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루돌프는 왜 의뢰를 받았을까.
* * *
“자, 그러면 내일 다시 와. 내일 같이 점심이나 할까?”
길리엄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무얼 말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듣고 있던 지존이 대신 대답했다.
“점심이라. 좋지. 내일 보세.”
“큭큭큭. 그래. 잘 가라 원숭이.”
“...”
임무 계약은 성사되었지만 루돌프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찝찝한 기분이었다. 발정난 개마냥 부끄러움도 모르는 녀석 처럼 보이는게 루돌프다. 그가 블랑코 축산 협회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짜증나는 일이다.
거기에 더해 급작스레 성사된 계약, 분명 루돌프 녀석이 무언가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을게 뻔하다. 지존은 그렇게 확신했다.
“이젠 뭐 할거냐?”
길리엄이 지존에게 물었다.
“계획은 딱히 없다. 네 스킬을 좀 더 구경하고 싶은데… 가능한가?”
“그건 안돼. 그 스킬은 마나를 엄청 쓰거든. 다른 사람한테는 별거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텐 아주 버거운 일이지. 그래서 쓰는 것도 아주 싫어해. 할게 딱히 없다면 난 좀 쉬어야겠어. 힘이 하나도 없다.”
“마나라… 내공 같은 것인가보군.”
“내공?”
“그런게 있다.”
대화를 나누던 둘은 내일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지존은 길리엄에게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오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지금은 당장 어디 눕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면서 말이다. 지존이 있는 여관까지 걸어 가다가 탈진해서 죽을지도 모르니, 자신은 바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농담이라도 너무 엄살 피우는 것 아니냐 핀잔을 하려 했다. 그 마음은 길리엄의 안색을 보고 싹 가셨다. 진짜 쓰러지기 직전의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흔들흔들 허수아비처럼 힘 없이 걷는 길리엄을 뒤로 하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여관에 피에르가 있길 바랬다. 그리핀이라는 몬스터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피에르의 설명이 필요했다.
여관으로 돌아갔지만 피에르는 없었다. 대머리 주인장에게 그가 어디 갔는지 물었지만 그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아마 어딘가 큰 나무 아래에서 기도나 명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가 있는 곳으로 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의 수행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기다리면 돌아 올테니 그 때까지 여관에 가만히 있으면 될 일이었다.
마땅히 할 일 없이 기다리고 있으니 옛 생각이 났다. 특히 제자와 동료들 생각이 많이 났다. 학개라는 녀석, 그 녀석이 주술을 써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학개 그 놈은 무공 수련보다는 항상 신비로운 무언가를 추구하며 연구에 몰두하던 녀석이었다.
온갖 놈들과 싸움을 하고 다니다 보니 어느새 마교라는 녀석들과 세력이 합쳐지게 되었었다. 그 마교에 있던 녀석이 바로 학개였다.
피에르와 금새 친해진 것도 학개 덕분일지 모른다. 항상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려는 녀석의 성격은 어떠한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는 수행자와도 비슷했다.
"앉아서 무슨 심각한 생각을 하길래 그런 표정이야?"
대머리 주인장의 말이었다.
그는 멍이 빠지지 않은 푸르스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표정이 그리 심각해 보이나? 별 건 아니고, 옛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지."
"하핫! 네가? 옛 생각을 할게 있긴 한거야? 아직 십대 초반 아닌가?"
"재밌는 옛 이야기들이 아주 많은데. 말 해봤자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군."
"난 재밌는 얘기를 좋아하지. 못 믿을건 또 뭐야. 어차피 바드(음유시인Bard)들이 떠들어 대는 것도 다 구라잖아? 적당히 구라인가보다 생각하고 들으면 돼."
그는 오크통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그곳에서 맥주를 뽑았다. 커다란 컵에 맥주가 한가득 담겼다.
그는 맥주잔을 가지고 바를 훌쩍 넘어왔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날랜 몸놀림이었다.
“자! 얘기 한번 해 봐. 맥주 마시면서 들어 주지. 요즘은 마을에 바드들이 안 와서 심심해.”
“갑자기?”
“안 될 건 또 뭐야?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아, 맨입으론 안되겠다 이 말인가? 알았어. 한잔 뽑아줄게. 뭐, 재밌으면 몇잔 더 공짜로 줄게.”
“아니, 그런게 아니라…”
대머리 주인장은 지존의 말을 들은채 만채 하며 다시 바 너머로 들어갔다.
“어이, 큰 잔? 작은 잔? 아니면 소뿔잔?”
“그런데, 서역에서는 아이들에게 술을 권하기도 하는가?”
“맹물을 마실 순 없잖아? 맹물을 마시면 배탈이 나고 발목이 붓는단 말이지. 그런데 너 아이 아니라면서. 애처럼 보이는 것 뿐이라 하지 않았나?”
“내가 그런 말도 했었나…?”
“벌써 취한 놈 같군. 몰라, 인심 써서 큰 잔에 줄테니 많으면 버려.”
“...”
주인장은 지존의 머리통 만한 잔에 맥주를 가득 따라왔다. 무척이나 심심해 보이는 주인장이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기분도 아니었다. 심심한 건 주인장 뿐만이 아니었다.
들어 주는 사람도 없고 말 한다고 그걸 믿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건 꽤나 답답한 일이다. 지존이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사회성을 띄기 마련이다.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기분이 좋긴 한데, 할 말이 많더라도 막상 말 할 때가 되면 말이 잘 안 나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둘은 한참이나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맥주가 조금 비워지고 취기가 도니 그제서야 말문이 열렸다.
가진 건 두 주먹 뿐이던 시절, 드넓은 중원의 꼭대기에 서겠다는 다짐을 했던 기억.
산적패의 목을 모조리 따버린 기억.
동료가 잡힌 성에 밤중에 몰래 침입한 기억, 그리고 가까스로 동료들과 함께 탈출한 기억.
3일간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으며 추격했던 기억.
한참이나 얘기를 했다. 맥주잔을 다 비우자 강한 취기가 몰려왔다. 과연 소년의 몸은 소년의 몸인 것일까. 어쩌면 이 소년의 체질 자체가 술에 약한 것일지도 모른다.
“엄청… 취하는군…”
“꺼억, 그러냐? 한잔 더 안 마셔? 우리 맥주가 좀 세긴 해.”
“로즈… 로즈는 얼만큼 마시나? 아무래도 여인이니… 많이는 마시지 못 하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로즈가 얼마나 말술인데, 나만큼 마실걸?”
“서역 여자들은 다들 오장육부가 튼튼한가 보군…”
“크하하하. 그런게 아냐. 그냥 로즈가 특별히 잘 마시는 거지. 그런데 뭐 얘기 더 없어? 무뚝뚝한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재담가로군. 바드같은 걸 하면 잘 하겠어. 너 싸움도 엄청나게 잘 하니까 이곳 저곳 떠돌아 다니기에도 좋겠네. 강도가 돈을 뺏으려 하면 도리어 강도를 패서 돈을 뜯는거지. 어때, 내 생각 좋지?”
“재밌는 생각이다. 근데 난 모험가로 생활을 좀 해볼까 한다. 스킬이라는 걸 좀 배우고 싶거든.”
주인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스킬?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닌데. 이봐 다들 모험가의 멋진 모습을 기대하고 그런 꿈을 꾸지만 그거 재능 없으면 못 해. 그 바닥은 무조건 재능이야. 요즘 애들은 그런걸 모르지. 넌 역시 바드가 딱이야. 얘기를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어. 나도 모르게 몰입이 되더라.”
아니나 다를까 지존의 말을 꾸며낸 얘기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꼭 믿을 것처럼 얘기해서 말하게 된 과거의 기억들인데, 주인장이 믿어 주질 않으니 기분이 상했다.
꿀밤이라도 쥐여 박고 싶어 졌다.
“아무튼 그… 뭐시냐… 네 얘기의 주인공 이름이 뭐냐?”
이걸 그냥 확… 역시 믿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짜증이 나서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벌컥 벌컥.
눈 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더 마실까 말까 고민되는 때에 피에르가 돌아왔다.
“존, 너 술 좋아하는구나? 하긴 여자 좋아하는 사람 치고 술 싫어 하는 사람 별로 없더라.”
지존의 얼굴은 벌게져서, 약간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주인장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진짜 화난 것일지도 모른다.
술에 취하니 말투도 약간 거칠어졌다.
“어어, 피에르! 왔나? 왜 이제야 오는 거야? 빨리 빨리 좀 다녀! 기다렸다!”
피에르는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느닷없이 빨리 다니라는 말에 무어라 대답할지 생각했다.
“너야말로 여관에 일찍 돌아온 것 아니냐? 그리고 왠 술을 그렇게 먹었대? 뭐, 좋은 임무라도 빼앗긴 거냐?”
“아니, 전혀. 오히려 꽤 비싼 임무를 얻었지. 그런데 말이야, 좀 기분 나쁜 사실이 있긴 해. 의뢰주의 뒤에 루돌프라는 개새끼가 있더군. 그 새끼 대체 뭐 하는 새끼야? 확 죽여 버릴까? 아니, 그 때 결투 했을 때 죽여 버릴 걸 그랬네. 큰일 치루기 귀찮아서 살려 줬더니만…”
피에르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지존의 옆에 앉았다. 대머리 주인장이 그에게 맥주 하겠느냐 말했지만 거절했다.
“술 마시면 말이 많아지는 성격이구만. 루돌프가 궁금해서 나한테 물어 보려고 기다린 거야?”
“겸사겸사. 그리핀이라는 몬스터 아나? 이번 임무가 그 몬스터 알을 찾는 거다.”
“음… 대충 설명하자면… 앞대가리쪽 반은 독수리고, 뒷쪽은 표범 비슷하게 합쳐진… 꽤나 괴상하게 생긴 몬스터지. 아 됐어. 그려서 보여주지. 주인장. 펜 있나?”
피에르는 얼룩덜룩한 걸레짝 위에 그림을 그렸다. 솜씨 좋은 그림이었다. 검정 얼룩 부분에 몸통을 그리니 일부러 채색을 입힌 것처럼 그려졌다.
“... 이렇게 생긴 몬스터야. 육지건 하늘이건 어디서든 덮치는 무시무시한 녀석이야. 성인 남자도 발에 채어갈 정도로 힘이 세다지. 목동들의 원수야. 양고기를 좋아하거든.”
“직접 본 적 있나?”
“봤지. 이 마을에 오기 전에 상인들이랑 같이 움직였던 적 있거든. 그 때 그리핀이 나타나서 다 죽는 줄 알았어. 그래도 그 때 다행히 창술을 기가 막히게 하는 사람이 있었거든. 그 사람 덕분에 살았지.”
지존은 창술 이야기가 나오니 더욱 흥미로워 했다. 자신도 창술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 그리핀 놈들은 창을 무서워 하나 보지?”
“아니, 오히려 창을 좋아하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며 피에르를 쳐다보니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것들은 반짝 거리는 걸 좋아해. 창두는 대부분 금속으로 만들잖아? 금속은 반짝이기 마련이고. 그래서 창을 하늘 높이 들고 빙빙 휘두르면 가끔 거기에 홀리는 녀석들이 있어. 나 때도 그랬지. 그 창술가가 붕붕 휘두르니까 제일 큰 놈이 창 가까이로 날아 오는거야. 젠장, 난 그때 하늘에 기도를 올렸지. ‘아, 난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말이야.”
“신기한 얘기군.”
“그치? 아무튼 놈이 우리 근처로 날아 왔을 때, 그 창술가가 말 등을 밟고 확 뛰어 오르더니 그대로 그리핀 녀석의 대가리를 후려쳤어. 아마 그 녀석 오른쪽 눈이 멀어 버렸을 거야. 어찌나 세게 쳤던지, 피가 촥 튀었어. 내 얼굴에까지 튀었지.”
“그대로 죽어 버린 건가?”
취한 상태에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재밌고 몰입되었다. 지존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피에르에게 물었다.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는 할아버지에게 푹 빠진 꼬맹이 같았다.
“물론 그리핀이 창두로 한번 후려쳤다고 죽을 맹수가 아니지. 그대로 비명을 꽥꽥 질러대더라. 그리고 잔뜩 화나서 하늘 높이 올라갔어.”
“왜 하늘 높이 올라가지?”
“그대로 내려 꽂으려는 속셈이겠지. 그런데 그 창술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어. 보통 깡다구 있는 사람이 아니더만.”
“뭘 어쨌길래.”
“그리핀이 번개처럼 내려 오고 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웃통을 홀라당 벗더니 소리쳤어. ‘야 이 씨팔 비둘기 새끼야! 자! 쪼아 먹어라 씨팔! 내 고기 더럽게 질길걸! 개새끼야!’ 진짜로 이렇게 소리 지르더라고.”
“그래서 진짜 쪼아 먹었나?”
“아니, 그랬으면 내가 여기 없겠지. 그리핀 녀석도 미친놈 고기는 먹고 싶지 않았나봐. 내려 오다가 방향을 확 틀어서 날아가 버리더라구.”
“정말… 미친놈 투성이로군…”
“뭐 그 미친 창술가 덕에 살았으니 고맙지.”
지존과 피에르는 껄껄 웃었다. 덩달아 듣고 있던 주인장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기분 좋게 맥주를 들이켰다.
얘기를 듣고 보니 창을 구비해 두고 싶었다. 알고 보니 지금까지 별다른 무장도 없이 있었던 것이다. 내공은 아직 충분히 쌓지 못했지만, 무예가 워낙 출충하니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과 싸울 때의 이야기였다. 지난번 고블린 사냥을 갔을 때에도 칼을 가져가지 않아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고블린 간이 돈이 된다는데, 배를 쨀만한 무기도, 도구도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침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무기를 맞추러 가기로 했다.
“창이라. 그리핀은 창으로 상대하면 편하겠군. 이 마을, 대장간은 어디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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