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5화 (5/56)

〈 5화 〉 결투, 옛 기억.

* * *

더 이상 봐주기가 힘들다.

지존은 짐승 같은 것을 싫어했다. 자신의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는 짐승 같은 모습, 이를테면 여인에게 추근대는 사내들 같은 것이다.

눈 앞에 있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남자가 그 예시에 정확히 들어왔다. 생각을 고환 두쪽으로 대신 하는 것인가?

허나 강한 자가 저런 모습을 보인다면 덜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저 사내는 하룻강아지 같은 녀석이었다.

고환에 지배당한 머저리 같은 개새끼. 발정난 똥개.

“씨를 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결투란 건 밖에서 하는게 좋겠지? 기물 파손 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말이다.”

지존은 종자와 사내 사이를 태연자약하게 걸어 나갔다.

“원숭이 애새끼. 분명 뭘 잘못 먹었구나. 편안하게 죽여줄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겁 먹은 개새끼가 말이 많은 법이다. 닥치고 얼른 나와라.”

지존은 여관의 뒷마당으로 나갔다. 야밤에 왠 소란인지 여관에 투숙하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창 밖에 머리를 빼꼼 꺼냈다.

종자 둘은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크흠, 흠!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는 판텔로프 경의 외아들 루돌프! 동방의 어느 버릇 없는 이방인이 결투를 걸었으니, 그저 무시하고 있을쏘냐! 마지 못해 결투에 응했으니, 루돌프는 슬픈 마음으로 결투에 임하게 되었다! 아아! 불쌍한 동방의 사내, 겁 없이 그에게 도전하는구나!”

창 밖에 머리를 빼고 그것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버릇 없는 동방 새끼로군.”

“검은 머리는 재수 없어.”

“비단 장수의 자식인가? 쯧쯧 타지에서 초상 치르겠군.”

지존과 사내는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그 순간 사내의 종아리를 부여잡고 울부짖는 여인이 나타났다. 로즈였다.

“저 자를 죽일 셈입니까? 다 제 잘못입니다! 제 몸을 마음대로 해도 되니 저 사내를 해치지 말아 주세요.”

“암코양이 같은 내 사랑. 이제야 이 몸에게 복종을 하는구나. 후후후. 하지만 결투를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여봐라, 여인을 붙잡아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종자 둘은 로즈를 붙잡았다. 가녀린 그녀는 우악스런 종자 둘에게 번쩍 들려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비명을 지를까봐 두툼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읍! 으으읍! 윽!”

루돌프란 이름을 지닌 경박한 사내가 지존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어린 애고 노인이고 상관 없이 죽인다. 그리고 상대가 갓난 아이여도 난 항상 최선을 다한다. 최선을 다해서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

루돌프는 길쭉한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지존의 혼백이 담겨 있는 몸의 키와 맞먹을 정도로 큰 검이었다.

칼을 빼들고 뻣뻣하게 서 있는 루돌프에 비해, 지존은 여유롭다는 듯 낭창한 몸놀림으로 발을 굴렀다.

굼실 굼실, 흐느적 흐느적, 그런 모습이었다.

“동방 놈들은 싸우기 전에 춤을 추나? 꼭 광대 같군.”

“... 들어와라.”

루돌프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돌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이야아아!”

그러나 롱소드는 허공을 갈랐을 뿐, 분명 이곳에 있었던 꼬마의 모습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있었다.

창 밖에서 결투를 감상하던 투숙객들이 다시 한번 웅성거렸다.

“호오! 동방의 마술인가?”

“꽤 하는 놈인데?”

루돌프는 얼른 검을 회수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일부러 몸통을 노리지 않았었다. 그 때문에 동방 놈이 자신의 검을 회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꽤 하는군 원숭이 애새끼. 다음 기회는 없다!”

루돌프는 다시 한번 큰 검격을 날렸다. 하지만 청년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어찌나 몸이 날랜지, 난생 처음 보는 유연하고도 둥그스름한 보법은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허억, 헉! 네놈도 스킬을 쓸 줄 아는 녀석인가보군. 그렇다면 내 비기를 써서 죽여주마.”

“스킬…?”

스킬이 무엇인가? 처음 듣는 용어에 지존은 궁금해했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으니, 루돌프는 그 빈틈을 이용했다.

“이야압! 팬텀 소드!”

거창한 이름에 비해 아까와 똑같은 공격이었다. 쓸데 없이 커다란 동작에 불필요한 힘만 가득 실려 있으니, 누구라도 피할 수 있는 허접스런 공격이었다.

가뿐히 루돌프의 공격을 피했다. 그런데 루돌프의 등 뒤에서 무언가 먹구름 같은 것이 스멀스멀 피어 오르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별안간 그것이 맹렬한 검격을 날렸다. 루돌프의 허접스런 검술과는 다른, 생명을 노리는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

방심하지 않길 천만 다행이었다. 얼른 보법을 사용해 몸을 움직여 검격을 피했다. 머리카락 끝이 잘려나갔다.

‘하룻강아지 수준인 줄 알았는데, 기묘한 무공을 사용하는군. 이제 끝내야겠다.’

지존은 땅을 박찼다. 내공과 근력이 부족한 소년의 몸이기에 흙먼지가 일어날 뿐이었다. 본래 지존이 땅을 박차는 진각을 하면, 땅바닥이 부숴지고 주변의 기둥이 무너질 정도였다.

“외문정주!”

지존은 진각과 동시에 루돌프의 몸에 바싹 달라붙었다. 외문정주는 온몸을 돌려 팔꿈치로 적의 갈비뼈를 부수는 기술이었다.

까앙!

금속이 부딛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지존의 공격이 깔끔하고도 정확하게 들어갔지만 루돌프는 멀쩡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지존의 무공이라면, 저런 철판 따위는 가볍게 찌그러트리며 적의 심장을 터트렸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단련되지 않은 소년의 몸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다. 쇳덩이를 때린 팔꿈치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크윽..!”

“풉! 푸하하하하! 시도는 훌륭했다 원숭이. 팬텀 소드에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원숭이 치곤 대단한 실력이었다. 이젠 죽어라!”

하필이면 힘 없이 바싹 마른 청년의 몸으로 들어온 것인가. 순간 지존은 야속한 감정이 사무쳤다. 저 따위 녀석은 단번에 터쳐 죽일 수 있어야 하는데…

루돌프의 거친 공격들을 차례차례 피해나갔다.

‘어떻게 저 천산갑 가죽 같은 갑옷을 벗겨내야 하는가? 그래! 장법을 한번 사용해 봐야겠다.’

권(?)은 근골을 부수고 장(?)은 인체 내부를 파괴한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허접한 내공을 지닌 사내의 몸, 그러나 완벽한 자세로 장법을 사용하면 풀 플레이트 아머를 침투하여 루돌프의 내장까지 내공이 도달할 것이다.

“팬텀 소드!”

달려 오는 루돌프에 맞서 강하게 진각했다. 땅을 박차며 대지의 무게가 무릎, 단전을 통해 팔에 실려왔다.

지존의 장법이 루돌프의 복부에 정확히 들어갔다.

쩌어억!

“학습 능력이 없는 게냐 원숭이? 갑옷에 아무리 공격을 해 봤자…! 후읍!”

루돌프는 그대로 고꾸라져 일어나지 못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복통이라도 느끼는 듯, 흙바닥을 뒹굴며 침을 흘릴 뿐이었다.

“주, 주인님!”

반항하지 못하는 로즈를 희롱하고 있던 종자들은 자신의 주인이 쓰러지자 깜짝 놀라 뛰어왔다.

“주인님! 숨을 쉬어 보세요! 크게! 크게!”

“흡! 큭, 크흑, 흐읍…!”

창 밖을 내다보던 투숙객들은 아까 지존을 놀리던 것도 잊은 채 감탄을 했다.

“동방에는 신비로운 격투술이 있다더니 이런 것인가?”

“원숭이가 엄청난 실력이군!”

종자 둘은 수군대는 투숙객들에게 소리쳤다.

“닥치지 못해! 이 자식들이! 죽여 버린다!”

그러자 투숙객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몸을 숨겼다. 종자들은 괴로워하는 자신의 주인을 들춰매고 성급히 자리를 떠났다.

어지러웠다. 연약한 소년의 몸으로 무공을 사용하니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땅이 일렁이고 시야가 좁아졌다. 비틀거리는 지존을 향해 로즈가 뛰어와 그를 안아주었다.

“이봐! 괜찮아? 정신 차려! 어디 다친거야? 야!!!”

“...... 홍매…”

흔들리는 시야로 보이는 로즈의 모습은 홍매와 꼭 닮았다. 가녀린 팔다리에 비해 풍만한 몸매, 새하얀 피부를 더욱 강조하는 점. 옥쟁반을 구르는 은구슬 같은 목소리.

“홍매야…”

지존은 그녀의 품 안에서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

꿈.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는 그리운 얼굴이 보였다. 홍매. 그 이름처럼 매화 수가 놓여진 비단으로 옷을 지어 주었었다.

새 옷을 입고 기쁜 미소를 지으며 정원을 뛰놀던 그녀. 그녀를 알게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꿈이었다.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서 내려가서 아비를 돌보거라. 쓸쓸해 하시지 않겠느냐.”

“아니거든요! 얼른 시집이나 가 버리라고 매일 구박이신걸요! 흥! 그리고 지존님이 아무리 필요 없다고 해도 난 여기 있을 거거든요!”

“도리어 수련에 방해가 될 뿐이다. 날 생각한다면 어서 떠나거라.”

“그리 말씀하셔도 어제 제가 지은 밥 한솥을 다 드셨으면서! 저 없으면 뭐 먹고 살려고 그래요?”

“네가 없어도 지천에 깔린 것이 열매며, 산짐승이다. 내 먹을 것은 내가 충분히 구하느니라.”

“이틀을 굶고 계셨다는 분이 누구시더라? 아~ 기억이 안나네~”

“...”

선선한 산 위의 동굴에서 수련을 하던 시절이었다. 두 주먹만 가지고 중원의 사내들과 박투를 벌이던 때,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산에 틀어박혀 무공을 연마했었다.

매일 아침 이슬이 햇살에 걷힐 무렵, 산 아래에서부터 밀려오는 시원한 바람. 참 상쾌한 시간이었지… 시원하고…

그런데 지금은 왜인지 더웠다. 덥고, 뭔가 불편한 느낌이었다.

“으음… 더워…”

비단폭에 쌓여 잠에 들었었나? 매끄럽고 말캉한 이 감촉은 무엇인가.

“!!!”

잠결에 눈을 뜨니 왠일인가. 성숙한 여인의 풍만한 가슴골 사이에 얼굴을 쳐박고 있는게 아닌가?

“이, 이 무슨!”

지존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신으로 자신의 옆에 잠들어 있는 여인은 로즈였다. 이불을 걷어 올려도 그녀는 새근새근 잠에 빠져 있었다.

“서역의 여인들은 이토록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나체로 누워 잠에 들어 있는 여인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 하는 수 없이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우음… 일어 났어?”

로즈는 이불을 덮어주는 감각에 잠이 깨고 말았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사내라면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새햐얀 피부의 성숙한 여인. 긴 금발 머리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풍만한 유방을 가렸다.

전지(??)를 잊은 과실수는 때때로 가지가 휘어지곤 한다. 나뭇가지가 열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앉는 것이다.

그런 과실수처럼, 그녀의 얇은 허리는 어찌 저 풍만한 것을 달고도 꺾이지 않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당신이란 여인은! 어찌 함부로 옷을 벗고 외간 남자와 동침하는가? 남녀칠세 부동석인 것을…!”

그녀는 잠이 덜 깼는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왜 화를 내고 그래… 몸이 너무 차갑게 식어서 데워 주려고 한 거였다구. 그리고 아직 어려 보이는데? 너도 남자라 이거니? 동생 같아서 그런 건데…”

생각해 보니 침대 밖에서 일어서 있는 자신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벌거 벗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지존을 걱정하여 몸으로 그를 덥혀준 것이었다.

“크윽! 내 옷은 어디다 벗겨 둔 거야?”

“옷이 너무 더럽길래 빨래통에 넣어 두었어. 아무리 남자라도 그렇게 더럽고 헤진 옷을 입고 다니면 안된단다? 자, 그러지 말고 누나랑 코 자자?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어.”

벌거숭이 모습으로 방 안에 우뚝 서 있기도 우스웠다. 하는 수 없이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시 들어갔다.

그녀를 보지 않으려 등을 돌렸다. 이불도 덮지 않은 채 벽을 보고 누웠다.

“후후 귀여워.”

“...”

로즈는 이불을 들춰 지존을 덮어 주었다. 홍매가 그랬던 것처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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