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저것들을 죽여야 하나...? 아니, 결정했다.
* * *
피에르와 지존은 여관으로 돌아갔다. 지존이 건물로 들어가려 하니 피에르가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지붕 있는 곳에서 자니 좋더라. 음식도 잘 얻어 먹었고. 그럼, 난 이만 다시 골목길로 돌아갈게. 신세 졌어.”
지존은 피에르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수행자라 밝힌 것처럼 실제로 교양도, 지식도 많은 것 같았다. 주머니 사정도 넉넉하니, 그와 계속 가까이 지내며 그에게 서역에 관한 지식을 얻고 싶었다.
“가지마라. 난 배울게 많다. 서역에 관해서 배워야 할게 아주 많다. 그리고… 몬스터? 중원 출신인 나는 그런 것에 문외한이다. 금전은 충분하니, 며칠 함께 있는 것이 어떤가?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면 건강도 상할 테니…”
“그래? 그렇게 봐 준다니 고맙지만, 나도 아는 건 거의 없어. 난 알아브 출신이라 이쪽은 그다지 잘 몰라. 몬스터도 좀 다르고.”
“그래도 고블린 이라는 건 좀 알 것 아니냐? 그리고 나는 내 전 생에서 후회하는 것이 많다. 내 강함만 쫓아 살다 보니 적도 많이 생겼지. 악업도 많이 쌓았다.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이라곤 싸우고 죽이는 것밖에 없었지. 그리고…”
“그리고?”
“석가를 따르는 중들을 죽이기도 했다. 평생 후회가 되는 일이었다. 지혜로운 사람, 특히 너처럼 선대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자들을 바보처럼 여겼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나니 알겠더군. 강함만 쫓으면 상처 뿐인 삶이 된다는 걸.”
수행자에게 고행은 때때로 영혼을 씻어내는 일이 되기도 한다. 따뜻한 식사와 푹신한 침대를 멀리하고 광야에서 벌레와 빗물을 받아 먹으며 수행하는 자들도 있다. 그게 옳건 그르건, 그들 나름대로 의미를 찾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할 것이다.
피에르도 어느 정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돈이 없었기도 했지만, 골목에서 노숙하는 것, 가장 낮은 곳에서 인간 사회를 관찰하는 것 또한 그에게 있어 한 가지 수행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존이 이렇게까지 말 한다면, 또 자신에게서 무언가 지혜를 배우고 싶어 한다면 다시 생각해 볼 얘기였다. 그에게 선대의 가르침을 전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포교 아니던가.
“이전의 생이라… 네가 귀신처럼 보여서 귀신이라 불렀긴 했다만, 사실 믿진 않았어. 아니, 애초에 누가 네 말을 믿을까? 전생에 중원의 절대자였다니. 뭐, 됐어. 진짜던 아니건 넌 뭔가 배우고 싶은게 많은 것 같네. 그럼 나도 네 뜻대로 당분간 네 옆에 있을게. 최소한 끼니 걱정할 시간 대신 기도를 할 수는 있겠군.”
돌아가려는 피에르를 붙잡았다. 여관의 문을 여니 몹시 피곤해 보이는 로즈가 있었다. 로즈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지존의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하긴 했지만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얼굴에 새파란 멍이 든 대머리 여관 주인에게 연고를 바르고 있었다.
“어…! 안...녕?”
“꽤나 피곤해 보이는군.”
“...”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었다. 머리에서 김이 날 것만 같았다. 파란 얼굴을 한 대머리 주인장 앞에 있으니 더욱 그랬다.
“아 왔는가 자네들? 으으으… 엄청나게 쑤시는군…! 얘기는 대충 들었다네. 빌어 먹을 귀족 아들내미한테 혼쭐을 내 줬다며? 기절해서 못 본게 한이군.”
주인장은 연고가 얼굴에 닿을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뼈에 금이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행히 이빨이나 입술은 괜찮았다.
잠시 잊고 있던 짜증나는 녀석. 다시 찾아와 행패를 부리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 개자식이 다시 돌아 오진 않겠소?”
“듣기로는 결투의 형식을 띈 싸움이었다며? 게다가 구경꾼도 꽤 되는 것 같은데, 아마 그러면 다시 오진 못할거다. 쪽팔려서 어디 얼굴 들고 다니겠어?”
“사실은 다시 왔으면 좋기도 하다. 사과를 안 했지 않은가? 로즈에게도, 당신에게도. 심지어 그 놈은 탁자를 부수기까지 했지. 변상도 안 하고 가지 않았는가?”
“죽었다 깨 나도 그럴 일은 없어. 뭐… 귀족 놈들이 다 그렇지. 거만한 자식들.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처벌도 안 받겠지. 썅, 생각하니까 짜증이 확 솟네.”
씩씩거리는 주인장 앞에서 지존은 또 한가지 목표가 생겼다. 고블린을 죽이며 잃어버린 무공을 회복한 다음엔 그 귀족 놈을 찾아갈 것이다.
찾아가서 사과를 받을 것이다. 탁자 값도 받아낼 것이다. 그리고 녀석이 사용한 ‘팬텀 소드’ 라는 기술도 알아내야 한다.
그 사이 로즈는 주인장의 얼굴에 연고를 다 발랐다. 아직도 계속 빨간 얼굴인 그녀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음, 연고도 다 발랐으니까, 음, 나는 이제 갈게요. 다들 안녕…!”
지존은 그녀를 불러세웠다.
“어딜 가는 거냐?”
“일... 하러 가야지?”
“내가 오늘 네 하루를 다 산다고 하지 않았나. 오늘 네 일은 쉬는 것이다. 얼굴이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데.”
피곤한 얼굴인 것이 당연하다. 비록 허약해 보이는 몸에 갇혔지만, 중원의 지존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아직도 알 수 없는 엄청난 힘을 품고 있는 잠룡인 것이다. 그런 용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 내었으니 힘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응? 어… 아, 알았어. 그래. 꽃미남 씨, 아니 그러니까 동방에서 오신 손님!”
“존이라 불러도 좋다. 하루를 산 값은 분명 치뤄줄 것이니 방에 가 쉬고 있어라.”
“그… 그래요.”
로즈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계단을 올라갔다. 지금 그녀의 마음 속은 부끄러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자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순수한 꼬맹이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큰 코 다친 것이다. 게다가 그 엄청난 사내의 기운이라니. 정신이 빠져나가는 줄 알았다.
꽤 많은 사내를 품어본 그녀였지만 지존은 규격 외였다.
‘동방 사내들은 다 저런가? 아직 여자 경험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도? 아냐,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분명 그가 괴물 같은 걸 거야. 암… 아무렴 그렇지.’
그녀는 침대에서 정신을 차린 뒤 지금까지 계속 그 생각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지존의 얼굴을 다시 보니 벌거 벗겨져 광장에 나온 듯 부끄러웠다.
“그, 그러면, 존, 네 말, 아니… 당신 말대로 방에 있을게. 요…”
“그래. 푹 쉬어라.”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로즈가 주인장 얼굴에 바른 연고, 그게 고블린 간유로 만든 거야.”
피에르가 지존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고블린이라는 거 말이다. 무섭기만 한 녀석들은 아니로군. 몬스터라는 것, 나름대로 유용한 쓸모가 있는 것이구나.”
“그래. 상급 모험가들은 길드에서 받은 보상금 뿐만 아니라 고기나 부산물로도 돈을 꽤 챙긴다 하더라.”
“그 고블린이라는 거. 빨리 보고 싶군. 지금 당장 잡으러 가 봐야겠어.”
“말도 안 돼. 아직 동료도 못 구했잖아. 접수원이 하던 말 못 들었어? 너 죽어. 진짜로 죽어.”
“죽을 것 같으면 도망치면 그만이지,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가?”
“...”
아연실색하는 피에르의 표정은 힘빠진 로즈의 얼굴과도 닮았다.
*
성문을 빠져나갔다. 성 문을 지키던 이들에게 모험가 등록증을 보여주니 아무 말 없이 통과시켜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사실 사람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경비 업무라고 했다. 그들이 성문을 지키고 서 있는 이유는 몬스터가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피에르는 따라 가지 않겠다고 했다. 동료도 없이 혼자 고블린을 잡으러 가는 녀석을 따라가는 건 자살 행위니까.
지존의 싸움 실력이 보통이 아닌 건 알겠지만, 고블린과의 전투는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무리지어 공격하고, 미숙하긴 하지만 고블린 녀석들도 나름의 전략을 사용한다.
브론즈급 모험가들 조차도 고블린들에게 몰살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막 아이언 등급을 받은 녀석이 혼자 고블린을 잡으러 간다니…
피에르의 만류에도 지존은 말을 달렸다. 말 녀석도 자신의 새 주인이 마음에 들었는지 발걸음이 경쾌했다. 채찍 한번 때리지 않아도 훌륭한 속도로 달려 주었다.
지존은 고블린이 자주 나온다는 동굴 앞에 도착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횃불이라도 가져 올 걸 그랬구나.”
마음이 급한 나머지 중요한 도구도 챙기지 않았다. 무기라고는 철퇴 한 자루 뿐, 그리고 빨리 고블린과 싸워 보고 싶다는 투쟁심이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동굴을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 아무리 뛰어난 무림의 고수라도 눈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 실력의 반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본래 힘의 1할 조차도 되찾지 못한 지금 시점에서 그런 짓을 하는건 미친 짓이었다.
지존은 동굴 앞 풀섶에 숨어 한참을 있었다. 어찌나 따분한지, 서역의 말과 중원의 말은 어떤 차이가 있을지, 평소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을 만한 학술적 고민까지 하고 있을 때, 어디에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돼지가 꿱꿱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가래 끓는 폐병 환자의 숨소리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그런 기분 나쁜 음색이 뒤섞인 말소리라는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봐도 저런 언어는 없으리다.
“#$&%%.”
“&^%#?”
“$%.”
지존은 이제야 고블린이라는 녀석들이 나타났구나 생각했다. 어떻게 생긴 녀석들일지 궁금했다. 자신의 방향으로 소리가 가까워지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눈 앞을 지나칠 것이다.
곱사등이처럼 굽은 등허리, 씹다 뱉은 풀쪼가리같은 녹색빛의 피부, 인간의 옷을 흉내낸 듯한 엉성한 가죽옷. 키는 인간의 절반 정도. 하지만 키에 비해 다부지게 발달된 근육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저것들이 고블린이로군. 그렇지만 내키질 않아. 저렇게 허약해 보이는 것들이 정말 강한가? 게다가 추하게 생기긴 했어도 못 돼 보이진 않는구나. 저들끼리 말도 하는 걸 보니 꼭 사람 같기도 하군.’
지존은 숨어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몬스터, 마물이라 부르기엔 너무 인간적이었다. 저것들을 죽여야 하나? 필요에 의해 사람을 죽인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유희삼아, 수련삼아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다.
지존은 때때로 악행을 저지르며 살았지만, 결코 쾌락 살인마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인간과 너무도 닮은 고블린을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죽이고 싶진 않았다.
‘그만 둬야겠군. 저런걸 죽였다간 기분만 더럽겠어.’
말 등으로 올라설 때였다. 고블린들이 껴안고 있는 살색 물체,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
“%$%.”
자기들끼리 뭔가 떠들더니 그 물체를 뜯어서 주었다. 그것은 고블린의 억센 손아귀에 힘 없이 뜯어졌다.
“이런 개새끼들이!”
지존은 즉시 뛰쳐나갔다. 미리 시위를 먹여 둔 화살처럼 지존의 몸은 섬광처럼 날았다.
“#$^&&%!!!”
깜짝 놀란 고블린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겁 먹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녀석들이 안고 있던 살색 물체를 낚아챘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던 그 살색 물체는 바로 사람 고기였다.
그것도… 갓난 아이의 것이었다.
평소에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지존이었다. 전쟁의 화마에 휩싸여 죽어가는 아기들을 봤을 때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하지만 그 정도 뿐, 지금 이 기분은 아니었다.
인간으로써, 인간의 아기를 해치는 이질적 존재를 두고 볼 수 없다. 아무리 인간을 닮았다 한들 그 순간부터 그것은 절대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지존은 인간으로써 분노했다. 그것에 논리라던가, 이성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빌어먹을 녹색 괴물 새끼들이 자신의 종족, 그것도 연약한 아기를 뜯어 먹는다는 사실. 지존의 뇌에는 오직 그 생각 뿐이었다.
기맥을 타고 흐르던 내공은 번개보다 빨리 지존의 팔에 모였다. 귀신보다 무서운 장법을 날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