블린이 뛰쳐 나올지 생각하고 있었다. 루돌프는 셋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왠 나무를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마 나무 위에 올라가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꽤 추한 행동이었지만 지존과 다른 이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애당초 그는 전투에 도움이 전혀 될만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차라리 빠져 있는게 나았다.

프레데릭의 말에 지존이 화답했다.

“아닌 것 같다. 놈들은 포위망을 좁히는 중이다.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지. 점점 사방에서 가까워지는게 들려.”

잠시 생각하던 프레데릭은 지존의 말에 동의했다.

“... 그런 것 같군.”

빠각!

느닷없이 울려 퍼지는 파열음에 프레데릭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물적인 속도였다. 소리가 나는 곳을 정확히 찾아낸 프레데릭은 화살을 쏠… 뻔 했다.

그건 루돌프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소리였다. 안 그래도 덩치가 큰 편인 루돌프인데, 번쩍거리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었으니 그 무게가 상당하다. 나뭇가지가 그걸 버티지 못하고 부러진 탓이었다.

마차에 밟힌 개구리 같은 자세로 땅에 쳐박힌 루돌프를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멍청한 놈이 가만히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길리엄의 뜻대로 그를 그냥 마을에 두고 오는게 나았을 것 같았다.

“으그극… 젠장, 병신같은 나무가 다 있네.”

“...”

지존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신음하고 있는 루돌프의 대가리를 걷어차러 가고 싶었다. 고블린들이 다가오는 것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탓이다.

고블린들을 여럿 죽여본 것으로 알아낸 것이 있다. 놈들이 용을 써도 지존 자신에게 유효한 공격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있지 않다. 길리엄과 프레데릭이 있어야 그리핀의 요새를 찾아갈 수 있다. 그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롭게 서는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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