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고블린을 잡아보고 싶다.
* * *
아침 식사 시간이 끝나갈 무렵 피에르가 질문을 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역시 내 말대로 귀신이 맞는 것 같네. 확실히 비루 먹어 보이는 청년의 것이 아니야. 네 혼은. 여하튼, 앞으로 뭘 할거냐?”
“아멜리를 찾아야 한다.”
“그게 누군데?”
“이 몸의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기억을 심어준 여자 아이다. 그 아이를 찾아서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해.”
“좋은 생각이지만… 왜 그래야 하지? 물론 나쁘다는 건 아닌데…”
“이 자의 기억과 내 기억이 뒤섞였다. 몸 속의 한 맺힌 마음이 곧 내 한이다. 그리고 이 녀석의 아비를 죽였을 때, 내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내가 다시 중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온전한 나 자신이 되어야 해. 즉, 몸이 원할 만한 일을 해야 한다는 거다.”
처음 청년의 아비를 마주쳤을 때가 생각났다. 마음은 소년이 된 듯, 아비 앞에서 온 몸이 떨렸었다. 결국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지존의 강한 정신력으로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아비를 죽였다. 철퇴로 빌어먹을 두 놈, 두바인과 아비를 으깨 죽이고서야 정신이 조금 더 뚜렷해진 것이었다.
“정말 세상엔 별 일이 다 있군.”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한참을 더 쓸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먹음직한 음식들도 배를 채운 피에르는 만족한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수행을 위해서 자처한 것이긴 했지만,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걸식 생활을 하던 그에게 오늘의 아침 식사는 임금의 상차림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가끔은 좋은 걸 먹어도 되겠지. 이것도 '걸식' 은 맞으니까. 피에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잘 먹었어. 귀신. 그나저나 오늘은 뭘 할 생각이야?”
“수련을 해야겠지. 어젯밤 그 갑옷 입은 자식이 쓴 ‘팬텀 소드’ 라는 건 도대체 뭐냐?”
깜짝 놀랄 일이었다. 무공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한심한 녀석이 쓰는 괴이한 기술이라니. 중원에서 여러 고수들과 자웅을 겨루었던 지존이었으나, 그런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방심했다간 목숨을 잃을 뻔 했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연기가 휘두르는 무형의 칼. 배울 수만 있다면 배우고 싶었다.
“나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건 ‘스킬’ 이라는 거야.”
“스킬? 그건 어디서 배울 수 있는 거냐?”
“딱히 그런걸 가르치는 사람은 없어. 모험가 녀석들이 좀 알텐데, 모험가 길드에 가 보는 건 어때?”
“모험가 길드...? 이 마을에도 그런게 있나?”
“백문이 불여일견. 따라와.”
피에르를 따라 이 골목 저 골목을 지나갔다. 상인들이 판매하는 것들 중에는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꽃들은 중원의 것과 달리 어찌나 화려한지,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피에르는 물건의 가격들을 대충 알려 주곤 했는데, 어느 꽃 가격을 말하니 지존은 화를 내기도 했다.
“뭐라고? 저 먹지도 못하는 꽃 따위가 집 한채 가격이라는 게냐? 날 놀리는 거로군! 점혈법을 다시 당해볼 테야?”
피에르는 기겁을 했다. 온 몸 구석구석에 모래알이 들어차는 듯한 괴이한 느낌, 지존에게 혈도를 짚히면 그런 소름끼치는 감각과 함께 몸이 마비가 되었다.
“아니… 진짜인데…”
둘은 이내 모험가 길드 앞에 도착했다.
건물 외벽에는 이번 달의 우수 모험가 셋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었다.
<<이번 달="" 길드의="" 공로자="">>
드레이 후사드, 이번 달 그의 업적.
동료 단 둘과 함께 고블린 십수마리를 도륙. 고블린의 왼쪽 귀 18개, 손상되지 않은 고블린의 간 16개를 획득.
레옹 드 수숑, 이번 달 그의 업적.
살아 있는 쌍두사를 잡아옴. 상처 없는 늑대 가죽 22장 획득. 탈주한 사형수 2명의 머리.
마크 클레망, 이번 달 그의 업적.
성체 그리핀을 죽이고 그것을 통째로 길드에 가져옴.
<<저희 길드는="" 언제나="" 새로운="" 모험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지를 찬찬히 읽어본 지존은 고블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고블린이 뭐길래 귀와 간을 가져 왔다는 건가?”
“몬스터잖아. 몰라? 키는 남자 허리쯤 오고, 피부는 초록빛에, 사람처럼 도구를 쓰고 옷을 입긴 하지만 소통이 되질 않지. 아주 고약한 몬스터야. 역겨운 냄새에, 사람들 가축을 훔치고, 곡식 창고를 털어가기도 하지. 제일 악질인 건 어린 아이를 잡아 간다는 거야.”
“서역은 정말 해괴한 것 천지로군. 좋아, 나도 한번 잡아 보도록 하지.”
지존은 길드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건물 내부에는 사내들이 대부분이었고, 여인은 거의 없었다. 청소하던 직원이 인사를 하자 내부의 모든 사람들은 지존과 피에르를 쳐다 보았다.
“엥? 동방쪽 원숭이네?”
“저건 피에르 아니야? 느티나무 아래에서 어려운 얘기를 지껄이는 이상한 녀석.”
“어? 저거 어젯밤 판텔로프 아들래미한테 혼쭐을 내준 동방 놈 아닌가?”
“저렇게 어렸다구?”
“분명 귀신 같이 무섭게 생겼다고 들었는데. 다른 녀석이겠지.”
내부의 사람들은 둘을 보고 각자 한 마디씩을 했다. 조용히 무기를 닦고 제 할일을 하던 사람들 뿐이었는데, 일순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되었다.
피에르와 지존은 접수처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 걸어갔다. 긴 금발을 단정히 땋은, 한 눈에 보아도 예쁜 얼굴의 여인이었다. 험상 궂은 사내들이 잔뜩 들어 있는 건물 속의 미인이라, 꼭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풍만한 가슴은 옷으로 감싸져 있지만 그 존재감이 엄청났다. 서역의 여인들은 어찌 저렇게 큰 것을 달고 사는 것인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로즈만 특출나게 큰 가슴을 가진 줄 알았는데,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서역의 여인들은 달리기라도 하면 허리가 부러지겠군.’
지존이 접수처의 여인을 신기하게 쳐다보자 직원이 말을 걸었다.
“응? 상인이신가요? 여긴 모험가 길드인데? 무얼 하러 오셨습니까? 저흰 잡상인의 출입은 금하고 있어요.”
“잡상인이라니. 이 몸은 중원의…”
지존은 화가 나 접수처의 여인에게 호통을 치려 했다. 피에르는 얼른 말을 끊고 그녀에게 어떻게 하면 모험가가 될 수 있는지 물어봤다.
“모험가는 누구든 될 수 있답니다. 네? 이 상인, 아 죄송합니다. 이 분이 모험가 등록을 하실 거라구요?”
“예, 신청서 좀 주시겠습니까?”
접수원 여인은 의아한 얼굴로 양피지를 건넸다. 이름, 성별, 나이, 특별한 기술, 출신지 등을 적는 칸이 있었다.
이름을 적는 칸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는 이름 따윈 없었다. 그건 지존의 혼백이 깃든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름 없이 중원 어딘가에서 고수들을 물리쳤었다. 적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물었지만 지존은 그저 자신이 지존이라고만 했다. 실제로 이름이 없었으니까.
청년기의 호승심 같은 것으로 시작된 ‘지존’ 이라는 자칭은 훗날 현실이 되었다. 모두가 그의 앞에서 그를 지존이라 불렀으니까.
“이거… 이름을 적어야 하는데… 너 진짜 이름 없냐?”
“... 그냥 지존이라고 적어라.”
“아니… 그건 별명이잖아. 그냥 대충 내가 지어 줘?”
“뭐라고 지을 셈이냐?”
“간단하게 존. 존이라 하자고.”
“...”
내키진 않지만 생애 처음으로 이름을 갖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오래 살아온 탓에 마음이 유해진 탓도 있으리라.
한 음절로 이루어진 간단한 이름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존, 존이라…’
나이는 대충 19살 쯤으로 썼다. 서역의 색목인들은 동방의 사내들을 그다지 본 적이 없어서인지 그의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았다. 또한 디트리히, 그의 빌어먹을 아비에게 학대를 당한 탓에 성장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 잡다한 것들을 쓰고 제출했다. 거기에 수수료를 더하니 금새 모험가로 등록되었다.
미인 접수원이 밝게 웃으며 등록증을 건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등급은 아이언 등급부터 시작합니다. 의뢰는 저쪽 게시판에 붙어 있는 자료들을 참고해 주세요. 등급에 맞는 일은 언제나 시작 가능합니다.”
“고블린을 잡고 싶소.”
“고블린 말입니까? 한번 게시판을 참고해 주시고, 질문 사항이 있으시면 다시 와 주세요.”
“알겠소.”
졸지에 ‘존’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지존과 피에르는 게시판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잃어버린 고양이="" 큐티를="" 찾습니다.="">>
<<호위 임무="" 급구.="">>
<<살아 있는="" 쌍두사="" 고가="" 매입.="" 광장="" 분수대="" 뒤편="" 약재상에서.="">>
<<그리핀 사냥단="" 모집중.="" 당신만="" 오면="" 출발.="">>
…
그 외 잡다한 임무들 뿐, 고블린을 잡자거나, 또는 잡아 달라는 공고는 없었다.
“게시판을 다 살펴보고 왔소만, 고블린에 관련한 임무는 없군.”
“네? 그렇습니까? 아, 드레이 라는 분께서 고블린에 관련한 임무를 집중적으로 맡으셔서 근래 임무가 없는 것 같군요. 그런데 꼭 고블린 입니까? 고블린은 꽤 강합니다. 마을에 피해도 많이 주고요. 지금 막 모험가로 등록된 존 님 같은 경우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함께할 파티원도 없는 상태이지 않으십니까?”
“수행을 하고 싶어서 말이오. 혼자 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나중에 동료를 구해도 되는 일 아닌가.”
“음… 좋은 자세네요. 잠시만요. 파스칼님?”
미녀 접수원은 누군가를 불렀다. 곧이어 한 사내가 접수처로 걸어왔다.
“응? 왜 불러?”
저음의 목소리를 지닌 그는 균형 잡힌 체격을 하고 있었다. 어딜 가도 힘 좀 쓴다는 평을 받을 만한 든든한 체형이었다.
“아, 이 분이 고블린을 잡고 싶다고 하셔서요. 요새 고블린 관련 임무는 드레이 라는 분이 다 해결한 상태죠?”
“어… 그렇지. 근데 아마 잡을 가치가 있긴 할거야. 약재상에 간을 팔면 되니까. 다만 요새 고블린 간 시세가 떨어져서… 그닥 돈이 되진 않겠군.”
존, 그러니까 지존은 파스칼과 접수원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어쨌거나 잡을 가치가 있다는 거로군. 만약 내가 그 드레이라는 사람보다 더 많은 고블린을 잡으면, 내 이름도 바깥에 걸리게 되는 건가? ‘이번 달 길드의 공로자’ 라고 말이야.”
파스칼은 지존의 당돌한 말에 어이가 없었다. 아직 다 크지도 않은 녀석이 뭘 하겠단 말인가. 어린 나이부터 모험가 생활을 시작 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동방 꼬맹이가 시작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고블린이라니. 그건 브론즈급 모험가들이 여럿 뭉쳐야 잡을 수 있는 상대였다. 생명력이 강한 몬스터다 보니, 팔 다리가 잘려도 덤벼드는 흉악스런 놈들이기 때문이었다.
단신으로 고블린을 잡아오려면 골드 이상 급의 실력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뭐? 어디서 굴러 들어온 지도 모르는 동방 녀석이 ‘이번 달 길드의 공로자’ 를 운운해? 당치도 않은 얘기였다.
“이봐 검은 머리. 목숨 아까운 줄을 알아야지. 고블린을 잡네 마네 하는 건 네 자유지만, 목숨은 하나 뿐이라고. 살 날도 많은 녀석이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우스운 일이다. 중원에서 머리가 하얗게 샐 때까지 사선을 넘나든 그였다. 파스칼이라는 남자가 도리어 꼬맹이 처럼 보였다.
“하하하! 그래, 그렇게 보이는 것도 당연할 테지. 뭐, 좋아. 어쨌건 고블린을 잡으면 간을 꺼내 팔면 된다는 건가? 아, 그리고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해 주질 않았군?”
“길드의 공로자 말하는 거냐? 아쉽지만 고블린 백 마리를 잡아도 길드의 공로자로 올라가진 못해. 길드를 통해 임무를 받은게 아니잖아? 그냥 단지 네 개인 업무를 행한 것 뿐이다. 물론 고블린을 드레이 녀석보다 많이 잡는다면 네 이름값이 올라가겠지. 상황에 따라 모험가 등급이 올라갈 수도 있을 거다.”
“그래. 그 정도면 됐다. 그럼 다음에 보지. 질문 받아줘서 고맙군.”
지존은 피에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파스칼과 접수원은 웃기는 꼬맹이를 다 본다며 웃었다.
“허허허, 야무진 놈이로군! 이봐 메리, 어떻게 생각해?”
“머리는 좋아 보이는 사람인데 아쉽네요. 아니, 멍청한 건가...? 여하튼 장의사 업무가 늘겠어요. 관 짜는 사람도 좋겠군요.”
“그러게 말야. 그런데 저 녀석 장례를 치뤄 줄 사람은 있는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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