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은자 피에르
* * *
한참을 달렸다. 도중에 구토를 할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먹은 것도 하나 없는데 자꾸 구토를 하니 배가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사내의 혼은 저승으로 가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몸은 지존의 몸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맑고 순수한 사내였다. 매우 불쌍한 남자이기도 했다.
지존은 중원에서 온갖 못 볼 꼴들을 보았다. 육편과 핏자국으로 더럽혀진 시체의 모습은 별 것도 아닌 것이었다.
내장이 널부러진 시체를 배고 잠에 빠지는 사람이 바로 지존이었다. 그러나 한참 말을 달리던 중, 철퇴로 으깬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었다.
분명 아까는 괜찮았는데, 간과 심장은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미청년의 것이라 마음도 여려지는 것일까. 끔찍하게 일그러진 고깃덩이 모습이 떠오르니 구토를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웨엑, 젠장. 빌어먹을.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군."
좋은 생각. 예쁜 생각. 추억들. 그나마 좋았던 기억들을 찾아다녔다. 가련한 이 몸이 가진 기억의 조각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 그건 처음 청년의 기억을 헤집어 봤을 때도 보았던 아멜리다.
같은 고아였던 꼬맹이 여자아이다.
두 가지 방향이 떠올랐다. 이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답이었다.
하나는 다시 중원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되찾는 것이요, 또 다른 것은 아멜리를 찾는 것이다.
아멜리. 그 아이는 사내가 동방 출신이라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다른 고아 아이들이 검은 머리라며 놀리고 때려도 아멜리는 그러지 않았다. 괴롭히는 아이들을 말리던 아이었다.
원래 지존의 성격이라면 이 몸의 주인이 뭘 원하였건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몸의 기억과 자신의 기억이 뒤죽박죽 섞인 지금은, 청년의 한이 자신의 한이었고, 사내의 슬픔이 자신의 슬픔이었다.
가슴에 응어리진 듯 갑갑하게 옥죄이는 한 맺힌 느낌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아멜리를 찾아야 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 했다.
그래. 그러기 위해선 일단 마을로 가야 한다. 얼른 가야 한다. 혹시라도 용병단 놈들이 추적 할 수도 있으니.
어서 마을로 도착한 뒤 뭘 좀 먹어야 한다. 그리고 자야 한다. 청년의 바싹 마른 육체는 벌써 한계에 다다른지 오래였다.
*
이틀인가 삼일인가. 혼미한 정신은 얼마나 시간이 흐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몸의 기억을 믿고 가장 가까운 마을을 향해 하염없이 갈 뿐이었다.
중간에 낙마하기도 여러 차례, 그 때마다 귀신 같은 솜씨로 낙법을 했다. 그 덕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진이 빠졌다.
도중에 정신을 잃었다가 깨면, 말은 시냇가를 찾아 물을 마시고 풀을 뜯고 있었다. 꽤 생존력이 강한 말이었다.
말이 물을 마실 때 같이 마시고, 말이 풀을 뜯을 때 잠에 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마을까지 왔다.
저녁이었다. 해는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기 직전, 성을 출입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질 때 즈음이었다.
성문은 체격 좋은 병사들이 단단히 막고 있었다. 이런 차림으로 성 문을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인종도 다른 꾀죄죄한 청년이 성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으리다.
"말아. 고마웠다. 네가 달려준 덕에 여기까지 왔다. 이제 풀어줄 테니 자유롭게 살아라. 체격도 괜찮고 생김새도 좋으니 필히 좋은 주인을 만날 게야."
채찍도 때리지 않고, 갈기털을 쥐어 뜯지도 않는 가벼운 소년. 지존이 그 말을 좋게 보았듯, 말 또한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푸르르."
헤어지기 싫다는 듯 투레질을 했다.
"이놈아. 너랑 같이 어떻게 저길 들어 가느냐? 이만 돌아가. 정 갈곳이 없다면 용병단 놈들에게 돌아가. 넌 발이 빠른 녀석이니 금새 돌아갈 수 있겠지."
말은 청년의 이마에 콧김을 뿜었다. 꼭 투정하는 어린애 같았다.
"이 녀석이. 난 성벽을 기어 올라갈 거다. 넌 손도 없잖냐. 돌아가래도."
하늘도 지존과 말의 묘한 우정을 갈라놓기 싫었는지, 마침 노인 하나가 지나갔다.
밀짚을 가득 싣은 수레를 노인 만큼이나 기운 없어 보이는 늙은 소가 끌고 있었다.
지존은 묘책을 떠올렸다.
"이보시오 노인 양반."
"이잉?"
노인이 뒤돌아 보니 왠 검은 머리 사내가 자신을 당돌하게 부르는 것 아닌가. 노인 양반이라니, 어디서 배운 표현인지 우습기 그지 없었다.
"뭐시여. 동방 놈아. 워디서 배워 먹은 말버릇이냐? 저기요 할어버지~ 요래 불러야지 이 자슥아."
지존 또한 중원에서 머리가 하얗게 샐 때까지 산 사람이었다. 노인이나 그나 동년배나 다름 없었다.
"나도 살 만큼 산 사람이오."
"잉? 킬킬킬, 웃기는 놈이 따로 없구나야. 그랴, 뭐 땀시 할아비를 불러 세웠는고? 바쁘다 요놈아."
"뭐, 보면 알겠소만, 꼴이 이런 모양에 신분증도 없는 몸이다 보니 성문을 출입할 방법이 없을 것 같소. 이 말이랑 같이 수레를 끌고, 나는 짚 속으로 들어가 숨겠소. 성문 안까지만 좀 부탁하오. 아, 물론 사례는 하리다."
"참내, 뭐, 맘대로 해라. 들키면 난 모른척 할꺼다? 아부지랑 싸워서 가출이라도 했다가 몰래 들어 오는가 보구만?"
"... 비슷한 거요."
디트리히 처럼 한심한 녀석이 타고 다니던 말이라고는 상상도 안 되었다. 발이 빠른 말인 것은 물론이었고, 쇠수레를 끌게 하기 위해 줄을 걸어도 놀라지 않았다.
역시 명마라는 건 사람이 찾아내는 것이었다. 디트리히 같은 녀석은 자신의 말이 이토록 좋은 준마인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지존이 밀짚 속에 숨으니 노인은 성문을 향해 출발했다.
"스미스 할아범?"
문지기가 노인을 보고 말했다. 노인과 문지기들은 꽤 친한 사이였다. 덕분에 밀짚 속을 뒤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으응, 나여."
"할아범. 거 일찍 일찍 좀 다니소. 밤 늦게 뭘 그리 다니는 거요?"
"이 나이 되어 봐. 무릎이 시려서 빨리 빨리 다닐 수가 없어. 금방 밤이 된단 말이야."
"백살도 넘게 살 양반이 맨날 죽는 소리요."
"킬킬킬 수고허이."
"조심히 가소 할아범."
성문을 떠나 한참을 더 갔다. 노인은 지존을 불렀다.
"어이 흑발 머리. 이제 나와라. 다 됐다."
지존은 밀짚을 헤치고 수레에서 튀어나왔다. 주머니를 뒤져 은화 한개를 꺼냈다. 지존이 서역의 어느 나라인지도 모를 곳의 화폐 가치를 알 수가 없었다. 용병단에 갇혀 소년기를 보낸 청년의 기억 속에도 별다른 화폐 가치의 정보가 없었다.
대충 은화 한닢이면 충분하겠지 싶어 노인에게 쥐어주었다.
노인은 눈이 땡그래지더니 지존의 정수리에 꿀밤을 날렸다.
"이잉? 임마야. 늙은이를 놀리냐? 코흘리개 돈 받아서 뭐 좋다고. 됐다 임마. 근데 너 꽤 부잣집 아들래미인가 보구나? 아부지가 뭐 동방에서 온 상인이시냐?"
"모르오."
지존은 신세 지고는 못 배기는 성질이었다. 이것은 은혜도, 원수도 마찬가지여서, 중원에서 지존에게 원수 진 가문은 멸족을 당할 정도였다.
누가 나무라지도 않는데, 값을 치르겠다 하고 그냥 넘어가기엔 노인의 성품이 너무 좋아 보였다. 쇠수레의 빈틈에 은화 하나를 꽂아둔 뒤 말에 올랐다.
"가냐? 꼬맹이?"
"가오. 고맙소."
"이름이 뭐냐?"
"그런 것 모르오."
"하나부터 열까지 웃기는 놈이로군. 잘 가라."
노인과 헤어지니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말을 타고 며칠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음식을 파는지도 알 수 없었고, 어디가 여관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무작정 말을 타고 돌아 다니며 쉴 곳을 찾기도 애매했다. 괜히 말발굽 소리를 내며 돌아 다니다간 야경꾼을 만나 귀찮아 질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골목의 조용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부랑자가 있을지도 몰라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다행히 누구도 없었다. 지존은 벽에 등을 기댄채 꾸벅꾸벅 졸았다.
"어이."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한 삐쩍 마른 사내가 그를 내려다 보았다. 인상도 맑고, 목소리도 탁하지 않은 것이, 나빠 보이는 자는 아니었다.
"누구시오?"
"누구시오라니? 내가 할 말인데? 거긴 내 자리란 말이야."
"..."
골목길에 내 자리, 니 자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귀찮고 짜증 나는 와중이라 점혈법으로 기절 시켜 버릴까 고민이 되었다.
사내는 신기해 하는 얼굴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 희한할 정도로 순수한 눈빛이란!
꼭 육신이 벌거벗겨져 영혼까지 그대로 보여지는 느낌이었다.
사내는 다시 말했다. 퍽 신기하다는 목소리로.
"허! 이거 이거, 이놈 귀신이구만?"
왠지 치부를 찔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따지자면 중원의 귀신이 구천을 떠돌다가 서역의 한 용병단 출신 미청년의 몸에 들어온 것이니.
"누구냐니깐?'
"나? 내 이름은 피에르. 그럼 넌 누구냐?"
"나는… 지존이다."
그러자 피에르는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풉! 으학학하! 귀신은 귀신인데, 정신이 이상한 귀신이구나! 하하하하"
"..."
피에르는 한참을 더 웃었다. 신경질이 난 지존은 깔깔거리는 피에르의 혈도를 짚었다.
"!"
피에르의 손 부분을 살짝 만졌을 뿐인데 피에르는 즉시 고꾸라졌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괴이한 저릿거림이 온몸에 퍼졌다. 수천마리의 개미떼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타고 올라오는 듯 했다.
"까불지 말고 꺼져라. 시끄러우니까."
"윽, 으윽, 역시, 귀신은 귀신이구만. 묘한 기술을 써대네? 아악! 미안! 이제 그만 놔 줘! 놔 줘야 가던 말건 할 것 아냐?"
"흥."
"휴, 그런데 말이야, 네놈 갈 곳도 없는 처지인가본데? 나도 마찬가지라구. 거, 같은 처지끼리 평화롭게 지내는 것 어때?"
피에르는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었다. 그와 대화를 하다보니 디트리히가 모아둔 금액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디트리히 그 빌어먹을 개새끼는 갈 곳 없는 고아의 몸을 팔아 그 정도 수준의 돈을 쌓아가고 있던 것이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돈이 꽤 있으니 길에서 노숙하기도 애매했다. 게다가 피에르는 저렴하고 좋은 숙소를 알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피에르를 통해 이 세상의 상식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좀 방정맞긴 했지만 진지한 구석도 있었고, 세상을 통찰하는 듯한 신비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지존이 이형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챈 것도, 귀신이라 표현한 것도 피에르 특유의 직감 덕분이었다.
숙소는 골목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잠깐 움직인다고 해서 야경꾼에게 혼날 일은 없었다.
둘은 한 허름한 여관에 들어갔다. 피에르의 몫까지 대신 지불해 주었다. 숙소에서는 마침 남은 수프와 빵이 있었고, 약간의 잔돈을 내는 것으로 그걸 먹을 수도 있었다.
역시 입맛에 맞진 않았다. 중원에서 먹었던 호화로운 볶음 요리와 쌀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흐흐 뭘 이런걸 다. 공짜 숙소에 공짜 식사라니, 귀신한테 말 걸길 잘 했군."
"귀신이라 부르지 마. 나는 지존이다. 중원을 평정했었지."
피에르는 웃음을 참으려 애쓰며 말했다.
"아아, 그래 그래."
"도저히 믿질 않는 눈치로군. 나는 실제로 중원의 무림을 내 발 밑에 두었었다. 사람들은 나를 천마라 부르기도 했지. 그러다가 병이 들었다. 제자들은 연구를 거듭해 만든 새로운 사술을 나 몰래 사용했다. 그것이 통한 덕분인지, 내 혼은 죽어 소멸하지 않고 이곳으로 넘어온 것이다."
터무니 없는 미친 소리라고 생각해서 말이 없는 걸까, 아니면 진심을 알아보느라 생각 하는 것일까. 그 맑은 눈으로 지존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흠, 아무래도 좋아. 그런건 신경 안 써. 사실이든 아니던, 생각할 필요가 없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빵이랑 수프는 진짜인 것 같네. 일단 눈 앞만 생각하겠어.”
“네 놈도 요상하기가 참 특출난 놈이로군.”
두 이상한 녀석들은 식사를 이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