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화원.
* * *
스미스는 잘라온 장미 가지를 모루 위에 올려 고정시켰다. 지존은 그가 뭘 보고 싶은 것인지 고민을 했다.
“... 잘라 보라는 거요?”
“그래. 모양 나오나 좀 봐야 쓰겠다.”
“정말 재밌는 할아범이야. 그렇다면 칼 좀 빌려 주시오.”
스미스는 스테이크를 썰면 딱 좋을 것 같은 크기의 나이프를 가져왔다. 투박하게 생긴 손잡이가 달려 있는 나이프였다. 그 생김새에 비해 칼날의 예리함은 깨진 흑요석에 비견될 정도였다.
지존은 조그만 칼을 받아들었다. 얼큰하게 온몸을 감싸고 있던 취기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눈 앞에 적수를 맞이한 칼잡이의 표정이 되었다.
장미 가지는 모루 위에 가만히 있다. 일체의 움직임도 없었다. 마침 대장간으로 통하는 바람도 없으니 장미는 움직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계에 놓여진 것 같았다.
장미를 노려보는 지존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무생물의 영역에 들어간 듯 했다. 그의 몸을 흐르는 혈액마저 움직임을 멈춘 것 같았다.
그가 부동의 자세로 들어가고도 심장이 다섯번 수축했을 때, 칼날은 한순간에 장미 가지를 스쳐 지나갔다. 장미에게 의식이 있다면 자신이 두조각이 난 사실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가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모루 위에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
짝!
스미스가 손뼉을 한번 치니, 그제서야 가지는 목을 잃은 기사처럼 힘 없이 넘어졌다. 지존과 스미스를 지켜보고 있는 피에르는 그 둘이 무슨 해괴한 짓거리들을 하는 중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존이 팔을 뻗은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피에르에겐 눈을 한번 깜빡이니 지존의 자세가 바뀌어 있고, 장미는 잘라져 있는 상황인 것이다.
스미스는 팔짱을 끼고 단면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얇은 잔가지를 베는 것으로 검술의 실력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일반인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생 칼날을 만지고, 그것에 베여 보기도 수백번이었다. 스미스였기에 알 수 있었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는 사람의 잔념이 묻기 마련이라고.
무심(無心)이 곧 무심(?心)이다.
침침해져가는 스미스의 두 눈으로도 볼 수 있었다. 단면의 매끄러움은 막 만들어진 청동 거울보다도 깔끔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재능은 때때로 사람의 인생을 갉아 먹는다. 이것도, 무엇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의 재능은 사람의 목표를 눈 앞에서 흔든다. 언제는 정말 가까워 보여서,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손을 뻗는 순간 그건 저 멀리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버린다. 애매한 재능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으로 망가지는 사람을 수두룩하게 보았다.
스미스의 눈 앞에서 벼락 같은 속도로 장미 가지를 벤 소년의 재능은 분명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검을 쥔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것은 베어 넘겨야 하는 태산이요, 숙적이 된다. 소년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스갯소리긴 하지만 지옥에 떨어지고 싶진 않았다.
“... 자세며 잔심이며 빠지는 게 없구나. 그렇지만 이걸론 안 돼. 사람을 베는 건 가만히 서 있는 사물을 상대하는 거랑 완벽하게 다른 이야기지.”
스미스의 그 말에 지존은 웃음을 터트렸다. 칼을 내려놓자 다시금 술에 취한 모습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가 중원에서 목숨을 끊은 사람이 몇 명이었을까. 수백은 될 것이다. 전쟁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전쟁의 화마에 휩쓸려 생을 마감한 이들까지 포함한다면 수천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말하니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하하하하! 푸하하! 재밌는 할아범이 틀림 없어! 당연한 말이지. 사람을 베는 것과 물건을 베는 건 천지 차이다. 꼭 칼을 만들지 않겠다고 수작 부리는 사람 같기도 한걸?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재밌는 묘기 하나 더 보여 주겠어. 사람을 벨 것 같으면서도 베지 않는 묘기다.”
“... 재주 많은 꼬맹이에게 칼을 만들어 주긴 더 꺼려지는 법이다만.”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산다. 할아범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오. 하늘이 알 일이지.”
“...”
지존은 얇은 천으로 된 손수건을 꺼냈다. 그것을 물에 적셨다. 그는 피에르에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였다. 피에르는 싫다며 손사레를 쳤지만 지존이 몇번 더 부탁하자 한숨을 푹 쉬고 웃옷을 벗었다.
마른 체구의 피에르는 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지존은 그의 등판에 젖은 천을 올렸다. 젖은 천은 피에르의 피부에 찰싹 달라 붙었다.
“...?”
스미스가 장미 가지를 잘라올 때의 지존의 반응도 저랬다.
지존은 피에르의 등을 바라보고 자세를 잡았다. 검지와 중지 사이로 나이프를 잡았다. 살짝 손목을 건드리기만 해도 떨어뜨릴 듯 탈력된 손모양이었다.
나이프는 순식간에 반월을 그렸다. 피부색이 비칠 정도로 얇은 천은 단 한번의 동작에 두조각이 났다. 피에르의 마른 몸은 뼈의 굴곡이 도드라졌음에도 나이프는 그 짧은 순간에 굴곡을 타넘으며 천만을 잘라낸 것이다.
피에르의 살가죽은 모래알에 긁힌 것 같은 수준의 상처조차 없었다. 말끔한 원래의 모습으로 있었다. 조각난 젖은 천이 등에서 떨어지자 피에르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으악! 뭐야? 실패야? 성공이야? 젠장! 다음엔 이런거 부탁하지 마라!”
“성공이다. 피 한 방울 안 나왔으니 걱정 마라. 고맙다 피에르. 중원에서 가끔 이런걸 하며 놀곤 했지. 그 때는 몸통만한 박도(??)로 해서 좀 더 어려웠다. 이런 손바닥 만한 칼로는 훨씬 쉽다.”
지존의 묘기를 보던 스미스는 대장간의 내부로 들어가 버렸다. 지존의 칼 다루는 실력으로는 성이 안 차는 것일지도 몰랐다. 지존은 떨떠름한 마음에 그를 따라 들어갔다.
“할아범. 이 정도로는 안 되는가? 얼마나 더 대단한 걸 보여야 한단 말인가?”
“시끄러워 검은 머리 자식아.”
“고약한 영감이군. 안 된다면 안 된다고 진작 말할 일이지.”
“그게 아니다 멍청아. 작업을 시작할 거다. 말 걸지 마라. 정신 없으니까.”
“하하 그런건가. 정말 우스운 할아범이야. 가격 흥정도 안 하고 바로 작업부터 하나?”
“몰라. 알아서 줘라. 알아서 받을테니. 얼른 가. 사나흘이면 완성 될 거다. 그때쯤 돌아와서 가져가.”
“알겠소 할아범. 값은 최대한 괜찮게 치룰 것이니 걱정 말고 잘 만들어 주시오.”
“얼른 가. 정신 없어.”
스미스의 쇠수레에 실려 성문을 통과했을 때는 웃음 많고 넉살 좋은 노인인 줄만 알았는데 대장간 안에서의 스미스는 담백한 성격이었다. 때때로 괴팍한 수준까지 가기도 했다.
오랜만에 날붙이를 만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말을 탄 채로 월도를 휘둘렀던 젊은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다.
*
지존은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았다. 맥주란 건 마신 만큼 오줌이 되어 나온다. 여타 다른 곡주보다도 그 정도가 심한 것 같았다. 맥주를 처음 마신 지존의 방광은 한계치까지 팽창해 있었다.
스미스 할아범네 대장간에 도착하기 전부터 그랬으니, 한참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지금의 상태가 어떨지는 설명도 필요 없다.
“어디 소피 볼 곳 없는가 피에르? 여긴 어디든 건물이 들어차 있으니 적당한 곳이 없군.”
“음… 가까운 곳에 뭐 있을지는 모르겠네.”
“팡틴과 로즈가 있다는 ‘화원’ 이라는 곳은 어디인지 아나?”
“거기도 화장실이 있긴 하지. 근데 함부로 얼쩡거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오줌보가 터져 죽겠는데 자비를 구해보도록 하지.”
피에르는 지존을 안내했다. 그는 ‘화원’ 의 건물을 가리키고 말했다. 시선은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저쪽이다. 난 먼저 여관 쪽에 돌아가 있겠어. 이따 보자고.”
“아, 피에르 자네는 수행자라 그런 곳엔 가까이 하지 않을 생각인가 보군.”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내 얘기를 듣는 사람이 꽤 많아. 그 사람들을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다.”
“좋은 생각이네.”
지존은 ‘화원’ 의 건물을 향해 걸었다. 오줌이 가득 찬 탓에 지존의 위엄 있는 걸음걸이는 아니었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속도였다.
지존은 건물의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선 인기척이 들렸지만 반응은 없었다. 몇번을 더 두드리니 여인 몇이 문을 열었다.
팡틴과 로즈처럼 어딜 가도 그럭저럭 미인으로 평가 받을 법한 여인들이었다.
“누구세요? 음? 동방에서 오셨나? 상인? 죄송하지만 살 물건 없어요~”
“어머머 그러네? 동방에서 왔구나? 누나들이랑 놀려고 왔어? 놀아 줄까?”
한 여인이 여우 같은 미소를 띄며 지존의 머리를 만졌다. 그러자 뒤에 있던 한 여인이 그녀의 등짝을 내려치며 말했다.
“쯧! 사람을 놀리고 있어! 예! 무슨 일이시죠?”
지존은 거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중원을 호령했던 지존에게 있어서도 생리 현상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화장실…! 화장실을 좀 써야 하오.”
다급한 소년을 놀리는 것에 재미가 붙은 여인들이 말했다. 다들 속이 비치는 얇은 옷을 입고 미소를 흘리니 단순히 유희삼아 놀리는 것임에도 색기가 흘러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흐응~ 맨 입으로 화장실을 쓰겠다는 건가요?”
“로즈! 로즈의 고객이요. 로즈를 만나러 온 거요. 그 이전에 화장실을 쓰려는 것이고!”
로즈를 만날 생각은 딱히 없었다. 오줌보가 터지려 하니 아무 말이나 뱉고 보았다.
“어머머머, 이 마을에 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로즈를 아는 거예요? 로즈는 정말 인기가 많네. 그럼 들어 와요. 당신 부잣집 상인의 아들 뭐 그런 겁니까?”
“모… 모르오…!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 거지?”
여인들은 방금 전과 같이 여우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지존은 그곳을 향해 헐레벌떡 뛰었다.
화장실이라는 곳이라 하면 구석지고 어두운 곳에 있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건물 설계사가 잘못 구상한 듯 했다. 문짝도 화려한 것이, 화장실 같지가 않았다.
그곳을 벌컥 열었다.
“!”
지존은 이 마을에 와서 이것 이상으로 깜짝 놀란 적이 없었다. 그 곳은 화장실이 아닌 여인들의 침실이었다. 여우같은 표정을 지은 여인들은 지존을 놀려 먹는 것이 정말 재미 있는듯 했다.
실오라기 하나 없는 매끈한 몸매의 여인이 머리를 빗고 있기도 했고, 벽에 기대에 졸고 있는 여인도, 양피지를 읽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여인도 있었다. 어쩐지 화장실 주변에서 날 법한 고약한 냄새는 커녕 달콤하고 농염한 향이 느껴졌었다. 여인의 체취였다.
“꺄악! 남자가 들어 왔어!”
“누구야! 나가!”
“도둑 아니야?”
“변태 자식이다!”
여인들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일제히 던졌고, 깜짝 놀란 지존은 얼른 방문을 닫았다.
“젠장! 여긴 화장실이 아니잖소! 나 지금 급하단 말이오!”
여인들은 재미 있다는 듯 킥킥거리곤 화장실의 위치를 제대로 알려 주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오른쪽에 있어요. 계단 아래에.”
“이런 걸로 장난을 치다니!”
여인들은 불 붙은 닭처럼 뛰쳐나가는 지존을 보고 저들끼리 떠들었다.
“쟤 귀엽다 그치?”
“그러게? 부잣집 애 같아. 내 동생만큼 어려 보이는데 벌써 로즈를 안았다니.”
“얘, 영웅은 여자를 일찍 안대. 혹시 몰라. 백마 탄 왕자님일지도.”
여인들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꺄르르 웃었다. 지존 일평생 여인들의 유희거리가 된 것은 처음이었다. 중원 이었다면 벼락 같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겠지만, 지금 오줌보가 터질 것 같은 상황에선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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