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대련과 재회
* * *
길리엄의 칼 끝은 당장에라도 지존의 목을 꿰뚫으려는 듯 힘을 농축하고 있었다.
지면에 굳건히 뿌리내린 발은 대지의 기운을 한껏 담았다. 그야말로 격발을 기다리는 대포였다. 길리먼의 체격처럼, 주인을 닮아 큼직한 칼은 바위도 깨부술 것처럼 튼튼해 보였다.
지존의 눈빛은 쥐를 노려보는 독사의 것이었다.
일체의 부동심 없는 눈으로 길리엄을 쳐다봤다. 그 시선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길리엄의 몸을 움켜 쥐는 듯 압박했다.
그렇게 서로를 노려 보길 수 분, 지존이 먼저 말을 꺼냈다.
"길리엄. 당신은 어떤 스킬을 사용하나? 자세가 꼭 비장의 한 수를 숨겨둔 느낌이군."
지존의 말에 길리엄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을 꿰뚫는 듯한 독사의 눈초리는 장식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다음 동작이 간파당했다고 생각하니, 정말 뱀 앞에 선 쥐새끼가 된 느낌이었다.
"이봐, 자신의 전력을 순순히 말하는 상대가 어디…! 이야아압!"
말을 하게 되면 집중이 흐트러진다. 길리엄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지존은 분명 방심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달려들었다.
쥐새끼처럼 움츠려 있던 길리엄이 이젠 독사의 기세로 팔을 뻗었다. 그의 롱소드는 지존의 목을 향했다.
왠만한 사람이라면 길리엄의 공격이 시작된지도 모르고 숨이 끊어질 것이다. 그 정도로 길리엄의 공격은 쾌속이었다.
중원을 호령하던 자의 혼백이 단순히 단련되지 않은 소년의 몸에 갇혔다 한들,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다. 지금 상태의 지존이라면 실버 급의 모험가보다는 훨씬 강할 것이다.
경험의 차이 또한 압도적일 것이다. 앗아간 생명의 숫자도, 사선을 넘나들은 횟수도, 길리엄이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존은 고개를 숙여 가볍게 피해 버렸다. 땅에 떨어진 물건을 줍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동시에 몸을 숙이며 응집된 힘을 뻗어 올렸다. 허벅지의 탄력과 허릿심이 더해진 주먹은 길리엄에 복부에 정확히 꽂혔다.
내공 따윈 실려 있지 않은 주먹이었다. 순전히 소년의 신체만을 이용한 조악한 공격이다.
따라서 위력은 별 볼일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명치를 노리고 정확히 들어간 공격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커윽!"
길리엄이 배를 감싸며 내뱉은 소리다. 그는 복부에 울려 퍼지는 묵직한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얼른 발을 놀려 지존과의 거리를 벌렸다. 분명 지존이 이 때를 노려 공격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존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군."
길리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 봐라?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너야말로 적극적으로 공격을 해 보란 말이다. 언제까지 반격만 할 셈이냐? 그건 나를 가지고 노는게 아니냐?"
"네가 어떤 스킬을 쓰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공격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데 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지. 나는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다."
"헹! 아닌 척 하는군! 난 지금부터 최선을 다 할 거다. 죽일 각오로 들어갈 거다!"
"기다리겠다."
길리엄은 위액 섞인 침을 탁 뱉었다. 명치에 받은 충격 때문에 역류한 것이다.
시큼한 타액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한참 전, 길리엄의 롱소드는 지존의 몸통을 향했다.
기세는 맹렬하고 동작도 훌륭했지만, 아까와는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역시 지존은 싱겁다는 듯 간단히 그의 공격을 흘려 버렸다.
"이게 최선이란 말인가? 길리엄! 자네야말로…!"
"바디 체인지!"
길리엄이 무언가 크게 외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 바뀌었다. 동시에 평형 감각이 상실된 듯 어지러움이 정신을 뒤덮었다.
순간 흐릿해진 정신을 바로잡으며 살펴본 이곳은 분명 그와 대련하고 있던 공터가 맞았다.
'이건 대체 뭐지?'
찰나의 순간에 시야가 바뀌어 버리니, 다른 공간에라도 떨어진 듯 혼란스러웠다.
격렬한 어지러움은 자신의 발이 땅을 딛고 있는지 조차 의심하게 할 정도였다.
지존이 평정심을 잃은 지금 이 순간, 이걸 놓칠 수 없다. 길리엄은 지존의 목을 날려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종이 한장 차이. 조금만 지존의 반응이 늦었더라면 목이 그대로 달아 났을 것이다.
깜짝 놀란 지존은 재빨리 반격을 했다. 번개만큼 빠르게 그의 손은 길리엄의 목을 향했다.
지존의 오른손이 길리엄의 목을 움켜 쥐었다. 그 상태에서 내공을 사용하며 쥐어 뜯는다면 길리엄은 죽은 목숨이 될 것이다. 생명을 움켜쥔 것이다 마찬가지였다.
"으악! 내가 졌다! 졌어! 그만!"
길리엄이 소리쳤다.
사자 우리에 던져져 지더라도 이것보단 덜 무서울 것이다. 목이 뜯겨져 피가 솟구치는 상상 때문에 길리엄의 얼굴이 얼마나 창백해졌는지 모른다.
지존은 손의 힘을 풀었다. 길리엄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롱소드를 칼자루에 넣었다.
"후… 깜짝 놀랐네. 저승 가는 줄 알았네. 콜록! 콜록!"
깜짝 놀란건 지존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다.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거냐? 내 몸을 이동시킨 거냐? 게다가 엄청나게 어지럽군."
"간단하게 말하자면 너와 내 위치를 바꾼 거다. 대부분 이 스킬에 당하면 그대로 나자빠지고 말지. 넌 끄떡 없이 서 있구나."
"환술 같은 건 아니냐?"
"그런건 아냐. 대충 추측하기론 정신이 몸 위치가 바뀐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어지러운게 아닐까 싶군."
그럴 듯한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멀쩡한 것이냐?"
길리엄은 영 꺼림칙한 표정이 되었다.
"이거 뭔가… 좀… 쑥쓰럽군. 나도 엄청 어지러워. 그래도 넘어지진 않지. 대신 미리 예상을 하니까 대비가 된다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얻어 맞는 것도 알고 맞으면 덜 아픈 법이잖나."
살짝 하자가 있는 스킬이었지만 지존은 혀를 내둘렀다.
중원에서 각종 무공을 상대해 보았지만, 적과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 버리는 기술 따윈 듣도 보도 못했다.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기술이군. 그런데 그 정도로 훌륭한 스킬을 지녔는데 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말이 튀어나갔다. 길리엄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으므로 말꼬리가 흐려졌다.
"왜 실버 등급 밖에는 안 되냐, 뭐 그런 얘기인가? 뭐… 이유는 많아. 하루에 두세번 쓰는게 고작이고, 한 번이라도쓰고 나면 아주 피곤하단 말이지. 구토가 막 밀려 오는 느낌이야. 그 외에도… 음… 대충 그런 거다. 자, 내가 이렇게 고생 하면서 대련을 했는데, 같이 그리핀 찾으러 갈 거지?"
고블린이나 사냥하러 가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다. 그렇지만 상대와 나의 위치를 바꾸는 신묘한 기술이라니, 배우고 싶었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편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지존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어깨의 힘이 쪽 빠졌다. 길리엄의 상태가 딱 그런 상태였다. 반건조 오징어마냥 흐느적거리는 길리엄과 함께 블랑코 축산 협회로 향했다.
기운 없고 맥 빠지는 모습으로 함께 걷다 보니, 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 쑥 들어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대체 왜 그러는 거냐? 그딴 얼빠진 모습으로 다니면 누가 너랑 임무 하고 싶겠나? 젠장.”
“으으… 빌어먹을… 네 실력은 인정한다만, 어른한테 참 말버릇이 없어 넌… 나 때는 말이야…”
“시끄러워! 뭐가 문제인데? 기운을 차리지 않으면 임무는 없던 걸로 하겠다. 난 지금 그리핀 알이고 뭐고 보상금이고 뭐고 급한 상황이 아니란 말이다!”
억울한 건 길리엄도 마찬가지였다.
“너가 최선을 다하라고 해서 이 꼴이 된거야. ‘바디 체인지’ 라는 스킬을 왜 하루에 두세번 밖에 못 쓰는지 알아? 한번이라도 쓰면 이렇게 되서 그러는 거지! 책임 져라! 힘들어 죽겠다고!”
“정말 헛점 많은 기술이군. 배우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너무 하는군…”
지존은 성질이 뻗쳤지만 어쨌건 그와 함께 블랑코 축산 협회까지 도착했다. 스킬이라는 서역의 기묘한 기술이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령 배우지 못한다 하더라도, 가까이서 관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길리엄이 후들거리는 손으로 협회의 문을 두드렸다.
“뉘쇼?”
임무를 의뢰 했다고는 믿기 힘든 거만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어디선가 한번 들어본 목소리였다.
“그리핀 알 건으로 온 모험가 입니다. 임무를 수행할까 해서요. 길드 게시판에 붙어 있더군요.”
“...”
길리엄이 그렇게 말해도 문 내부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려 하는 사이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연 사내는 루돌프였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지존에게 결투를 걸었던 그 녀석이다. 그는 한 눈에 지존을 알아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 원숭이 애새끼 아냐 이거? 니놈이 그리핀 알을 찾으러 가겠다는 거냐?”
“...”
결투에서 제대로 된 공격도 해보지 못한 채 지존의 장법에 나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까먹은 것 같았다. 아니면 그 추한 꼴을 한 사실을 애써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두껍거나.
길리엄은 그를 알아보자 마자 저자세를 취했다. 루돌프 녀석의 위세가 상당한 것 같았다. 좋은 부모를 둔 망나니 자식의 표본이었다.
“루돌프 씨? 여긴 무슨 일로…?”
“응? 네놈은 뭔데 아는 척이냐? 여긴 우리 아버지가 후원하는 협회야. 내 거나 마찬가지다. 내 공간에 내가 있는 것인데 무슨 일이냐니? 기분 더럽군.”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럼 꺼져. 난 저 원숭이 새끼 들여 보내기 싫어.”
“그렇지만 협회에서 의뢰한 일인걸요? 그리핀 알이 필요하신 것 아닙니까?”
루돌프는 못생긴 얼굴을 찡그리며 고민을 했다. 표독스런 눈알을 부라리더니 뒤를 홱 돌아 보았다.
협회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뒤돌아 보자 다들 시선을 피했다. 그것만 보아도 루돌프의 평소 행실을 알 수 있었다. 협회 사람들을 어지간히도 괴롭혀 대었을 것이다.
문을 가로 막고 서 있으니 지존 또한 짜증이 났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임무를 받을 수 없다는 건가? 그러면 돌아가지.”
“닥쳐. 생각 중이니까.”
지존이 루돌프에게 반말을 하니 길리엄은 깜짝 놀랐다. 그는 루돌프의 눈치를 살피며 식은땀을 흘렸다. 어떻게 행동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일단 지존이 하는 대로 지켜 보기로 했다.
서로 일면식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니, 서로의 상황을 모르는 길리엄으로써는 뭐라 할 말도 딱히 없는 것이다.
루돌프는 팔짱을 끼고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내부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든 것 없는 머리로 꽤나 고민한 결과가 나온 듯 했다.
“난 자애롭지. 언제나 우리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는 사람이야. 난 우리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본받으려고 노력한다. 그렇지?”
루돌프가 주변 직원들에게 어깨 동무를 하며 말했다. 직원은 새파래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끄덕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좋아. 좋아. 난 뒤끝 없는 사람이야. 네놈이 이전에 벌였던 무례한 행동들은 모두 용서해 주도록 하지. 원숭이, 너 모험가 등록증은 있나?”
“있다.”
“보수는 얼마를 원하지?”
지존은 그리핀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알을 훔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길리엄을 쳐다보니 그가 보수와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루돌프는 만족스럽다는 듯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 너희가 이 임무를 맡도록 해라. 둘 뿐인가?”
“소수의 인원으로 둥지에 잠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입니다.”
“그럼. 얘긴 끝났다. 이봐 스테판! 이 자들이 이 임무를 맡는 걸로 해. 영감탱이한테도 그렇게 말해. 내가 정했다고.”
스테판이란 이름을 가진 협회 직원은 어안이 벙벙한 채 알겠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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