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4화 (4/56)

〈 4화 〉 야한 여인 로즈.

* * *

한 여인이 계단을 내려오며 말을 걸었다. 그녀의 복장은 아슬아슬하기 그지 없어서, 상의로 가린 부위보다 살갗이 드러나는 부분이 더 많았다.

“흐음. 야밤에 뭐 하는 거야?”

“응? 로즈? 너야말로 안 자고 뭐 해?”

“자다 깼지. 손님 받았거든. 부자 손님이었어. 팁을 꽤 받았지. 한잔 할까?”

“난 술 안 한다니깐. 몇번을 말했는지.”

“으응~ 자기는 이럴 땐 얼마나 심심한 남자인지 몰라. 그러면 나랑… 좋은거 할까?”

피에르의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살짝 내렸다. 그녀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매혹적인 금발의 곱슬머리에, 깨끗한 파란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얼굴 뿐만 아니라 몸매 또한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피에르는 시큰둥했다. 빵을 찢어 수프에 적셔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백날 해보시지. 난 그런거 관심 없어.”

“난 그래서 자기가 좋아. 그래서, 다음 수업은 언제야 선생님?”

“보름달이 뜨는 날 정오에. 느티나무 아래에서.”

“자긴 그 때 제일 섹시하더라.”

“... 로즈, 너 말이야. 내 강의 들으려고 오는 것 맞지?”

“으음~ 잘 모르겠네?”

강의라니? 수업이라니? 피에르 녀석의 말투에 뭔가 모를 신비한 것이 녹아 있었다는 건 느꼈지만,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 모이는 정도라는 건 몰랐다.

무슨 강의를 하기에 사람들이 모이는 걸까? 그걸 묻기 위해 말을 꺼내려 하기 직전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앞에 다가오니, 풍만한 유방이 그대로 보였다.

중원에서 수많은 미녀와 만난 지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청년의 몸에 담겨 있어서일까, 그 고혹적인 광경은 자극이 상당했다.

“이 동방의 검은 머리 미남씨는 누구? 귀엽게 생겼네?”

지존은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괘씸했다. 미녀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어주는 것 자체는 여느 남자도 싫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중원의 절대자였던 그에게 귀엽다느니, 검은 머리라느니 말하는 건 좀 기분 나쁜 일이었다.

“어찌 아녀자가 의복을 단정히 하지 않고, 남자에게 함부로 색기를 흘리고 다니는가? 참으로 언짢기 그지 없는 일이군.”

로즈는 그런 지존이 귀엽다는 듯,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다시 한번 놀렸다.

“어머머! 우리 흑발 미남씨는 동방에서 온 왕자님 같네요? 왕자님! 그럼 소인을 첩으로 삼으시는 건 어떻사와요? 로즈는 왕자님 같은 사람이 좋답니다.”

“어이, 놀리는 건 그만 둬. 생긴 건 어리고 말라 보여도 귀신 같은 녀석이야. 아까는 나한테 무슨 기묘한 기술을 쓰더라니까? 점혈이라던가? 하여튼.”

피에르가 빵을 씹으며 핀잔을 주었다. 로즈는 포기할 수 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소년의 양 볼을 꼬집고 잡아당겼다.

“아이~ 귀여워서 그러지. 어머머 피부 탱글탱글한 것좀 봐. 아유 귀여워!”

“...”

그녀가 양 볼을 조심스럽게 잡고 늘어뜨리니, 어린 아이처럼 앳된 청년 특유의 쫀득한 볼때기가 주욱 늘어났다. 꼭 찹쌀떡을 쥐고 장난을 치는 어린애 같았다.

짜증이 났다. 점혈법으로 매운 맛을 보여주려고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가느다랗고 하얀 손목은 어린 아이의 손으로도 감싸 쥐여질 만큼 가냘팠다.

“아앗, 미안해. 화났어요 왕자님? 그만 할게요!”

로즈는 그를 응시하면서 옷섶을 가다듬었다. 꽤 어려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로즈 자신보다는 어려 보였다. 동생처럼 여겨지니 썩 귀여운 마음이 들었다. 청년의 외견이 꽤 미적으로 생기기도 했고.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다.

“흠, 흠. 피곤한 여자가 왔군. 안 그래도 피곤한데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나 먼저 자러 가도 되겠지 귀신?”

피에르가 지존을 향해 말했다. 그는 아까 지존에게 점혈법으로 혼쭐이 나고도 귀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기하지 못했다.

“귀신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지존이다. 이 몸은 지존이란 말이다.”

“알았어 알았어. 지존, 난 이만.”

피에르는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갔다. 지존이 대신 계산해준 방이었다.

“그런데 넌 왜 아직 내 옆에 앉아 있는 거냐?”

“음~ 난 미남 옆에 있는 걸 좋아하거든.”

“...”

옆에서 술잔을 닦던 주인장이 말했다. 그는 대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사내였다. 대머리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는 그가 젊었을 적 꽤나 험하게 살던 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봐 로즈. 수다스럽긴. 식사는 했나?”

“음~ 식사라, 그러고 보니 저녁도 안 먹고 손님을 받았구나. 그럼 오랜만에 맥주나 한잔 마실까나. 주인장 오빠~ 맥주 한잔 가져다 줘!”

“오랜만이긴, 어제도 마셨으면서.”

“오빠야. 손님한테 그러기야? 아무튼 오랜만이야.”

대머리 주인장은 오크통 아래에 달린 꼭지를 돌려 맥주를 뽑았다. 걸쭉하고 거품 가득한 갈색 술빛은 중원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것이었다.

“자, 로즈. 특별히 큰 잔에 따랐다.”

“응~ 고마워 오빠.”

그녀는 맥주를 벌컥 벌컥 들이켰다. 아저씨나 낼 법한 캬아~ 소리를 하는데 그마저도 여성스럽게 포장되어 보였다. 워낙 미인이고 육감적인 몸을 하고 있는 탓에, 어떤 행동을 한들 예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술을 꽤나 맛있게 먹는구나. 그건 뭐로 만든 술이더냐?”

로즈는 지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의 볼을 찹쌀떡처럼 늘였다.

“뭐로 만든 거냐니깐? 이 손 치우지 못해?”

“아아~ 화내지 말구~ 이 누나가 귀여워 해 주는데 우리 동방의 왕자님께선 뭐 그리 화를 내실까? 누나는 이래뵈도 이 골목에서 인기가 많단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주신지 몰라.”

“뭐 자랑이라고 이것저것 나불대는 게냐? 그나저나 그건 뭐로 만든 술이냐니깐?”

“꼬마 왕자님은 술을 마시고 싶으시구나? 그렇지만 그건 안 되어요~ 이 집 맥주는 독하답니다. 뭐로 만드느냐 하면 보리로 만들지~”

“흥, 질문에나 대답해라.”

그녀는 지존에게 계속 장난을 걸었다. 귀찮긴 했지만 싫지만은 않았기에 지존은 그녀의 장난을 적당히 받아주고 있었다.

덜커덕!

여관의 대문이 갑자기 열렸다. 대머리 주인장도 깜짝 놀랐다. 혹시 순찰이라도 왔나?

“어서 오십쇼. 숙박 하러 오셨나요?”

문을 열어젖힌 사내가 말했다.

“주인장은 필요 없고.”

좋게 봐 줘도 평범한 얼굴이라고는 못 할 못 생긴 사내였다. 하지만 골격은 시원시원하게 뻗은 것이 싸움은 꽤 하게 생겼다. 반짝이는 풀 플레이트 아머는 그의 신분이 꽤 높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가게 안을 훑어보았다. 그는 로즈를 발견하고 기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아! 내 사랑! 여기에 있었군! 후후후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몰라.”

그러자 로즈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마시던 맥주잔을 털썩 내려놓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와 눈도 마주치기 싫은 모양이었다.

“어딜 가시나 아가씨?”

사내는 윗층으로 도망 가려는 로즈의 팔목을 낚아챘다.

“이, 이러지 말아요!”

몸부림 치는 로즈를 우악스레 껴안은 그는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문지르며 탐욕스런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이렇게 살짝 튕기는 매력이 있다니깐. 로즈, 이러는게 너도 좋잖아? 서로 좋은 일 하자구!”

“당신은 싫어요! 이것 놔 주세요!”

사내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가만히 두고 볼 대머리 점장이 아니었다. 그의 신분은 낮았지만, 아무리 귀족이라 한들 남의 영업장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실제로 장사를 방해하는 귀족을 쫓아낼 권리 정도는 법에도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는 것이었다.

“손님! 로즈가 싫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앙? 대머리, 뭔 참견이냐? 너 내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아무리 그러셔도 거절하는 숙녀에게 그렇게 강제로…”

“천한 것이 시끄럽군. 방 3개 빌리겠다. 그럼 됐지?”

사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문 뒤에 서 있던 종자 2명이 들어왔다. 둘 다 큰 덩치의 사내였다.

“방값은 하나에 얼마요?”

종자 하나가 돈 꾸러미를 꺼내며 말했다. 그러나 대머리 주인장은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다. 과연 대머리의 흉터는 그가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알려 주는 표식이었다.

“팔지 않겠소. 여인을 저리 함부로 대하시다니. 내 여관은 신사만 받는다오.”

그러자 로즈를 껴안고 마구 희롱하던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보자 보자 하니 천한 놈이 할 말 못할 말 구별은 못 하는구나. 오늘 교육을 좀 해주마.”

사내는 로즈를 희롱하던 손에 건틀릿을 끼웠다. 쇠로 만들어진 건틀릿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빠아악!

대머리 주인장의 얼굴에 건틀릿이 직격했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주인장은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후후후. 별 것도 아닌 녀석이. 자, 내 사랑! 이제 나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 보실까?”

사내는 발버둥치는 그녀의 팔을 제압한 채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은 우악스런 사내의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읍! 으읍! 우으읍!”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잠자코 있으려 했던 지존이었다. 하지만 눈물이 흐르는 로즈의 얼굴을 보자 옛 기억이 떠올랐다.

홍매. 로즈는 젊은 시절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 홍매를 닮았다.

“그 손 놓거라. 싫다고 하지 않느냐.”

“?”

사내와 종자들은 황당해했다. 이 무슨 상황인가. 어찌 동방의 검은 머리 꼬맹이가 함부로 입을 놀리는가?

“놓으라 하였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삐걱거리는 건틀릿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는 철권이었다. 사내의 아버지는 상당한 권력자였고, 아들인 그는 엄청난 난봉꾼이었다.

“동방의 원숭이 새끼로군. 듣자하니 동양의 원숭이를 쳐죽이면 우끼끼 하고 운다던데, 이 새끼도 마찬가지인가 한번 봐야겠군.”

사내는 앉아 있는 지존에게 저벅저벅 걸어왔다. 건틀릿을 낀 주먹을 당장에라도 내려 치겠다는 듯, 어깨를 빙빙 돌리고 있었다.

사내는 정말 애고 어른이고 마구 때리고 다니는 인간 쓰레기였다.

종자 하나가 사내에게 귓속말을 했다.

“주인님, 화가 나신 것은 이해하지만…”

“앙? 뭐냐?”

“동방의 여행자를 함부로 때리면 주인님의 명성에 해가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버릇 없는 것을 어찌 하면 좋단 말이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결투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요. 저 건방진 원숭이 놈이, 느닷없이 주인님께 결투를 걸은 것으로 하는 겁니다. 결투란 신성한 것이니까요. 주인님은 저 녀석이 결투를 걸어서 마지 못해 거기에 응한 걸로 되는 겁니다.”

“흠! 그것도 괜찮겠군.”

사내는 지존의 앞에 있던 탁자를 걷어찼다. 탁자는 벽에 꽝 소리를 내며 부딛히더니, 갓 구워낸 비스켓처럼 바스라졌다.

“어이 원숭이 애새끼.”

“......”

“좀 전에 네놈이 무례하게 지껄인 말은, 이 몸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뜻으로 받아 들여도 괜찮겠지?”

“말이 많구나. 좋을 대로 하거라. 결투가 되었든, 전쟁이 되었든, 좋을 대로 해 보거라.”

“그렇다면 밖으로 나와라. 아프지 않게 죽여 주마 원숭아.”

지존은 이 상황이 정말 재미 있었다. 풀 플레이트 아머라는 것을 처음 본 그였다. 그의 눈에는 그것을 뒤집어 쓴 사내가 참 우스워 보였는데,

지존의 시선에서 그런 쇠갑주를 입는 사람은 겁쟁이 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자신의 무공에 자신이 없으면 철판떼기를 기워 입는단 말인가?

자신이 인간인 줄 착각하는 천산갑이라도 된단 말인가?

만면에 웃음기를 가득 띄고 있는 지존에 비해, 로즈의 하얀 얼굴은 창백해질 정도였다.

“꼬, 꼬마야! 지금이라도 얼른 저 분께 사과 드려! 누나는 괜찮아! 얼른 무릎을 조아리고 빌어! 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

“후후후 내 사랑.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그는 주저 앉아 있는 로즈의 옷섶을 우악스럽게 주무르며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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