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 걱정 (6)
* * *
에스더가 사라진 뒤, 여전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혼자서 아무도 없는 숲길을 걸었다.
흐물흐물 일그러지는 에스더를 보고 난 뒤여서 그런지, 숲속이 조금 무섭게 느껴진다.
나무들 사이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에서 갑자기 네거티브가 뛰쳐나올 것만 같다.
뭐, 네거티브가 나와도 무서울 건 없지만….
아니, 지금은 무서워 하는 게 맞나?
에스더가 박쥐날개 네거티브에서 물컹물컹 딸기초코 젤리가 된 지금, 내 왼손의 촉수는 제대로 기능할까?
“괜찮은 거 맞아?”
나는 괜히 왼손을 들어 손등에 대고 질문했다.
그러자 왼손의 촉수가 꿀렁거리며 핏줄을 한번 비틀었다.
멀쩡하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그때, 숲길에서 무언가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게 왼손을 통해 느껴졌다.
핏줄이 당기는 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그곳에는 회색의 작은 토끼 한마리가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나는 토끼에게 다가가며 손에 든 꼬치를 그대로 입에 물었다.
“토끼…?”
감염체인가, 하고 보니…감염체는 아니다.
눈의 색도 멀쩡하고, 감염체 특유의 뭉개짐과 과성장이 없다.
평범한 산토끼다.
나는 가만히 있는 토끼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토끼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내게 머리를 쓰다듬어졌다.
신기한 기분이다.
A 시는 역시 다른가.
D 시에서는 바닥을 기어다니는 쥐도 잡아 구워먹고는 해서, 이런 작은 동물은 보기 어려웠다.
동물을 풀어 놓을 정도로 신경써서 할 줄은 몰랐는데…역시 A 시라고 해야 할까.
사람들이 여유있어서 길거리의 동물들을 잡아먹지 않으니 이런 것도 가능한 거겠지.
나는 나를 전혀 경계하지 않는 토끼를 내려다보다가, 꼬치구이의 고기를 하나 빼서 건네줬다.
“끽! 끽…!”
그러자 토끼는 작은 손으로 내게서 고기를 받아가, 급하게 씹어먹기 시작했다.
꽤나 배가 고팠던 것 같다.
나는 순식간에 고기를 해치운 뒤 내게 손을 내미는 토끼에게 꼬치구이를 한 조각 더 던져줬다.
그건 그렇고…산책로에 토끼까지 있다니…이건 꽤 좋은 데이트 코스가 아닐까?
산책도 하고, 숲도 보고, 동물도 보고.
확실히, 커플들이 많은 만 하다.
“끽!”
“다 먹었으면 이제 가.”
“끽….”
또다시 내게 손을 내미는 토끼에게 저리 가라고 손짓하자, 토끼는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뒷걸음질쳐 풀숲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토끼를 뒤로 하고 남은 꼬치구이를 먹은 뒤 나무 막대를 근처 쓰레기통에 던졌다.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해가 저물어가며 빠르게 어두워진다.
“음…?”
지직거리며 켜진 가로등이 숲길을 차례로 밝히고, 저 멀리 누군가가 보인다.
어두운 숲길이 밝아지며 모습을 드러낸 자는 나처럼 혼자 산책로를 걷는 중인 사람인 것 같았다.
멀리에서 봐도 성별을 알 수 있는 남자는 가로등이 자신을 비추자 연극이 시작된 것처럼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남자는 몸에 달라붙은 벌레를 찾는 것처럼 두 팔을 어깨높이로 들고 두리번거리다, 내 쪽을 바라봤다.
아니, 바라봤다기보다는…고개를 향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
깊게 눌러쓴 중절모, 멀리에서도 보이는 굵직한 웨이브의 수염, 긴 코트, 양복, 구두.
깔끔한 복장이다.
그런데도, 뭔가…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자…자네!”
“예?”
남자는 갑자기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손으로 코트 옷깃을 잡아 얼굴을 가리며 나를 불렀다.
쇠를 긁는,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며 노인에게서 뒷걸음질쳤다.
“...뭡니까?”
“그, 부…부탁 좀 하나 해도 되겠나? 어디 연락을 해야 해서…핸드폰, 핸드폰 좀 빌려주게.”
“비전폰 말이에요?”
비전폰을 핸드폰이라고 할 정도면 진짜 나이가 엄청 많이 든 사람이다.
조금 전의 뭔가 찾는 듯한 몸짓은 비전폰을 찾는 거였나?
갑자기 집에 전화할 일이라도 떠오른 거겠지…?
미안하지만, 비전폰을 빌려줄 수는 없다.
내 비전폰은 평범한 비전폰이 아니다.
무려, 마법소녀 최면어플이 깔린 비전폰이다.
“...없는데요?”
“뭐? 아, 아니…요즘 핸드폰 안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면 그쪽은요? 그쪽 폰 쓰세요.”
“나는…그, 윽…그, 그래…핸드폰을 두고 온 것 같아서 들고왔나 좀 보려고…전화 좀 해 주지 않겠나?”
“아니…뒤져보시고 없으면 없는거겠죠….”
내가 거절하자 노인은 당황하며 품을 뒤졌다.
다시 한 번 핸드폰이 있나 찾아보나보다 하고, 나는 노인을 뒤로 한 채 자리를 피하려 했다.
갑자기 비전폰을 빌려달라고 하는 이상한 노인 목소리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니, 수상해도 너무 수상하다.
“크윽…어쩔 수 없지…여길 잠깐 봐 주게.”
노인은 코트를 한층 더 여미고, 중절모에 얼굴이 완전히 가려지게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게 흰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똑같이 장갑을 낀 한쪽 손에는 낡은 시계가 들려 있었다.
그대로, 노인은 나를 향해 손가락을 연속해서 튕겼다.
딱, 딱, 딱, 딱 하고 튕기던 손가락이 잠시 멈추고…크게, 딱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한 번 튕긴다.
나는 이게 뭐 하는 건가 해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그러자, 노인은 튕기던 손가락을 내게 펴서 내밀며 다시 한 번 말했다.
“핸드폰을…아니, 비전폰을 내게 주게나.”
“...뭐야?”
“...어?”
뭐…신나서 리듬이라도 타며 비전폰을 건네줘야 되는 건가?
왜 손가락을 튕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흰 수염을 꿈틀거리는 노인의, 시계를 쥐고 있는 손등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니…괴수교잖아!”
장갑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T자 문양.
옛날, 네거티브가 나타나기 전에 있던 종교의 문양인 십자가에서 머리 부분을 잘라낸 듯한 형태.
집에 찾아오는 괴수교 포교자의 손에 들린 책자에서 질리도록 목격한 문양을 본 나는 기겁하며 노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와, 진짜…요즘은 포교를 이렇게 하나? 뭐, 내 번호를 적어서 스토킹이라도 하려고?”
“아니…자, 자네…?”
“이젠 여자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쓰네! 빨리 저리 가세요! 나 그런 거 안 믿어요!”
“윽?!”
정체를 알아차리고 화를 내며 쫓아내자, 노인은 깜짝 놀라며 내게서 등을 돌리고 달아났다.
비전폰을 건네주면 번호를 적거나, 아니면 그대로 들고 튀어서 괴수교 사람들이 가득한 곳으로 끌고가려고 한 걸까?
포교를 이런 식으로 하다니…무서운 세상이다….
왠지 보자마자 기분이 나쁘더라니, 괴수교 사람이라서 그랬나보다.
사이비 종교는 언제 봐도 무섭다.
나는 노인의 숨결이 닿았을 옷을 손으로 털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우…기분 나빠.”
괴수교는 어디에도 있다고 하더니, 이런 곳에까지 있을 줄이야.
데이트 코스로 좋을 것 같긴 한데, 이렇게 괴수교 사람이 포교할 준비를 하고 숨어있으면…산책로는 오지 않는 게 좋으려나.
오게 되면, 언덕에서 해 지는 거나 구경해야겠다.
해도 졌고, 빨리 집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때, 그레이프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날아왔다.
내 짐을 가지고 가느라 조금 늦는다는 내용이다.
나는 그레이프에게 나도 집에 가는 중이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 오토바이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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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오.”
자동운전 기능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철문 앞에서 그레이프와 마주쳤다.
그레이프는 마법소녀 모습으로 변신한 채 눈가를 바이저로 가리고 등에 내 짐들이 가득 든 가방을 메고 있었다.
그레이프는 바이저를 손에서 내린 바이저를 손으로 쥐어 없애고, 빛에 감싸여 양복을 입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일찍 왔네?”
“...조금 늦었네요?”
“별로 늦게 온 것 같지는 않은데…그레이프가 너무 빠른 거 아냐?”
“앵거가 먼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아, 그래도 엄청 빨리 온 건 아니에요.”
그레이프는 옷매무새를 바로 잡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겨 묶은 머리를 다시 한 번 정돈했다.
머리가 조금 헝클어진 걸 보니, 아무래도 지하철 같은 걸로 온게 아니라 건물 위를 달리거나 해서 집까지 온 모양이다.
분명 거리상으로는 내가 가깝고, 그레이프가 훨씬 멀었을 텐데…이렇게 빠르니까 오토바이를 안 타는 거겠지.
“알고 있을테지만…짐 가져왔어요.”
“아, 고마워…무겁진 않았어?”
“무거울리가 없잖아요? 아참, 저녁은 먹었어요? 아니면 아직…?”
“아직. 그레이프는?”
“저도 아직…같이 먹을까요?”
“그레이프가 해주는 거야?”
“후후…해, 해줄게요. 아, 카드는 잘 만들었고요?”
“응. 그레이프는 오늘 회사 어땠어?”
“앵거가 없다는 거 빼고는 평소랑 똑같았어요.”
나는 그레이프와 대화하며 오토바이에서 내려 헬멧을 벗은 뒤, 손으로 오토바이를 잡아 끌었다.
그러자 그레이프가 집 입구의 철문을 열고, 내 뒤를 따라왔다.
차고까지 걸어가 오토바이를 집어넣은 나는 그레이프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앵거, 혹시 오늘 저녁으로 먹고 싶은 건….”
그레이프는 구두를 벗으며 말하다가, 다시 구두를 신었다.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그레이프를 보며, 회사에 두고온 거라도 있나 하고 있자, 그레이프가 차고 문 옆쪽의 현관으로 넘어갔다.
“...저기, 앵거…잠깐만 저 다시 나갔다 와도 돼요?”
“응? 어….”
그레이프는 방 안에 내 짐가방을 내려놓은 뒤, 현관문을 열고 다시 나갔다가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방금 막 온것 처럼 바쁘게 들어온 그레이프는 현관에서 구두를 벗으며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어…다녀…오셨어요?”
“네~잘 다녀왔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그레이프는 만족한 듯 활짝 웃었다.
…그냥 집에 왔을 때 내가 있기를 바란 건가?
하긴, 이렇게 큰 집에 혼자 살았을테니, 그럴 수도 있지.
“뭐, 뭔가…이상한 기분이네요. 아직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는다고 해야하나…아침에 봤을 때에도 신기했지만, 제 집에 오니까 앵거가 있다는 게…?”
“앞으로 같이 사는거잖아.”
“후…후우…그렇죠오…? 앞으로, 같이…사는거죠…? 이렇게, 집에 오면 인사하고? 같이 자고? 같이 살고?”
내 예상이 맞는지, 그레이프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좁은 집에 살던 나와 다르게 그레이프는 이렇게 큰 집에 살고 있으니까, 집이 더 춥고 외롭게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럼, 나도 얻어 사는 입장이긴 하니 그레이프의 바램을 좀 들어주도록 할까.
“샤워 먼저 할래? 아니면 저녁 먼저? 아니면 다른 거?”
“...네엑?”
나는 그레이프의 상황극 같은 걸 받아주며 장난을 쳤다.
내가 킥킥 웃으며 말하자, 그레이프는 자켓을 벗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반응에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응? 그레이프 이거 몰라? 비전넷에서 유명한 얘기잖아.”
“어…아, 아는데요…? 너무, 잘…아는데요?”
그레이프는 얼굴을 붉히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셔츠 단추에 손을 대, 옷을 조금씩 벗기 시작했다.
“…그래도 샤워 먼저? 하고 하는게…저 땀도 좀 났고?”
“농담이었는데….”
“...농담?”
“아니…어제랑 오늘 그렇게 섹스해놓고…집에 오자마자 또 하려고?”
“어, 어….”
“...아니지?”
나는 정말로 바로 벗고 섹스할 것 같은 그레이프의 모습에 겁을 먹었다.
당장에라도, 그러고보니 어차피 섹스하면 땀이 나니까 샤워하기 전에 해도 되겠네요 하고 말하며 침대로 끌고갈 것 같다.
다행히 그레이프는 농담이라는 말에 실망하며, 단추를 다시 잠갔다.
“당연히, 아니죠….”
“그치? 아무리 그래도 그건…그레이프가 매일매일 나랑 섹스하려고 집에서 같이 살자고 한 것도 아닐테고.”
“...그야, 당연…하죠?”
나는 그레이프에게 말하며 내 짐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세탁물이 많이 있으니까, 이대로 여기에서 세탁할 걸 전부 꺼낸 뒤 잡동사니를 방으로 가져갈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짐가방 안에서 망가지지 않게끔 위쪽에 곱게 넣어둔 갈색의 양 인형을 꺼낸 나는 차례로 물건들을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어?”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그레이프가 다가와 인형을 집어 들었다.
그레이프는 다른 것처럼 물에 젖지도 않고, 불에 탄 흔적도 없는 깔끔한 인형을 손에 든 채 짐가방을 뒤지는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시선을 느끼고 그레이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아니…이거, 잘…챙겼네요?”
“그레이프가 선물해 준 거잖아.”
불 속에서도 버틴 녀석이고, 래피드가 안았던 인형인데, 심지어 비싸기까지 하다.
이사를 해도 버릴 수는 없지.
덤덤하게 말하고 다시 짐가방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갑자기 등쪽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몸을 떨었다.
…뜨겁다.
이거, 촉감이…옷을 입은 게 아니다.
그레이프는 어느새 상의를 벗은 상태였다.
“...앵거.”
“...어?”
그레이프는 뒤에서부터 천천히 손을 뻗어 나를 안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안는 게 아니다.
끈적하게 몸을 쓸어내리듯 내려온 손길이, 자지를 잡아 쥔다.
“아, 안한다매….”
“...안 한다고는 안했는데요?”
“이 거짓말쟁이….”
자지가 멋대로 빳빳하게 세워진다.
나는 짐가방 위에 올린 손을 꽉 쥔채 이를 악물었다.
그레이프는 천천히, 내 자지 밑의 축 처져있는 것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앵거.”
그레이프는 내 귀에 대고,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로 끈적하게 말했다.
“빨리, 정자 만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