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 걱정 (1)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다가 천천히 이성을 되찾았다.
몸이 영양분을 원하는 것 같아 일단 배부터 채우고 나니, 아침부터 정액을 빨리며 멍해졌던 머릿속이 점차 맑아진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나는 설거지를 하며 오늘 할 일을 떠올렸다.
우선, 그레이프가 출근하며 얘기한 대로 결제 카드부터 받으러 가야 한다.
그레이프가 카드를 주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급할 때 쓰라고 준 카드다.
왠지 카드를 만들지 않아도 그레이프가 돈을 내줄거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내 카드는 따로 있어야 한다.
A시 거주 ID 카드는 비전폰에 잘 저장되어 있으니…급하게 재발급 받을 필요는 없다.
오늘은 결제 카드만 받아서 집에 돌아오면 된다.
여유로운 하루다.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닦은 뒤, 샤워실에 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 후, 그레이프가 사준 옷중에서 입을 걸 골라 대충 걸쳐입고 집 안을 돌아다녔다.
바이크가 있다고 했는데 대체 어디있는걸까.
여러 방문을 한번씩 열어본 끝에 현관에서 옆쪽 방, 차고로 보이는 장소를 발견한 나는 깨끗하게 닦여있는 바이크를 발견했다.
커다란 휠에 긴 몸체, 뾰족하고 날카로워보이는 앞뒤와 곡선을 그리는 중앙의 형태가 인상적이다.
마법소녀에게 준 모델이기도 하고, 아마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는 스포츠 바이크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외관이다.
그레이프가 준비해 준 것으로 보이는 헬멧을 쓴 뒤 핸들 중앙에 보이는 홈 위에 결합형 키를 꽂는다.
단단히 고정시킨 키 중앙의 버튼을 누르자 디스플레이에 전원이 들어온다.
바이크 상태 점검, 위치정보 확인, 자동운전 모드 활성화…여러가지 글자가 떠오른 뒤 비전폰 연동 알림창이 뜬다.
나는 작게 진동하는 바이크 위에 앉아 바이크와 비전폰을 연동시키고 네비게이션을 켰다.
가고자 하는 위치인 15번구역 주민센터를 터치하자 바이크 디스플레이에 지도와 속도계가 나타난다.
비전폰을 주머니에 넣은 나는 차고 문을 카드키로 열고 천천히 집을 나섰다.
“오오….”
바이크를 타는 건 처음이다.
네거티브의 차원문이 열린 순간 전자계가 마비되어 짐덩이가 되거나, 네거티브가 들고 휘두르는 철덩어리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절대 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내가 바이크를…그것도 상당히 비싸 보이는 모델을 타게 될 줄이야.
그레이프가 빌려준 바이크는 내가 몸을 아무리 이리저리 비틀어도 알아서 균형을 잡고, 속도를 조절하며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속도계에 나오는 속도는 40km/h…생각보다 별것 아닌 속도인데도 엄청난 속도감이 느껴진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무섭다.
바이크를 처음 타보는 내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달려도 되는건가?
이거 달리다가 떨어지는거 아니야…?
타다가 떨어지면 그레이프한테 책임지라고 해야하나?
그레이프가 타라고 한 거니까 병원비는 주겠지?
아무것도 없는 산길에서 차가 달리는 도로로 변했을 때, 내 걱정은 더욱 커졌다.
속도가 60…아까의 1.5배다.
너무 빨라서 팔이 떨린다.
트루비전에서 만든 자동운전이니까, 무인 드론에도 사용되는 기능이니까 사고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안전하다는 걸 알고있지만, 그래도 무섭다.
나는 언제 무슨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브레이크를 손으로 살짝 잡았다.
도로 위는 굉장히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뒤에 차는 왜 자꾸 빵빵거리고, 대낮부터 눈부시게 라이트를 켜는건지 모르겠다.
설마 비싼 바이크를 모는 나를 질투해서 차로 쳐 죽이려는건가?
옆의 차가 나와 나란히 설 때마다 박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브레이크를 몇 번이고 잡으며 눈치싸움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뒷차에서는 더 빨리 달리라고 화를 냈다.
도로 위에 미치광이가 가득하다.
속도광, 플래시를 켜서 다른 사람을 눈부시게 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변태, 경적 울리는 걸 좋아하는 정신질환자….
왜 바이크에는 안전벨트가 없는걸까.
조금 전에도 자동운행이 알아서 비켜주지 않았다면 부딪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몇번이고 브레이크를 잡으며 조심히 운전했다.
“허억…허억….”
불안해하는 사이 바이크는 놀라울 정도로 안전하게 15번 구역에 도착했다.
나는 15번 구역의 은행 앞에 바이크를 주차한 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지면을 밟았다.
땅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다.
앞으로 그레이프의 집에 살게되면 이런 위험한 주행을 계속해야만 하는건가….
나오면서 보니 그레이프의 집은 산속에 홀로 지어져 있어, 밖에서 볼일을 보려면 무조건 바이크를 타야 할 것 같았다.
이건 치명적인 단점이다.
그래도 운전시간이 길지는 않고…도로 위에 미친놈들이 많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나올 수는 있다.
네비게이션만 설정하면 지금처럼 알아서 속도를 조절해 운전해주는데다, 정말 박을 것 같으면 바이크가 알아서 회피 제어를 해 준다.
무섭긴 해도 트루비전의 자동운행 기능은 믿을 수 있다.
익숙해지는 것만이 답이다….
나는 오토밸런스 기능으로 알아서 세워져 있는 바이크에서 열쇠를 분리했다.
그러고보니, 15번 구역에 오는 건 처음이다.
15번 구역은 A시의 끝자락에 있는 생산지구 중 노동자 거주구역에 속하는 곳이다.
여러 공장이 가득한 16번구역, 산림과 야생화된 감염체,네거티브에 의해 밀림으로 변한 구역이 섞여있는 17번 구역, 커다란 댐과 수도 정화시설, 수력발전, 호수가 있는 18번구역, 화력발전기와 풍력발전기가 있는 19번구역….
방위군 훈련병 시절, 통신병이 아닌 전투병과들 대다수가 이쪽으로 배치된다는 얘기를 들어본 덕에 사정은 잘 알고 있다.
A시의 생활, 유지에 필요한 중요 시설들이 밀집되어 있는 이곳은 A시에서도 가장 한산하며, 자연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자연이 남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감염체들이 숨을 곳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 위험성을 생각해 생산 지구에 근무하는 이들 대부분은 트루비전에게서 개인 연결되는 무인 드론을 지급받아 근무한다.
작업들이 각 상황에 따라 유연성과 경험이 필요한 것이 많아 무인화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있다.
무인 드론을 조종해 작업하는 고급 인력, 특별한 기술과 지식을 가진 작업자들은 14번 구역에 거주하며 각자의 업무구역에 무선 연결되어 작업을 진행한다.
한 명당 조종할 수 있는 드론이 한대뿐인 건 아니기에, 거주자가 많지도 않다.
때문에 무척 한산해서 발전이 더디기는 하지만, 사람들을 목표로 하는 네거티브의 습격이 적다는 장점이 있다.
14번 구역의 안전한 곳에 머물며 일하고, 작업 도중 감염체로 인한 문제가 생기면 방위군에게 연락하며, 떠돌이 괴수가 출현할 경우 하급 마법소녀들이 나와 처리한다.
구역 내에 감염체는 많지만, 네거티브는 적다.
감염체 정도는 방위군도 처리할 수 있고, 공기도 도심구역에 비해 훨씬 좋다.
중심가에서 벗어난 만큼 인프라는 밀려도 막상 익숙해지면 안전하게 살만한 장소라는게, 생산지구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급 인력에 한해서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력, 공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15번 구역에서 16번 구역으로 출근해, 단순 작업을 반복하다가 퇴근한다.
15번 구역은 철새처럼 머물다 사라지는 이들이 사는 원룸촌, 상가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공정이 기계화된 지금, 그런 이들조차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15번 구역도 무척 한산한 편이다.
“어서오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그 덕에, 오래 지나지 않아 카드 재발급 신청을 마칠 수 있었다.
사람이 없어 무인 접수대에 가서 순번표를 뽑을 필요도 없이 바로 은행원 앞으로 간 나는 재발급을 하러 왔다 말하고, 비전폰으로 ID를 확인받았다.
잠시 후, 나는 은행원이 가져온 새 결제 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카드 받아주세요.”
전자 ID, 비전폰이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쉽게 결제 카드를 재발급 받을 수 있다.
나는 새로 받은 카드를 손에 들고 은행 안에 있는 대기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카드를 재발급 받으며 카드번호가 바뀌었으니, 비전폰을 사용하는 결제 앱의 카드정보도 바꿔둬야한다.
“휴우.”
이걸로, 집에 불이 나서 생긴 문제는 전부 해결됐다.
새 비전폰도 생겼고, 최면어플도 잘 되고, 결제 카드도 재발급 받았고, 비전폰 결제기능도 잘 연동시켰다.
이제…적당히 시간 때우다 비싼 곳에서 점심이나 사먹어볼까.
내 카드가 생겼지만, 결제는 그레이프의 카드로 한다.
내가 쓰길 바라며 카드를 준 거였으니, 써 주는게 예의다.
나는 공짜 식사를 기대하며 비전폰의 화면을 조작했다.
“...응?”
곧바로 근처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보려던 나는 화면 한 구석에 보이는 알림을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메신저 아이콘, 알림 99개….
어마어마한 양의 메시지가 쌓여있다.
X에게 납치당하고 풀려난 뒤에도 여러가지 일을 겪으며 그레이프와 같이 돌아다니고 섹스한 탓에, 메신저를 살펴보는 게 늦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99개라니…알림을 띄울 수 있는 최대 수치다.
내가 비전폰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이 내 메신저에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레이프 (87) : 답장해주세요….]
[래피드 (11) : 메시지 보면 답장해주세요….]
[월세먹는할배 (4) : 앵거군, 자네가 사는 게 힘들다는 걸….]
그레이프에게서 87개…래피드 11개, 집주인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두개…래피드와 그레이프는 내가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되서 메시지를 좀 더 보낸 것 같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87개는 조금 열기 무서워지는 갯수다.
{앵거 군, 화재 알림이 왔네만 혹시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사람 보내겠네.]
{자네 대체 어딜 나가있는 건가? 전화 좀 받아보게.]
{앵거 군, 자네가 사는 게 힘들다는 걸 알고 이해해보려 했지만, 이건 도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드네. 미안하지만 강제 퇴거 조치해 달라고 했으니 이해해 주길 바라고, 자네도 젊으니 아직 바뀔 시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네. 앞으로는 이런….]
집주인의 메시지는 별거 아니었다.
집을 이따구로 쓰다니, 앞으로 똑바로 살아라 라는 말을 길게 늘어뜨렸을 뿐이다.
그레이프의 집에 살게 된 이상 별로 신경 쓸 가치가 없는, 전 집주인이 보낸 메시지부터 확인한 나는 이어서 래피드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앵거 씨, 오늘은 갑자기 돌아가서 죄송해요…다음에 시간 맞춰서 또 같이 놀러가요!]
{마음 많이 상하셨나요…?]
{저도 정말 급하게 억지로 시간 내서 나온거라,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요….]
{갑자기 가려고 하거나, 도망치거나 한 건 아니에요, 같이 있기 싫었던 것도 아니고…정말 급해서 그랬어요.]
{앵거 씨…?]
{바쁘신가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집에 안 계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저기….]
{메시지 보면 답장해주세요….]
래피드의 메시지는 예상한 그대로의 내용이 가득했다.
연락이 잘 되다가 갑자기 연락이 안 되었으니 이상해 할 만도 하지.
걱정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래피드의 성격상,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 했을 게 틀림없다.
[미안해요, 집에 불이 나서…비전폰도 망가져서 이제야 연락할 수 있게 됐어요.}
일단, 래피드에게 짧은 답장부터 보냈다.
이 정도만 말해도 상황 설명은 될테고, 불안감도 가라앉게 될 것이다.
지금 시간은 오전, 래피드의 위치는 0번 구역…훈련이 한창인지 답장은 없다.
남은 건…그레이프의 메시지 뿐이다.
별것 아닌데도 이상하게 긴장된다.
나는 침을 삼키며 그레이프가 보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