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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13화 (13/56)

〈 13화 〉 롱소드를 가진 사내.

* * *

팡틴을 품에 안은채 잠에서 깨었다. 소년의 몸에 들어와서인지 아침잠을 이겨내기가 조금 버거웠다. 약간의 늦잠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언제나 남들보다 일찍 매일 매일을 준비했던 지존에게 있어서 소년 특유의 이런 습성은 약간 불만이었지만 이 몸을 통해 얻는 이점이 훨씬 많으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피에르는 수행자 답게 일찍 일어나 있었다. 그는 대머리 여관 주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은 여관 주인의 질문이 대부분일 것이다. 도대체 그 흑발머리 꼬맹이는 뭐 하는 녀석이냐고 말할게 뻔했다.

“어, 잘 잤나 존? 어젯밤도 엄청난 것 같더라. 이 허름한 여관이 다 부숴지는 줄 알았단 말이지.”

“들렸는가?”

“아아, 오해는 하지 말아줘. 일부러 듣고 싶어서 들었던 건 아니니까. 뭐, 어젯밤은 손님이 별로 없었으니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어.”

“... 딱히 부끄러워 하진 않는다.”

지존은 아침 식사를 하기 전 가볍게 마을을 둘러볼 생각으로 문을 나섰다. 뜻밖에도 멀리서 로즈가 보였다. 그녀는 여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로즈? 아침부터 어딜 가나?”

“아! 존! 좋은 아침이야. 여기서 딱 만났네? 난 팡틴을 데리러 왔어. 왕언니가 팡틴 혼자 두지 말라고 하더라구.”

“왕언니라는 사람에게 혼난 것은 어떻게 잘 넘어 갔나? 아주 사색이 되어서 돌아가더니.”

지존의 진지한 물음에 로즈는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마. 얼마나 혼났는지… 말도 없이 혼자 다니면 얼마나 걱정되는지 아냐면서 한 시간은 혼난 것 같아. 가끔 그럴 때에는 왕언니가 차라리 때려서 혼냈으면 할 때도 있어. 귀가 떨어질 것 같거든.”

“여러 여인들을 통솔하려면 걱정이 태산 같긴 할 테지.”

“하하 맞아. 그렇게 따지면 사실 왕언니는 인자한 편이시지. 신경 쓰실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로즈는 팡틴이 아직 자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지존을 따라 마을을 걸었다. 그녀는 마을의 가게들에 대해 이것 저것 설명해 주었다.

빵집은 어디가 맛있다던지, 제과점은 역시 어디가 제일이니 하는 여인들의 대화 같은 느낌의 것들이었다. 지존에게 있어 서역의 문화는 생소한 것이 많았으므로 그녀가 알려주는 정보를 듣는 건 꽤 재미 있는 일이었다.

시종일관 발랄한 목소리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며 꺼낸 말이 있다.

“그런데 존. 왕언니는 너에 대한 얘기를 들으시더니 의심하고 계시는게 하나 있어.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 네가 말한대로 여러 여인들을 이끄려면 걱정이 많아지는 법이잖아?”

“어떤 의심인가?”

“날다람쥐 잭. 혹시 얘기 들었어?”

“금시초문이다.”

“옆마을에서 요즘 악명 높은 살인마야. 여자들만 노려서 살인을 저지르는 미친 변태 녀석이야.”

“그런데 하필 내가 의심 받는건 무슨 이유인가?”

“너가 우리 마을에 온지도 며칠 안 되긴 했지만, 네가 온 뒤로 옆 마을에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거든. 날다람쥐 잭이 벌이는 사건 말이야. 그 변태 자식은 주기적으로 그런 미친 짓을 하거든. 그런데 너가 우리 마을에 온 날부터 지금 까지가 그 주기에 해당되거든. 요즘 자경단이 수색을 아주 철저히 하고 있다던데 그것 때문에 네가 도망쳐서 우리 마을로 온게 아닐까 의심하시는 거야.”

“역시 의심 받는건 기분이 나쁜 일이군. 다행히도 난 그런 변태가 아니다. 힘 없는 여인을 죽여 봤자 어떤 이득이 있겠나. 그럴 바에야 무인을 여럿 죽이는게 낫지. 그 편이 연습도 되고 좋지 않겠나.”

차라리 무인들을 죽이겠다니… 일반인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지존의 발언에 섬뜩해진 로즈는 잠시 말을 잃었다.

고블린을 맨손으로 패죽이는 귀신 같은 실력을 지닌 지존이 그런 말을 하니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 아무튼 오늘은 뭐 할 생각이야?”

로즈의 질문에 지존은 잠시 고민했다. 날다람쥐 잭이라는 녀석을 잡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렇게 하려면 옆 마을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존은 아직 이 마을에 더 머무르고 싶었다.

“모험가 길드에서 임무 공고를 둘러 보러 갈 생각이다. 날다람쥐 잭을 잡아 달라는 공고가 붙어 있으면 좋겠군. 날 의심받게 해서 불쾌하게 만들었으니 말이야. 잡아서 왜 그런 짓을 했는지 후회하게 만들어 주고 싶군.”

지존의 말에 로즈는 의심이 풀렸는지 미소를 띄었다. 볼에는 약간의 홍조도 올라왔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로즈다. 그런 그녀가 볼에 홍조를 띄고 미소 지으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인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난 의심 안해 존. 너가 그런 변태 살인마 같은 짓을 할 리가 없지. 넌 다른 의미에서 여자를 죽이니까.”

“...?”

*

지존은 식사를 마치고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길드의 문을 열으니 부지런한 모험가들이 가득했다.

아침 일찍 길드에 도착해야 좋은 임무를 선점할 수 있는 법이다. 모험가라는 직업은 부지런함이 제일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임무가 붙어 있는 게시판을 둘러 보았지만 고블린에 관련한 임무는 없었다. 그는 고블린에 대한 임무를 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고블린의 생김새가 인간과 비슷하니 무공 연습에 안성 맞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게다가 힘 조절에 실패해서 상대방을 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없으니 이보다 좋은 훈련 상대가 따로 없었다.

중원에 고블린이 있었더라면 무림인들의 수준이 배로 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혼란한 중원의 세계 속에서 언제나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농민들의 고통은 더욱 커질테니 그런 생각은 접어 두었다.

고블린에 관련된 임무가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게시판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러고 있으니 한 건장한 사내가 다가왔다.

“오늘도 왔나 흑발 귀신.”

“......”

어제 행패를 부리던 카림 같은 녀석인가? 지존은 그에게 경계심이 생겼다. 그의 체격은 한 눈에 보아도 훌륭했고, 걸음걸이며 서 있는 자세에서는 무예를 단련한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흘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존에게 말했다.

“뭘 그리 쳐다 보나? 난 반가워서 인사 한 것 뿐인데.”

“너야말로 뭐 하는 놈이냐? 어제 나와 한바탕 한 녀석과 친구인가? 네 놈도 내가 브론즈 등급이 된게 아니꼬운가 보지?”

그는 손사레를 쳤다.

“아니, 그럴리가. 내가 그 녀석 친구로 보일 정도로 어려 보이나? 그건 꽤 기분 좋은 일인데.”

“용건이 있으면 그것부터 얼른 말해라. 아니면 말 걸지 말고.”

“까칠하긴. 나 때는 말이야, 나처럼 듬직하게 생긴 모험가가 말 걸면, ‘안녕하십니까! 나는 누구누구입니다! 특이사항은…!’ 이렇게 말 하는게 일반적인 일이었는데 말이야.”

“용건이 없다면 말 걸지 말라고 한 것 못 들었나?”

지존이 인상을 찌푸리니 그는 살짝 저자세를 취했다.

“알았어. 거 참. 무서워서 뭐 말을 못 하겠어. 너랑 같이 임무를 하고 싶어. 그래서 말 걸은 거다.”

“그런군. 싫다는 뜻은 아니다만, 왜 하필 나인가? 여긴 넘치는게 모험가들인 것 같은데?”

그는 어깨를 쫙 펴고 넉살 좋은 웃음을 보였다. 중후한 목소리는 그의 말에 약간의 신뢰감을 주었다.

“난 실용주의자거든. 일단 넌 실력이 좋아. 그게 첫 번째 이유야. 고블린을 혼자 잡으려면 골드급 모험가에게도 쉽진 않은 일이거든. 그리고 난 실용주의자 답게 출신이나 인종 같은건 눈꼽만큼도 신경 안 써. 너가 검은 머리 귀신이건 무엇이던 간에 전혀 신경 안 쓴단 말이지.”

동방 출신의 핏줄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여러 핍박을 받았던 소년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 기억의 파편들이 남긴 흉터들을 지존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 지존에게 있어 그의 말은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 좋아. 그래서 나랑 뭘 잡으러 가고 싶다는 건가?”

“그리핀이다. 그리핀을 잡으러 가는 거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핀의 알을 구해 오는 것이지.”

그는 게시판에 붙은 공고문 하나를 가리켰다.

<<그리핀의 알="" 구합니다.="">>

관심이 있는 모험가는 블랑코 축산 협회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사례금은 충분한 협의 후 결정합니다.

지존에게 그리핀 알을 훔치러 가자고 제안한 사내의 이름은 길리엄이었다. 그는 머리카락 색깔과 비슷한 갈색 콧수염을 멋지게 가진 사내였다. 나이는 40대 정도로 보이는 중후한 인상을 가졌다.

그의 등급은 실버로, 어느 마을에 가나 그럭저럭 대접 받는 수준의 모험가였다. 건장한 체격에 어울리는 큰 롱소드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광택이 반짝거리는 롱소드 손잡이와 더불어 깔끔하게 차려 입은 옷도 신뢰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가 되는지 단순히 외견을 보는 것 만으로 파악하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그것과 더불어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이유가 더 있었다. 무공을 연습하기에 제격이라고 생각되는 고블린 사냥을 냅두고, 뭔지도 모를 그리핀이라는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약간은 그가 겁먹고 물러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에게 말했다.

“난 그리핀이 뭔지도 모른다.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지. 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데, 잠시 대련을 해 보는 건 어떻겠나? 몸을 보아하니 무예를 좀 배운 사람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무예를 아는 자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듣겠지?”

무림인들에게 대련이란 단순히 무예의 수련 방법의 하나가 아니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기에도 대련 만한 수단이 없었다. 악의를 품은 마음은 거친 동작이 되어 상대방을 찌르기 마련이고, 그건 다른 무림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흑발 귀신 놈과 맞붙으면 큰일 난다고 어젯 밤에 소문이 쫙 돌았던 건 아나? 빌어먹을, 딱 내가 그 꼴이 되었구만.”

길리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둘은 사람이 없는 공터로 향했다. 눈에 띄는 짓을 며칠 사이에 너무 많이 했다. 이제는 사람 눈을 좀 피하고 싶었다.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절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지존은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이 없는지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그와 길리먼 외에 공터로 향하는 사람은 달리 없는 듯 했다.

그의 목소리며 행동거지는 그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것도 바보였다. 지존은 그런 의미에서 절대 바보가 아니었다.

이런 저런 걱정을 떨치지 않는 지존보다도 길리엄의 얼굴이 더욱 근심 걱정이 많아 보였다. 길리엄은 지존에게 맞아 죽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자 벌써 도착했군. 여기면 되겠나 검은 머리?”

“구경꾼은 딱히 없는 것 같군. 여기면 대련 하기에 좋아 보인다. 한번 겨뤄 보자.”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대련을 준비했다. 실전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상당했다. 낙엽이라도 눈 앞에 흩날린다면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두동강을 낼 정도의 긴장이었다.

길리엄은 멋들어진 광택을 뽐내는 롱소드를 쭉 뽑았다. 기름기가 흐르는 검신은 길리엄이 그 검을 꽤나 공들여 닦고 관리한다는 걸 보여 주었다. 검을 쓰는 이라면 검은 자신의 분신과 마찬가지인 법이다. 길리엄은 그런 점에서 하급의 검술가는 아닌 것이다.

그가 취한 자세는 중원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세였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검리는 하나로 통한다. 적의 칼을 막고 살과 뼈를 가른다. 그것이 모든 검법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검에도 능통한 지존 답게, 금새 길리엄의 자세가 검리에 맞는 훌륭한 자세라는 걸 파악했다. 넓게 뻗은 다리는 적에게 금새 다가가고 얼른 피할 수 있는 모습이었고, 검을 든 팔은 일체의 흔들림이 없이 단단했다.

흠 잡을 곳 없는 좋은 자세였다.

길리엄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투덜대며 말했다.

“이봐. 네가 먼저 대련을 하자 해서 시작하긴 한다만… 좀 살살 부탁해. 난 네 소문을 곧이 곧대로 믿고 있는 사람이거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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