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16화 (16/56)

〈 16화 〉 스미스 할아범과 글레이브.

* * *

“대장간은 이 동네에 둘 있어. 어느 곳으로 가는게 좋겠나? 하나는 동쪽 끝, 하나는 서쪽 끝에 있지.”

“특징이 있을 것 아닌가? 어디로 가야 할지는 그걸 알고 결정해야지.”

“맞아. 좋은 생각이다. 네 성격을 추측하기로는 동쪽 스미스 할아범네 대장간으로 가는게 좋을 것 같다. 스미스 할아범은 모험가들을 위한 무기랑 실용적인 도구들을 만들지. 서쪽 마리아노네는 의장용 무기랑 농기구, 식칼 같은걸 만들고.”

“날 잘 파악했네 피에르. 실용적인 곳으로 가야지. 근데 스미스? 익숙한 이름이군.”

피에르는 곧장 지존을 안내했다. 지존은 박자감이 살짝 안 맞는 걸음걸이로 피에르를 따랐다. 취기가 꽤 오른 탓이었다.

소년의 몸에 갇힌 이후로 처음 술을 마셨다. 소년도 술을 그다지 마셔본 적은 없을 것이다. 내성이 없는 순수한 몸이다 보니 술기운이 쉽게 돌았다. 지존의 인생 자체로써도 이런 취기를 느껴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내가권 수련에는 열중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 무예를 시작할 때는 내공이 뭔지도 몰랐다. 팔의 근육들이 뜯어져 나갈 것 같을 때까지 주먹을 질렀고, 허공에 발을 휘둘렀다.

무(?)의 신은 그런 조잡한 수련 방식도 받아주었다. 시간이 흐르자 어느새 내공이 쌓여가기 시작했고, 여러 적들을 죽이다 보니 자연스레 이름이 알려졌다.

그렇게 계속 무의 신을 향해 나아가다 보니 내가권의 무리(?理)를 깨닫게 되었다. 강권의 정수를 얻으니 유권을 알게 되었고, 종국에는 독공 같은 것 또한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다. 그의 나이 사십 즈음 되었을 때의 얘기였다.

술을 마시면 내공이 온몸에 흐르며 정신이 탁해지는 것을 자연히 막으니 취할 일이 없었다. 몸이 자연스레 독공을 시전해 버리는 것이다. 그 위치쯤 되니 암살의 위협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자제한 까닭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러한 연유로 취기란 것은 잃어버린 감각이었다. 그런데 소년의 몸으로 오랜만에 술맛을 보니 온몸이 얼큰하고 기분은 구름 위를 굼실굼실 걷는 느낌이었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에 필요한 말만 하는 지존이 명랑한 꼬마처럼 된 것 같았다. 피에르가 보기에 그건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피에르를 졸졸 따라가며 동쪽 스미스 할아범네 대장간에 가는 길에도 지존의 입은 쉬지 않았다. 그 상황이 웃긴 피에르는 그의 질문에 모조리 대답했다.

꼭 어린 동생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

“이봐 피에르, 자넨 빵이 맛있나? 난 정말 빵이 입맛에 안 맞는단 말이지. 텁텁하고 푸석푸석하고, 목이 매여서 아주 별로야. 수프란 것 없이 빵만 먹다간 목이 막혀 죽을 것 같아.”

“푸하하, 너랑 시답잖은 얘기 하니까 웃기군. 빵이야 뭐 맛있지. 난 음식 같은 것 안 가려. 알­아브에서 살 때도 그랬다. 아, 정확히 말하면 난 여기 빵이 좋아. 알­아브에서는 누룩 없는 빵을 자주 먹었는데 그건 영 씹는 맛이 없단 말이지. 그러면 넌 빵 대신 뭘 먹고 싶으냐?”

“쌀밥에 배추절임. 소고기랑 무를 같이 고아 먹어도 맛있지. 아, 떡이 생각난다. 떡은 찐 쌀을 치대서 만드는 건데… 쫄깃한 것이 꼭 힘줄을 씹는 것 같으면서도 맛있다. 그래도 여기 음식 중에 맘에 드는 건 있어.”

“그러냐? 뭐가 좋은데? 그렇담 저녁에 그걸 먹자구. 궁금하네.”

“아니야. 충분히 먹었다. 이미 먹었는걸. 맥주 말이다. 이거 참 괜찮구나. 풀내가 나는 것이, 쌀로 만든 술이랑은 꽤 달라.”

“풀내? 아 그건 홉을 넣어서 그럴 거다.”

“홉? 그건 또 뭐냐?”

“홉이란 건 말이지…”

질문에 질문이 이어졌다. 계속 이야기 하며 걷다 보니 동쪽 외곽에 있는 대장간까지 금새 도착했다. 스미스라는 독특한 할아범이 운영하는 대장간이었다.

망치로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퍼졌다. 피에르가 말하지 않아도 대장간이 근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노인이 붉게 달궈진 쇠를 때리고 있었다. 깡마른 노인이지만 망치질 하는 모습엔 힘이 넘쳤다.

깡! 깡! 따각! 깡!

“주인장! 무기를 좀 맞추러 왔소.”

“...”

스미스 할아범은 대답이 없었다.

“이보시오? 바쁜 거요?”

“...”

일정한 박자를 유지하던 망치질 소리가 살짝 틀어졌다. 노인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를 앙다물고 망치를 내려쳤다.

까강!

불똥이 사방에 튀겼다.

“씨불장 새끼야! 말 걸어서 망쳤잖아!”

노인은 땅바닥에 망치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피에르는 잔뜩 쫄아서 말했다.

“헉, 진, 진정하시오!”

“씨팔, 됐어. 무슨 일로 왔어?”

멀찍이서 지켜보던 지존이 말했다.

“할아범. 오랜만이오. 지난번에 성문에 들어올 때 신세 졌었지. 고맙소.”

대장간의 노인은 지존이 이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검문 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었다. 서로 안면도 있고 하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될 줄 알았는데…

노인은 다시 한번 화를 냈다.

“어? 야! 너 걔구나! 이 새끼야! 돈 필요 없다고 했잖아!”

노인은 그 말을 한 직후에 대장간 안쪽으로 후닥닥 뛰어 들어갔다. 피에르와 지존은 왜 저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다시 헐레벌떡 뛰어 나오더니 지존의 손을 낚아챘다. 지존의 손에 은화를 쥐여주었다. 그건 지존이 노인에게 감사 표시로 수레 뒤켠에 꽂아둔 은화였다.

“돈 받을라고 도와준 줄 아냐 임마! 아무튼 무슨 일로 온거냐?”

“그때랑 다르게 괴팍한 할아범이였군 그래. 무기를 맞추러 왔소.”

“그러냐? 뭘 맞추고 싶은데? 같이 온 사람은 누구냐? 아부지는 아닌 것 같은데.”

“어쩌다 알게 된 동료요.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창은 창인데 굽고 넓적한 칼이 창두 대신 달려 있는 걸 원하오. 중원에선 월도(月?) 라 부르지.”

노인은 턱에 손을 받친채 생각을 했다. 무기의 모양새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듯 했다.

“글레이브를 말하는 것 같은데… 용도가 뭐냐? 난 글레이브를 싫어해. 혹시 저런 걸 원하냐?”

스미스 할아범은 대장간 구석에 세워져 있는 글레이브를 가리켰다. 목봉의 두께는 왠만한 장정의 손으로도 감싸쥘 수 없을 만큼 두꺼웠다.

목봉의 압도적 두께에 걸맞게 칼날 부분의 크기도 장대했다. 넓직한 가오리가 나무 끝에 매달려 있는 듯 했다. 그건 지존이 한창 근력이 왕성할 때 수련용으로 사용했던 월도와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니 근력이 살짝 쇠한 탓에 젊은 시절처럼 멋지게 휘두를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수련용으로 사용했던 월도의 무게는 120근이나 되었다.

지존처럼 강해지고 싶었던 제자들은 어거지로 그것을 휘둘러 보려 했지만 근골만 다칠 뿐이었다. 대장간에 있는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글레이브를 보니 귀여운 제자들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저것을 달라 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소년의 여물지 못한 몸이니 저걸 들어 올릴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럴 때에는 소년의 몸에 갇힌 것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내공도, 근력도 너무나 적으니 말이다.

“아직은 무리로군. 저런 모양이지만 크기를 대폭 줄여주면 좋겠소. 모양새며 만듦새가 훌륭하군.”

노인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정신 나간 놈은 아니군. 내가 왜 글레이브를 싫어하게 됐는지 아나? 바로 저걸 만들었기 때문이지.”

스미스 할아범이 글레이브를 싫어하게 된 건 이십여년도 전의 일이었다.

한 귀족 녀석이 스미스의 소문을 듣고 무기를 맞추러 왔었다. 그 귀족은 거친 모험가들의 삶을 동경했는지, 스미스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이 세상의 어떤 몬스터도 단칼에 베어버릴 무기를 원한다네. 값은 제대로 치루도록 하지. 무조건 강하고 대단한 것으로! 자네 소문을 듣고 꽤 멀리서 왔어. 그럼, 기대 하겠네.’

스미스는 귀족의 주문을 받고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며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몬스터가 무엇일지 고민하는 것만 해도 절반의 시간은 쓴 것 같았다.

그 결론은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듣기로는 강철보다 억센 비늘을 가졌고, 근육은 사자의 것보다 질기고, 발톱은 세상의 어떤 칼보다 날카롭다고 했다.

그런 괴물을 상대하려면 어찌 해야 할까? 고민 끝에 다다른 무기는 무지막지하게 큰 글레이브였다.

어쩌다 구한 흑단색 참나무를 굵직한 목봉으로 가공했다. 대지의 마나를 흡수하며 자란 그 목재는 도끼날을 구부리고 톱니를 부러뜨리는 강도를 지녔다. 드래곤의 비늘을 깨트리고 근육을 파고들려면 무엇보다 손잡이가 튼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목봉을 다듬는 것에만 한달이 걸렸다. 수십개의 쇠톱이 망가지고 끌이 부러졌다. 그러느라 흘린 땀은 욕조를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온 기력을 쏟아 반듯하고 매끈하게 손잡이를 다듬으니, 그 다음은 칼날 부분을 만들 차례였다. 드래곤의 비늘이 그렇게 강하다는데 보통 철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소중히 간직해온 운철(??)을 사용할 때라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불을 뿜으며 대지에 떨어진 운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연소되어 불순물은 모조리 날아간다. 거기에 알 수 없는 우주의 신비가 담긴 미량의 금속들과 결합한 금속 조직은 때때로 믿을 수 없는 강도와 치밀함을 가지고 있었다.

스미스가 보관했던 운철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대장장이의 신이 있다면 그가 인간을 위해 선물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빌어먹게 단단하고 녹지 않는 씨발것(스미스의 표현을 따르자면)을 녹이느라 집 한채를 세울 수 있는 양의 목재를 태웠다.

귀족의 독촉에 시달리며 간신히 완성한 글레이브를 보여주니 그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차라리 냉담하기만 했다면 다행이었다.

귀족은 얼굴이 시뻘게져 화를 내며 말했다.

‘두달을 넘게 이 몸을 기다리게 하고 내놓은 것이 이따위 것이냐? 이걸 나보고 들으란 말이냐? 감히 귀족을 능멸해!’

귀족이 원한 것은 그저 멋드러지고 화려하게 생긴 장식용 도검이었던 것이다. 벽에 걸어두고 상상에 빠지기 좋은 그런 것.

드래곤의 목을 베어내는 멋진 자신을 떠올리며 대리만족 할 수 있는 그런 검.

귀족은 역정을 내며 스미스의 대장간을 부숴 버렸다. 물론 글레이브를 제작하느라 들인 시간과 노고를 보상해 주지 않았던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높은 신분의 귀족인 탓에 하소연할 방법도, 그의 편을 들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스미스는 그저 귀족의 뜻대로 세상의 어떤 몬스터도 베어 넘길 수 있는 최강의 무기를 만들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스미스는 글레이브를 향해 도끼를 내려쳤지만 도끼가 부숴질 뿐이었다. 버리기엔 너무나도 대단한 물건이었다. 그가 백발의 깡마른 노인이 될 때까지 대장간 일을 고집하는 것엔 그 글레이브를 사용할 수 있는 무술가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좆같은 일이 있었지. 젊을 때라 귀족 새끼들 입맛을 몰랐었어. 너는 저것보다 작게, 가볍게 만들어 달라는 걸 보니 무기 다루는 개념이 박힌 놈이군. 그런데 말이다. 난 평생 쇠를 때리면서 살았다만 너처럼 조그만 녀석에게 무기를 팔아본 적이 없다.”

“그게 무슨 상관이요 할아범?”

“상관이 있지 이 자슥아. 내가 호승심에 칼 사러 와서 모험가가 되겠느니 기사가 되겠느니 한 아색기덜을 한두번 본 줄 알어? 무사 수행이니 뭐니 하고 신나서 떠났다가 목아지 날아간 놈이 수두룩하다. 너 같은 꼬마 녀석한테 괜히 뭘 만들어 줬다가 어디 가서 너가 죽어 버리면 난 지옥갈 놈이 되는 거 아니겠냐? 내가 살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지 않단 말이다.”

“그렇담 내 실력을 증명하면 되겠소?”

스미스는 턱수염을 만지작 거리며 생각을 하더니 손뼉을 딱 쳤다.

“옳다꾸나! 그래, 증명이라. 좋지 좋아. 그러면 잠깐 기다려 봐라. 실력 한번 보자.”

그는 큼직한 낫 하나를 꺼내더니 대장간의 뒤꼍으로 갔다. 그 곳에는 장미 넝쿨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그는 굵은 가지를 찾아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낫을 후려쳤다.

갑자기 꽃도 없는 장미 가지를 왜 잘라내는지는 지존도, 피에르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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