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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18화 (18/56)

〈 18화 〉 화원의 여왕. 왕언니.

* * *

“왠 소란이더냐?”

한 여인이 계단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바로 팡틴과 로즈가 말한 왕언니였다. 로즈에 버금가는 풍만한 유방이 도드라졌다.

붉은 드레스는 허벅다리 부분부터 시원하게 갈라져, 그녀의 맨 다리가 그대로 보였다. 매끈하고 하얀, 동시에 건강미가 느껴지는 도톰한 허벅지였다.

꿀 향기와도 같은 향수가 그녀의 긴 생머리에서 흘러 나왔다. 그건 남자를 꿀벌로 만드는 매혹적 향기였다. 그녀의 향수와 그녀의 체취가 어우러져 남자의 코를 찔렀다.

옆이 트인 붉은 드레스는 그녀의 가슴 계곡도 시원하게 열려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젖꼭지를 가리고 있는 드레스는 남성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다 못해 미치게 할 것이다.

지존을 놀리던 여인들은 그녀의 등장에 한껏 긴장했다.

“아 왕언니! 별 건 아니고요… 왠 동방 녀석이 문을 두드리더라구요. 별안간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지 않겠어요?”

“동방의 사내라…? 그 아이는 혹시 로즈가 말한 존이라는 자 아닐까? 이름은 말 했더냐?”

“아뇨. 이름을 물을 틈도 없이 화장실로 뛰어 가던 걸요. 곧 돌아 올테니… 돌아오면 물어 볼까요.”

“그래. 그러렴. 나도 궁금하구나.”

방광이 터지기 직전이라 지옥문 앞을 서성이던 지존이었다. 깔끔하게 청소 된 화장실에서 폭포수를 쏟아 내고 나니 천국으로 돌아 온 기분이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로즈나 팡틴에게 인사를 하고 갈까 생각이 들었다. 다시 건물로 들어가니 여인들 여럿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안녕?”

왕언니가 먼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무표정인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은 누가 봐도 참 아름다웠다.

하얀 얼굴에 검고 긴 속눈썹이 대조되어 눈빛이 더욱 고혹적이었다.

“안녕… 하시오?”

“네가 존 이라는 사내인가? 로즈를 만나러 왔어?”

여인 답지 않게 자세며 말투며 자신감이 가득 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중원에서 만난 여인들 중에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은 거의 없었다. 지존은 단번에 그녀가 왕언니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챘다..

“당신이 왕언니라고 불리는 사람 인가보군. 만나서 반갑소. 모험가 등록 이름을 존 이라고 해두었지. 지나는 김에 당신 말대로 로즈랑 팡틴에게 인사 하러 했소.”

“흐음. 화장실이 급했던 건 아니고?”

“... 실례했소. 맥주라는 걸 처음 마셨는데 그것이 사람을 이렇게 조급하게 만들 줄은 몰랐소.”

그녀는 부채를 펼쳐 입을 가렸다. 호호호 하고 웃는 그녀의 얼굴은 부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부채에 그려진 그림은 서역의 미술과는 좀 다른 중원풍의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맥주는 그런 거지. 온 김에 그러면 나랑 차나 한잔 하도록 해. 따라 와. 하고 싶은 얘기도 있었으니까.”

그녀는 지존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속이 보일랑 말랑 얇디 얇은 붉은 드레스는 그녀의 몸 곡선을 따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젖가슴과 마찬가지로 풍만한 엉덩이의 실루엣이 그대로 보였다. 그녀를 뒤따르며 그녀의 몸을 바라보니 눈 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

결국 지존은 계단만 바라보며 걸어 올라갔다.

그녀가 사용하는 방은 1층의 여인들이 모여 있는 곳 만큼이나 컸다. 하지만 1층의 그 곳은 누가 보아도 여인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기물과 꽃이 꽂혀 있는 반면에, 그녀의 방은 꼭 학자를 위한 방 같았다.

각종 책들이며, 필기구, 양피지 조각들과 양초들이 널려 있었다.

“좀 어지럽혀져 있지? 미안해. 내가 책 보는 걸 좋아하거든.”

지존에게 있어서 그건 꽤 신선한 모습이었다. 그는 매음녀에 대한 별다른 편견을 가지고 있긴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그런 여인들과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는 책과는 연관 짓기가 쉽지 않은 법이었다.

“책이라… 글을 좋아하는가 보오?”

“그래. 책에 모든 게 담겨 있지. 로즈가 피에르의 강의를 자주 들으러 가는 거 알지? 그것도 내가 로즈에게 공부 좀 하라고 해서 보낸 거야. 로즈도 좋아 하더라구.”

독서를 즐기는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중원에서 보낸 긴 세월 속에서도 글을 아는 여인은 있었어도 따로 공부를 하려고 하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인이 글공부를 아무리 한들 관직에 오를 수 없는 노릇이니, 동기 부여가 일절 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서역에서는 여인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공부의 목적은 무엇이오. 관직에 오를 생각인가? 그러기엔 이미 당신은 많은 걸 가지고 있는 듯 한데. 아랫층의 저 수많은 여인들이 다 당신의 관리 하에 있는 것 아닌가? 돈은 충분할 터인데.”

“피에르가 섬기는 현자에 대한 얘기는 나도 책으로 보았지. 그 현자가 한 말이 있어. 사람은 빵 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돈도 마찬가지지 빵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돈을 무작정 모으려 할 뿐이야. 돼지처럼. 탐욕스럽게.”

“당신은 아니라는 건가?”

그녀는 웃으며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다리를 꼬고 앉아 지존을 바라보는 눈빛은 야한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저런 매혹적인 외모를 지닌 자가 학술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또 다른 매력이 들었다.

“호호호… 남들은 어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내가 돈을 모으는 이유는 다 내 동생들 때문이지. 매음녀들의 말로가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나?”

“...”

“그녀들은 대체로 배움이 부족해. 집안이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지. 돈을 모으는 방법도 잘 몰라. 생기면 쓰고, 없으면 굶지. 그렇게 살다가 나이가 들면? 미색이 떨어지면? 병에 걸리면? 길거리에서 죽게 되는 거다. 난 우리 아이들을 다 내 친동생처럼 생각해. 그래서 돈을 모으고, 동생들을 더 잘 돌보기 위해 공부하는 거야.”

“당신은 얼굴 뿐만 아니라 생각도 아름답군.”

그녀는 붉으스름해진 얼굴을 부채로 가렸다. 부채에 그려진 산수화처럼 부채를 든 그녀의 팔은 얇고 가느다랬다.

“존, 너는 내 나이가 몇 살쯤 된다고 생각하지?”

지존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그녀의 탄력적이고 매끄러운 피부는 20대라고 해도 충분히 믿을만 했다. 하지만 말투며 목소리에서 나오는 원숙한 느낌은 앳된 20대의 것과는 달랐다.

“서른쯤 되는 것 같군. 왜 묻지?”

그녀는 다시 한번 호호 웃곤 부채를 내렸다. 미소가 흠뻑 들어간 얼굴은 아름다웠다.

“여자란 동물이란 참, 할머니가 되어도 예쁘단 말을 들으면 웃지 않을 수 없어. 내 나이는 벌써 마흔줄에 들어갔어. 아직 서른쯤 된 것 같다니 참… 빈말이라도 좋구나.”

“빈말까진 아니고… 그나저나 날 불러서 하고 싶다는 얘기가 뭐지?”

지존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에 스며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몹시 불쾌한 것이라도 떠올린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날다람쥐 잭. 로즈에게 들었지?”

“미친 변태 살인마라고 들었소.”

“솔직히 말해서 난 네가 약간 의심스럽거든. 살인마라는 건 다양한 종류가 있지. 매력적이고, 뭔가 남들과 다른 면모가 있거나… 뭐 여러가지.”

“언제 그 말을 꺼내는지 기다리고 있었소. 로즈와 팡틴의 얘기를 듣고도 그런가?”

그녀는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날다람쥐 잭’ 은 정말 기분 나쁘고 더러운 것인 듯 했다.

“팡틴은 너에게 푹 빠졌다지. 단 하룻밤을 지냈을 뿐인데. 로즈도 마찬가지야. 네가 엄청나다고 하더라. 뭔 짓을 한 거야? 동방의 이상한 미약이라도 쓴 거야? 아직 어려 보이는데? 게다가 로즈를 괴롭히던 루돌프도 한 방에 쓰러뜨렸다고? 넌 대체 뭐지? 납득이 되질 않아. 아직 한참 어려 보이는 모습은 또 뭐고?”

뭐 어디서부터 말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중원에서의 제자들이 자신이 죽을 때 주술을 걸었던 것부터? 근데 하필 서역에 있던 동방 출신 꼬마에게 혼백이 들어간 것부터?

아니 애초에 말 해봤자 믿을 리도 없었다. 도저히 말이 되질 않는 것이니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지…? 질문이 너무 많군. 하나씩 말해 주게.”

그녀는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말했다. 부채 바로 위에 있는 눈은 지존의 심장에 화살을 날릴 것 같은 기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로즈는 어떻게 홀린 거야?”

홀렸다니 억울한 마음이 절로 드는 표현이었다. 딱히 그녀를 홀려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어쩌다 보니 그녀가 옆에서 나체로 잠들어 있었고… 누가 봐도 매혹적이고 풍만한 그녀의 몸을 보고 반응하지 않는 남자도 극히 드물 것이다.

“대머리 주인장이 하는 여관에 피에르와 함께 들어갔지. 로즈는 그 곳에서 만났어. 피에르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으니 그녀가 맥주를 마시러 내려 왔지. 내 옆 자리에. 그리고 얼마 안 가 루돌프라는 녀석이 염병을 떨더군.”

“... 그 녀석도 어지간한 미친놈이야. 지 애비만 믿고 설치는 애새끼지.”

“그래 보였소. 난 여자한테 발정난 것처럼 안달난 사내새끼를 눈 뜨고 봐주기가 힘든 성격이오. 그래서 루돌프가 영 맘에 안 들었지. 시비가 붙었고, 녀석이 결투를 신청했지. 그리고 놈을 때려 눕혔소.”

“너, 도대체 몇 살이야? 너처럼 마른 사람이 어떻게 완전 무장한 루돌프를 단번에 때려 눕힌 거지?”

“말 하면 믿겠소? 지금도 날 못 믿어서 이렇게 질문이 많은 것 아니오?”

지존이 되물으니 그녀는 말 문이 막혀 버렸다. 생각해 보면, 의심 받고 있는 사내가 이렇게 질문에 잘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아.. 그래. 그건 내가 미안해. 하지만 동생들이 걱정되다 보니 누군들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지. 어쨌건 넌 곤경에 빠진 로즈를 도운 것 같군. 하여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넌 도대체 누구야?”

“나를 믿겠다는 말을 듣지 않는 이상 더 말하고 싶지 않군.”

지존의 말에 그녀는 부채를 탁 접어서 책상에 올렸다. 그녀는 꼬여 있던 다리를 풀고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그녀의 고혹적인 향기가 피어올랐다.

눈빛은 사뭇 진지해 졌다. 진심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해줘. 그러면 믿겠어.”

“거짓말 따윈 하지 않아. 그걸로 얻는 이득 따윈 없어.”

“알려 줘. 네가 누구인지.”

지존은 한참을 고민했다. 자신이 현재 깃들어 있는 소년의 몸, 몸이 지닌 기억부터 얘기해야 할지, 중원에서의 일부터 이야기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면, 이 서역의 사람들은 ‘스킬’ 이라 불리는 신묘한 요술을 흔하게 사용하는 듯 하니, 제자들의 주술부터 이야기 해도 어느 정도는 신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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