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 최면물-296화 (296/299)

< 296화 > 걱정 (3)

{비전폰이 망가질 정도면 큰 불이 났던 거 아니에요?]

{언제 불난 거에요?]

{저 돌아가고 나서?]

{화상 입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병원?]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고…지금은 친구 집에서 머물고 있어요.}

{친구 집…?]

래피드도 메시지를 보내는 속도가 무서울 만큼 빠르다.

혹시 마법소녀들은 원래 이런 속도로 대화하는 건 아닐까?

내게는 조금 벅찰 정도로 빠르니, 천천히 해 줬으면 좋겠다.

{친구 집에서 머물다뇨…?]

[집에 불이 난 것 때문에 살던 집에서 나가게 되어서 신세를 좀 지고 있어요.}

{왜 불이…?]

[자는사이에 난 거라서…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집에서 불이 났는데 쫓겨났다고요…? 재난시민 보호법 위반 아니에요?]

래피드는 그레이프와 거의 같은 반응을 하며 비슷한 말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재난시민 보호법은 래피드가 발의한 법안이었지.

나는 그레이프에게 했던 말과 거의 같은 말을 래피드에게도 해주려다가 손을 멈췄다.

'집세도 좀 밀렸었고, 망가뜨린 것도….'

화재를 이유로 쫓아내는 건 불법이지만, 관리미흡과 월세 미납으로 쫓아내는건 합법이다.

하지만, 래피드한테 이런 말을 하면 나를 안 좋게 보지 않을까.

…그레이프는 방을 망가뜨린 당사자이니 이런 얘기를 해도 되지만, 래피드는 나를 월세도 안 내고 집도 망가뜨리는 불량한 시민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아뇨아뇨, 쫓겨난 게 아니라 집주인하고 서로 합의해서 나온거에요.}

{네?]

[집주인 할아버지는 집에 불 내는 불길한 사람 나가서 좋고, 저도 갑자기 불 나는 불안한 집 나와서 좋으니까, 다른 문제가 있어서 나온 건 아니에요.}

{그래도….]

[저도 제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든 집에 불이 나게 된 게 미안하고…갑자기 화재가 난 것도 불안해서…정말로 별일 아니에요.}

갑자기 말을 꾸며내느라 점점 이야기의 앞뒤가 허술해져가는걸 느낀 나는 적당히 말을 끝맺었다.

당사자끼리 서로 얘기를 잘 끝냈고, 싸운것도 아니고, 쫓겨난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얘기를 더 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말문이 막혔는지 침묵하고 있는 래피드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다친 곳도 없는데 래피드가 걱정해주니까 괜히 기분은 좋네요.}

래피드는 누군가가 다친다는 것 자체에 상당히 예민하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기만 해도 집주인 문제는 잊어버리고, 내가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예상대로, 래피드는 곧바로 내게 짧은 답장을 남겼다.

{그런거로 기분 좋아하지는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좋아, 화제가 변했다.

문장만으로도 래피드가 주목하는 방향이 변했다는게 확실히 느껴진다.

나는 화제를 완전히 돌려버리기 위해 다치는 것과 관련된 얘기를 계속했다.

[래피드야말로 훈련하면서 다치거나 하진 않았어요?}

{저는 안 다치니까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다쳐도 바로 마법 써서 원래대로 돌아가고….]

[래피드도 다치기는 하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앵거 씨인데, 왜 저를 걱정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래도 걱정되니까요.}

미묘한 분위기가 화면 위로 감돈다.

간질간질하면서도 손끝이 저절로 화면을 톡, 톡 하고 두드리게 된다.

직감적으로 래피드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애쉬는 훈련상대로 조금 거칠긴 하지만, 그래도 정말 걱정 안 해도 괜찮은데….]

그대로 래피드와 대화를 이어가려던 나는 래피드가 보낸 메시지에서 애쉬의 이름을 읽고 손가락을 멈췄다.

조금 들뜨려 하던 기분이 차갑게 식어 내려온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지만, 애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앵거?)

그렇게 애쉬와 있었던 일이 날카롭게 찌르듯이 기억나려던 순간, 그레이프의 메시지가 비전폰 화면 상단을 채웠다.

래피드와 대화하는 사이 메시지가 멈춘 게 이상해 보인 듯 하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지…위를 슬쩍 읽어본 나는 대화창을 바꿔 그레이프에게 답장했다.

[취업은 일단 그레이프 말대로 하는것도 좋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준비는 해야지…?}

{너무 그렇게 바쁘게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요? 평일에 준비하고 주말 정도는…같이 보내도…?]

[그건…그래도 좀 갑작스럽고….}

{그럼 주말에 제가 같이 취업준비하는거 도와줄게요!]

[아니, 사실 선약이 있어서….}

{선약..요…?]

맞아, 래피드랑 언제 몇시에 만날지 얘기를 안했다.

래피드랑 주말에 만나려면 언제 만날지 일정을 얘기해둬야한다.

그레이프와 대화하며 중요한 사실을 떠올린 나는 대화창을 바꿨다.

[래피드 씨, 혹시 이번 주말에는 몇시에 만나는게 좋으세요?}

{네? 이번 주말에…?]

[걱정되니까 좀 보고싶어져서….}

(누구하고…?)

(몇시부터 몇시까지?)

(언제 약속한 거에요?)

(친구?)

(앵거 친구 있었어요…?)

자연스럽게 래피드에게 만날 시간을 묻고 있자니, 그레이프에게서 메시지가 연달아 날아온다.

지금 그걸 묻고있는 와중인데…그건 그렇고 친구 있었어요? 라니….

아무리 없는게 사실이라지만 이건 너무 뼈아픈 문장이다….

다시 대화창을 바꾸고, 그레이프에게 답장한다.

[아니…딱히 친구 만나고 그런건 아니고…그냥 그런거 있잖아.}

{그런게 뭔데요?]

[그…취업 도와주는….}

{취업 지원사업 얘기하는 거에요?]

{15번구역에 예약했어요?]

15번 구역 구청에서 취업 지원을 했던가…?

15번 구역은 일자리라고 해봤자 공장들 뿐이라서, 딱히 지원사업을 하는 건 없었던 것 같은데….

묘하게 오싹한 느낌과 함께 찾아온 의문에 잠겨 대답하지 않고 있자, 래피드의 메시지가 화면 위에 알람창을 띄웠다.

(죄송해요! 저 이번 주 부터 주말은 조금 힘들 것 같아요!)

“어…?”

뜻밖에도, 래피드는 내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다.

생각하지도 못한 소식에 놀란 나는 또다시 대화창을 바꿨다.

정신없이 대화창을 바꾸는 사이, 래피드는 내게 만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줬다.

{이번에 갑자기, 저도 막 알게 된 건데…조금 일이 있어서.]

{대기를 좀 해야하게 됐어요…그러니까, 당분간 매일 지원 대기를 해야 하고…]

{주말에 그렇게 만나는 건…만나기 싫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저도 만나고 싶은데…다른 마법소녀들도 얽혀있는 일이라서….]

{아, 큰 문제는 아니에요! 앵거 씨가 걱정할만한 일은 아니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대기해야해요….]

다행히, 내가 잘못한 게 있어서 만나기 싫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래피드가 다급하게 변명하는걸 보아하니, 정말로 뭔가 일이 있어서 만날 수 없는 것 같다.

이번에 생긴 일…대기…당분간….

당분간…그러니까,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다른 마법소녀도 얽혀있는 일, 최근에 일어난 문제라면 그레이프가 D 시에서 겪은 일과 뭔가 관련이 있는걸까.

래피드는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하니까, 원거리에서 대기할 수 있기도 하고…먼 거리에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 상시 대기…아마도, 맞겠지.

한동안 래피드와 주말에 데이트하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지…래피드는 마법소녀니까.

그래도 혹시나 시간이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한 번 더 질문했다.

[근데 그러면…쉬는 날은 당분간 없는 건가요?}

{네….]

{일이 끝나면 바로 연락할게요!]

{일 끝나기 전에도 연락하고, 문제 해결되고 바로 연락해서 만나면….]

[쉬는 시간도 없이?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에요?}

{쉬는 시간이 없지는 않아요! 쉴 때는 쉬는게 중요하다고 했고, 주말에 못 쉬는 대신 평일은 오후까지 애쉬가 대신 대기해주겠다고 했어요.]

{오전에 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평일 오전이면 래피드는 자유시간, 애쉬는 한 장소에 가만히 있는다는 거지?

애쉬 걱정 없이 래피드랑 데이트 할 수 있다, 이 얘기인 게 맞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게 느껴진다.

[그러면 평일 오전에 만날 수는 없을까요?}

{평일 오전에요?]

평일 오전이면 내 쪽도 그레이프가 출근해 있을 때다.

애쉬 몰래, 그레이프가 출근해서 할 일이 없을 때 래피드랑 데이트하며 보낼 수 있다니.

매일매일 만족스러운 한 때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평일 오전….]

[안돼요?}

{아뇨! 안되는게 아니라….]

[오늘 지금은…힘들겠지만, 괜찮으면 내일이라도 보고 싶은데.}

{그게…저…그러면 정말로 몰래 나가는거라…쉬는것도 중요하다고…해서.]

[그러면 평일에도 당분간 못 보는 거예요?}

{일단…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위험할지도…모르는데….]

(앵거? 답장이 왜 없어요?)

또 깜빡했다.

나는 래피드와 대화하느라 답장을 미루고 있던 그레이프에게로 다시 대화창을 바꿨다.

두 사람과 동시에 대화를 하는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정신이 없다.

[그레이프 얘기 듣고 보니까 딱히 예약을 해둔 것도 아니고…나중으로 미룰까 생각하고 있었어.}

{어? 나중으로…?]

[주말에 그럼 같이 놀러 가자. 어디 가고싶은 데 있어?}

{저는 앵거랑 같이면 어디든 좋은데….]

[그래도 가고 싶은 곳 없어?}

{그러면…사실 아까 조금 찾아보던건데…여긴 어때요? 15번 구역에서 그래도 여기가 분위기도 좋고 맛있대요.]

(일단 이번 주는 저도 상황을 봐야할 것 같아서…내일은 조금….)

그레이프가 보내준 링크를 누르고 레스토랑 소개를 읽어보다가, 잠시 침묵하던 래피드에게서 메시지가 오자마자 다시 대화창을 바꾼다.

비전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릴 뿐인데 숨이 막힐 정도로 바쁘다.

그보다, 래피드는 이번 주 전체가 전부 어려운 건가….

[어쩔 수 없네요. 그러면 다음주에…?}

{네! 다음주에는, 아무리 적어도…한 번 쯤은, 잠깐이더라도 꼭 봐요!]

…D 시에서 이상한 일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번 주는 바쁘겠지.

이번 주가 전부 안된다고는 했지만, 평일 데이트 자체를 거절한 건 아니고, 오히려 다음 주에 만나고 싶어하고 있으니 아직 아쉬워하기는 이르다.

나는 다음 주를 기약하며 답장을 보냈다.

[네, 다음주를 기대하고 있을게요…아, 주말에 친구랑 놀러다니면서 래피드 씨가 좋아할만한 곳 있나 찾아볼게요.}

{주말에 친구하고…? 다음 주말에요…?]

[아뇨, 이번 주말에.}

{그때 저랑 만나자고…하지 않으셨어요…?]

[래피드 씨랑 만나고 싶어서 거절하다가 그냥 만나려고….}

[후기 보니까 런치도 맛있다는데 먼저 가서 먹어볼래요?]

[가볼게.}

{네?]

[아, 잘못 보냈어요.}

나는 실수로 그레이프에게 할 메시지를 래피드에게 보내버리고, 대화창을 바꿔 제대로 답장을 보냈다.

다행히 별거 아닌 메시지였지만, 실수로 이상한 걸 잘못 보내지 않게 주의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레스토랑 주소가 나오는 링크를 확인한 뒤 다시 래피드와의 대화창으로 돌아오자, 래피드가 조금 뜬금없는 질문을 보내왔다.

{앵거 씨는 친구 많아요…?]

[네?}

왜 그레이프도 래피드도 오늘따라 내가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다시 깨닫게 해주고 싶어하는 걸까.

나는 쓰라린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이건 많다고 대답해야 하는걸까, 적다고 대답해야 하는걸까.

{혹시 친구중에 여자가 몇명…이에요?]

[그건 왜….}

{대답해주세요.]

대답하지 않고 있자, 다른 질문이 이어서 보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질문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화창에서 묘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한 명요….}

래피드는 여자친구 후보니까, 여자인 친구를 묻는거라면 한 명이 전부다….

나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래피드는 곧바로 읽음 표시를 띄운 뒤 조용히 있다가, 조금 전에 하던 얘기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을 꺼냈다.

{저 내일 시간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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