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 기둥서방 (6)
밖에서 보기에는 상당히 커 보였던 집이지만, 안에 들어와 보니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
그만큼 벽으로 쓰인 금속의 두께가 두껍다는 거겠지….
4인 가족 정도가 편하게 살만한 정도의 규모, 현관에는 대리석이, 그 외의 바닥은 나무와 카페트, 벽면에는 벽지…조금 흠집이 난 곳을 만져보니 매끈한 금속 표면이 만져진다.
“여기가 화장실, 여기가 거실…TV 보고싶으면 언제든 봐도 되고, 얼마전에 게임기 사 놨으니까 하고싶은 게임 있으면 다운받아서 해요!”
금속 변기, 금속 세면대, 금속 타일, 금속 욕조, 금속 TV….
이 정도로 철저하게 만든 걸 보니 조금 무섭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걸까….
“혹시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여기, 주방에…냉장고 안에서 아무거나 꺼내서 먹어도 돼요. 먹고싶은 게 있으면 요리해먹어도 되고…아, 차 마실래요? 소화에 좋은 차인데.”
그레이프는 금속 냉장고에서 금속 물병을 꺼내 금속 컵에 차를 따라 내게 건네줬다.
나는 뭐라 말하기 힘든 미묘한 광경에 목이 말라와 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시원한 차가 머릿속을 맑게 해준다.
금속 냉장고, 금속 싱크대, 금속 찬장, 금속 그릇, 금속 수저…아니, 수저랑 금속은 원래 금속으로 만든다.
냉장고도 원래 금속이고, 싱크대도 그렇지….
금속은 금속…진정하자.
그레이프의 집은 금속이 아닌 것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금속으로 되어있었다.
그나마 바닥과 벽이 금속이 아닌 것으로 처리되어서 아슬아슬하게 정상으로 보인다.
전부 금속이었다면 수술실이나 위험동물 격리시설같은 느낌이 훨씬 강해졌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랬다 하고, 아마 그레이프도 살면서 같은 생각을 해 벽지를 바르고 바닥재를 다른 것으로 올린 거겠지.
무광으로 빛나는 은색이 너무 많이 보인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레이프의 집은 굉장히 깔끔하고, 생각보다 정상적이고, 고급스러웠다.
어차피 밖에서 볼 사람은 없다는 듯이 한쪽 벽면을 통째로 유리창으로 해 놓은 탁 트인 구조도 멋있고, 정말 필요한 가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깔끔해서 좋다.
좋게 말하자면, 구시대의 영화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부자가 사는 별장이나 저택같은 집이었다.
“여기는 세탁실…옷 벗어두면 출퇴근 때마다 세탁해줄게요. 그리고 여기가 침실이에요.”
침실은 평범했다.
안쪽에는 샤워실, 한쪽 벽면에는 옷장, 금속으로 만들어진 프레임 위에 아주 두꺼운 매트리스, 서랍장과 전신거울.
침대는 두껍기도 두껍지만 크기도 커서 둘이 아니라 셋, 넷이 같이 자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침대가 왜 이렇게 커?”
“방위군에서 만들어줄 때 자다가 어떤 잠꼬대를 할 지 모르니 일단 최대한 크고 안전하게 만들자고 했거든요….”
“그레이프는 잠꼬대 안 하잖아.”
그레이프는 한번 잠이 들면 신기할 정도로 얌전하게 잔다.
그래도 그런 모습을 방위군에서 알고 있진 않을테니, 일단 만약을 대비하자는 생각으로 최대한 튼튼하게 만든 거겠지.
나는 그레이프에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벽 쪽의 서랍장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그래도 같이 자도 안 좁고, 좋겠네.”
“그, 쵸오오…? 맞아요, 안 좁아요. 앵거랑 저랑 팔다리 다 뻗어도 괜찮을걸요? 거기에 하, 한명 정도는 더 있어도….”
서랍을 열어보는 데에 딱히 다른 이유같은 건 없었다.
순수하게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하다.
속옷이라도 들어있으려나.
“아니, 한명 더라는게 이상한 건 아니고…예전에는 에스더랑 래피드랑 같이 자기도 했으니까, 그런 거에요! 세 명이서 자도 괜찮았으니까 그만큼 편할 거라는…?!”
그때,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머리카락 끝을 만지며 말하던 그레이프가 깜짝 놀라는 목소리와 함께 내 옆으로 순식간에 다가왔다.
어느새 내가 슬쩍 열어본 서랍은 그레이프의 손에 눌려 닫혀 있었다.
그레이프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 어깨를 잡아 누르며 샤워실로 데려갔다.
“애…앵거? 서랍은 왜요…?”
“응? 그냥 뭐 들어있나 궁금해서…?”
“아하…그렇구나, 샤, 샤워! 해야죠? 슬슬 자야하고, 앵거도 씻고 싶을테니까?!”
“어? 응…?”
“씻고 오세요! 옷은 앞에 벗어두면 제가 가져가서 세탁할게요!”
“어? 어?”
나는 그레이프에게 떠밀려 침실 안쪽의 샤워실에 들어갔다.
서랍 안에 내게 숨기고 싶은 게 들어있기라도 한걸까?
틈을 봐서 몰래 열어봐야겠다.
억지로 떠밀린 거긴 하지만, 마침 씻고 싶었던 나는 그레이프가 말하는대로 순순히 옷을 벗었다.
벗은 옷을 문 밖에 내밀자 그레이프가 곧바로 챙겨 가져간다.
나는 그레이프의 샤워실을 구경하며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레이프의 샤워실은 상당히 특이했다.
샤워 헤드가 달려 있는게 아닌, 샤워 부스 내에 천장과 앞뒤쪽, 양 옆에 직사각형의 무언가가 튀어나와있는 이상한 형태다.
나는 샤워를 대체 어떡해야 하는걸까 고민하며 이것저것을 만져보다 한쪽 벽에 있는 버튼을 손으로 눌렀다.
“오…?!”
그러자 사방에서 물이 약하게 나오더니, 온도를 알맞게 조절한 뒤 강하게 쏘아지기 시작했다.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물줄기가 때리며 알아서 씻겨준다.
나는 듣도보도 못한 샤워시설에 놀라며 패널을 이것저것 조작했다.
샴푸와 바디워시가 물에 섞여 나오는 기능, 전 방향에서 드라이기가 나오는 기능, 발바닥 쪽에서 물줄기가 나와 바닥의 비눗물을 빼내는 기능…샤워시설이라기보단 장난감 같다.
이것저것 실험해 본 뒤 수압 마사기 기능을 발견한 나는 만족할 때까지 마사지를 즐긴 뒤, 전신 드라이기 기능을 사용해 몸의 수분을 제거했다.
최고급 호텔에 가도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엄청난 샤워시설이었다.
만족스럽게 샤워를 마친 나는 수건으로 남은 물기를 제거하며 샤워실 밖으로 나왔다.
샤워실 문 앞에는 가운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나는 그레이프가 놓고 간 것으로 보이는 가운을 입었다.
“그레이프?”
그레이프를 부르고 보니, 침실 밖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현관 앞에 있던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잠시 후, 물소리가 멈추고 드라이기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를 듣고 그레이프도 슬슬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침실 안을 걸어다니다 자연스럽게 서랍장 앞에 다가갔다.
그레이프는 머리가 기니까 말리는데도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뭘 그렇게 숨기려 한 건지 몰라도, 지금이 서랍 안을 확인할 기회다.
하지만, 서랍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내가 샤워하는 동안 내용물을 다른 곳에 빼돌린게 분명하다.
나는 그레이프가 뭘 숨긴 건지 순수하게 궁금해하며 침실을 뒤졌다.
옷장 안…옷 밖에 없다.
서랍장의 다른 칸…속옷 뿐이다.
침대 밑…급하게 싼 것으로 보이는 보따리 같은게 놓여 있다.
먼지도 없고, 숨길 시간이 충분하지도 않았을테니 아마 틀림없겠지.
나는 분명 이 안에 서랍 안에 있던 물건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보따리를 끄집어냈다.
담요로 대충 덮어 묶은 보따리를 풀자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뭐야….”
차곡차곡 정리되어있는 딜도들, 안대, 가면, 삼각대…콘돔, 젤…밧줄….
그냥 예전에 비밀 계정을 하고 놀 때 쓰던 물건들을 모아놓은 서랍장일 뿐이었나.
숨기려고 한 건 이해되지만, 이런 건 그렇게 놀랍지도 않다.
그레이프니까, 이런 걸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응?”
실망하며 담요를 다시 싸매려던 나는 보따리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과자 포장지…낡은 3단우산, 회사 서류….
성인용품이 아닌게 왜 여기있나 싶어 들어보니, 전부 낯이 익은 물건들이었다.
그레이프한테 결제를 부탁하면서 잘부탁드린다고 적어둔 서류, 점심식사를 같이 했다가 돌아오는 길의 편의점에서 샀다가 혼자 먹기 눈치보여서 준 1+1 과자의 포장지, 비오는 날 쓰고 버리라고 줬던 내 우산….
쓰레기랑 서류도 이상하지만…우산은 진짜 왜 이게 여기있지?
혹시나 싶어 손잡이를 확인해보니 확실히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때, 밖에서 들려오던 드라이기 소리가 멈췄다.
나는 그레이프가 침실로 바로 올 것 같다는 생각에 급하게 보따리를 싸 침대 밑에 밀어넣었다.
그대로 침대에 풀썩 앉은 순간 침실 문이 열리며 그레이프가 안으로 들어왔다.
“앗, 벌써 다 씻었어요?”
“아, 어, 응.”
“...방금 나온거죠?”
“응? 응, 1분도 안됐어.”
나는 가운 한 장만 입고 들어온 그레이프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왜 내가 쓰고 버리라고 한 우산도 그렇고 여러 쓰레기들을 보관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뭔지 몰라도 숨기려고 한데는 이유가 있을테니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는게 좋을 것 같다.
그레이프는 어색하게 반응하는 나를 보고 서랍장과 침대 밑을 힐끔거리더니 안쪽의 샤워실로 가 문을 열었다.
“…샤워실 쓰고 나온 직후에는 이렇게 습기가 많으니까, 문 열어놓는게 좋아요.”
“아…다음부터 그렇게 할게.”
어색한 공기가 맴돈다.
정말로 내가 방금 샤워를 마친게 맞나 확인해 본 건 아니겠지….
그레이프와 나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음…옷은…세탁기에 예약 해뒀으니까…자는동안 저절로 건조까지 될 거에요. 내일 제가 널고 출근할게요.”
“으, 응.”
“요리는…아침으로 먹고싶은 거 있어요?”
“아무거나…? 그레이프가 해주는 거면 다 좋은데….”
“그, 그래요…? 후후….”
먼저 침묵을 깬 그레이프에게 태연하게 대답한 나는 침대에 누워 버렸다.
그러자 그레이프도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와 내 옆자리에 누웠다.
다행히 조금전의 묘하게 오싹한 분위기는 벗어난 것 같다.
그레이프는 내 옆에 누워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게 떠진 눈이 창 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비춰 반짝반짝 빛난다.
신기해 하는 눈빛, 어딘가 몽롱해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을 본 나는 그레이프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레이프?”
“네? 아, 네.”
“왜 그래?”
“아, 아뇨…신기해서….”
“...뭐가?”
지금 이 상황에서 그레이프가 신기해 할만한 게 있었나?
혹시 내 등 뒤 쪽의 창문 밖으로 뭐가 지나가기라도 한걸까.
아무것도 없는 뒤쪽을 한번 바라본 뒤 시선을 돌리자 그레이프가 얼굴을 붉히며 내 쪽으로 조금 다가왔다.
“앵거가 제 방 침대에 있는게 신기해서요….”
“그레이프도 내 방 침대에 자주 있었잖아…?”
“그거랑은 달라요.”
그런 건가…?
대체 뭐가 다른건지 몰라도, 그레이프에게는 다른 것 같다.
그레이프는 내 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손가락으로 내 몸을 확인하듯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집에 마법소녀 말고 다른 사람이 온 건 처음이에요.”
“마법소녀는 자주 왔지?”
“방송에서 본거죠…? 에스더가 매번 제 집에 있는 운동기구가 좋다면서 찾아왔으니까….”
“래피드도 같이 오고, 릴리도 왔고….”
“그래서 에스더가 그렇게 되고 나서는 특히 더, 혼자 지냈어요.”
나는 말을 아꼈다.
에스더의 방송에서, 그레이프의 집은 최상위급 마법소녀들이 자주 들르는 일종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방송에서는 굳이 그레이프의 집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운동기구가 있는 공터 주변은 상당히 자주 나왔었다.
에스더는 네거티브에게 잡혀간 뒤 마지막으로 켠 방송에서 절규와 함께 유언같은 말을 한 걸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사람들은 에스더가 죽었다고 생각했고, 1년이 지난 뒤 에스더는 네거티브가 되어 나타났다.
죽은 동료가, 적이 된 동료가 자주 찾아와 웃고 떠들던 곳에 모이는 건 아무리 그래도 힘들었겠지.
그레이프의 집은 혼자 살기엔 확실히 넓다.
매일같이 마법소녀들이 찾아올 때는 집이 넓은줄도 몰랐겠지만, 나중에는 느끼기 싫어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에스더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1년간 다같이 놀고 잠들던 침대에서 홀로 잠들었을 그레이프의 모습을 상상하며 중얼거렸다.
“힘들었겠네.”
“...괜찮아요.”
“마법소녀도 사람이니까 힘들겠지.”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들 앞에서 마법소녀는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에스더가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도 복수심을 불태우고, 이 정도로 꺾이지 않는다고 강한 모습을 보이고, 안심하라고 시민을 다독여줬던 게 마법소녀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사라진 에스더에게서 마음을 돌려 다른 마법소녀의 팬이 되고,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믿으며 언제나와 같은 일상을 유지했다.
마법소녀는 약해져선 안된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고, 언제나 강해야 한다.
다쳐도, 힘들어도…마법소녀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니까.
“앵거는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흐아...어? 아니…갑자기? 왜?”
“모르고 그러는 게 더 악질이야.”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고 하품을 하고 있던 나는 그레이프의 갑작스러운 매도에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프는 웃는 얼굴로 나를 욕하고 있었다.
난 왜 갑자기 욕을 먹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