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 최면물-288화 (288/299)

< 288화 > 기둥서방 (5)

“으윽…하아아….”

잠깐이지만, 자고 일어난 덕인지 피로가 상당히 풀렸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킨 나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봤다.

쌀쌀한 공기가 피부에 차갑게 붙는 산 속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높은 울타리와 커다란 철문이 보인다.

“여기 어디야?”

“집이에요, 피곤하죠? 빨리 들어가서 쉴까요?”

“집…? 여기 그레이프 집이야?”

“...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레이프의 집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숙박비 얘기를 꺼냈을 때 그런 얘기를 하긴 했다.

호텔비까지 내줄 만큼 돈이 많지는 않으니, 자기 집에서 머무는 건 어떻겠냐는 얘기였다.

어쩌다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레이프의 집에 찾아오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딱히 호텔이 아니라 그레이프의 집이어도 상관은 없다.

아니, 차라리 잘 됐다.

돈도 안 들고, 안전하고, 방 얻으러 귀찮게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다른 무엇보다도 안전하다.

그레이프가 언제나 옆에 있어준다면 전처럼 리프같은 게 갑자기 나타나는 일도 없을테고, 네거티브든 뭐든 뭐가 나타나도 일단은 안심이다.

“호…호텔비도 아끼고? 앵거도 저한테 방 열쇠 줬었고? 그러면 저도 앵거한테 제 집 열쇠를 주고 같이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게 아닐까요…?”

“음…아니, 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나야 좋은데, 그레이프는 괜찮아?”

“괜찮아요! 근데…좋구나…후, 후후…잠깐만요, 금방 열게요….”

그레이프는 이상하게 웃으며 대문쪽의 벽에 지갑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철문이 철컹 하는 소리를 내며 좌우로 열리며 문 너머의 산책로같은 길이 드러났다.

지면에 심어진 채 발 밑을 비추는 등불, 정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짧은 숲길 너머로 달빛에 비쳐 하얗게 빛나는 커다란 건물이 보인다.

“...혹시 저게 집이야?”

“조금…특이하게 생겼죠…?”

“조금이 아니라….”

입구를 보고 예상은 했지만, 그레이프의 집은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이었다.

트루비전의 최고위 간부도 아파트에 살 정도로 땅을 아껴야만 하는 지금 시대에 단독주택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하지만, 그레이프가 단독주택에 산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건 그 단독주택의 이상한 외관이었다.

벽면은 금속, 지붕도 금속, 페인트칠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은 은빛의…금속 덩어리다.

각진 집은 집이라기보단 벙커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집 앞에는 넓은 공터가 있고, 여기저기에 운동기구로 보이는 것들이 설치되어 있기까지 하다.

이건 집이라기보다는…무언가의 체육관이 아닐까.

네거티브가 없던 시대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구시대의 헬스장 같이 생겼다.

나는 집보다는 운동센터같이 생긴 건물을 보며 흙길을 천천히 걸었다.

“금속…?”

“아…맞아요. 지금은 좀 많이 적응해서 괜찮지만, 마력강화를 계속하니까 힘조절이 어려워져서…손만 대도 이것저것 다 부숴버리던 시기에 방위군에서 만들어 준 집이에요.”

나는 그레이프가 엘리베이터에서 금속 손잡이를 가볍게 뭉쳐버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레이프는 지금도 가끔 이성을 잃으면 힘조절에 실수할 때가 있다.

내 방의 벽에 손톱자국을 낸 것도 그렇고, 섹스할 때 허리가 삐걱댈 정도로 찍어누르는 것도 그렇고…그걸 전혀 조절하지 못한다면 확실히, 금속으로 만든 집이 필요할수도 있겠지….

“통째로 금속으로 만든거야?”

“음…네, 방위군 개발 특수합금 중에 리프스틸이라는 걸로 만들었고, 기둥부터 지붕까지 전부…지금은 바닥이나 벽 같은 건 따로 카페트나 대리석 같은 것도 깔았고, 벽지도 해뒀지만, 처음에는 정말 완전히 금속으로만 되어 있었어요.”

“그건…어….”

집이 아니라 위험한 괴수를 가둬두는 격리시설의 모습이 떠오른다.

달리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뭐든 다 부숴버릴 정도로 힘이 무지막지하다는 얘기다.

지금은 잘 조절하고 있는 거겠지만…역시 조금 무섭다.

“그러면 가구 같은 것도…?”

“아, 바꾼 것도 있어요. 거울도 금속 표면을 다듬은 거였는데 지금은 그냥 거울이고…옷장도 나무로 바꿨고, 소파도 바꿨고…이젠 힘 조절을 잘 하니까요. 그래도 튼튼해서 나쁠 게 없는 건 그대로 둬서…침대 프레임이나 테이블 같은 건 뭘 해도 부숴질 일 없는 특수합금이에요.”

“뭔가…엄청나네.”

“...특이하죠?”

“뭐, 그레이프한테 필요했던 거니까…근데 그럼 이걸 공짜로 준 거야?”

“아하하…이 집 샀던 돈을 지금까지도 갚고있어요…계약 조건으로 제공해줬는데도 예산을 오버해서, 나머지는 제가 융자를 내서 갚는 걸로 했거든요.”

“아! 그래서….”

언젠가, 제품 콜라보 기념 이벤트 때에 한 인터뷰 방송에서 마법소녀 그레이프가 평범한 회사원들처럼 회사 생활을 하며 돈이 없다고 했을 때부터 정말 궁금했던 것이 몇 가지 있었다.

6위면 상당한 지원금을 받을 텐데 대체 왜 돈이 부족하다 할까.

따로 회사원 생활을 하면서까지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그레이프는 광고도 많이 찍고, 콜라보 이벤트도 많이 하면서 파견도 많이 나가고 구조도 많이 하는 부지런한 마법소녀다.

그렇게 마법소녀로서 열심히 일해 번 돈은 전부 어딘가에 사용하며, 회사 생활로 번 돈을 생활비로 사용한다.

그레이프는 원거리 마법이 없는 만큼 여러 보조 장비를 사용하기도 하니, 장비 구매에 돈을 사용하는 건지, 아니면 가족이 아프기라도 한 건지 하는 여러 소문이 돌았지만, 팬들 중 그 누구도 이렇다 할 정답은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레이프가 돈이 없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빚에 허덕이는 이유와 비슷했다.

집을 사느라 빚을 져서 그 빚을 갚느라 돈이 없던 거였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집이니, 아마 그 금액도 다르겠지.

땅도, 자원도 부족한 시대에 특수합금 덩어리 단독주택이라…지원금을 아무리 받아도 회사 생활을 계속할 만 하다.

지금은 트루비전의 고위 간부여도, 방위군의 장군이어도 아파트에 사는 시대다.

이 집은 정말로 그레이프가 최고위급 마법소녀니까, 그 중에서도 조금 특별한 경우니까 가질 수 있는 집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내가 살 집이기도 했다.

“저건…그거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집에 할 말을 잃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집 앞에 있는 공터를 보고 그레이프에게 물었다.

공터에 놓여진 운동기구들은 나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에스더의 방송에 자주 나온, 마법소녀용 운동기구다.

마법소녀용 운동기구는 평범한 운동기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형태는 같지만, 무게추가 없다.

지면에 스프링이 연결되어있는 운동기구들 뿐이다.

“뭔지 알아요?”

“마법소녀용 운동기구 아니야? 에스더 훈련방송에 나온…?”

“제 방송에도 나온 적 있는데….”

“그레이프는 방송 자주 안하잖아.”

나는 실외에 있는 만큼 비를 맞아서 녹슬 법도 한데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운동기구를 만지며 에스더의 방송을 떠올렸다.

이 장소, 이 곳에 에스더가 앉아있었고…이 옆의 운동기구에 래피드가 누운 적이 있다.

나는 래피드가 가만히 누워서 낮잠을 자는동안 에스더가 운동하던 방송을 떠올리며 운동기구에 따라 누웠다.

당연하지만, 래피드의 온기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이서 본 금속은 푸른빛과 주황빛이 섞여 빛나고 있었다.

분명 금속이 맞는데, 만져보니 묘하게 따뜻하기까지 하다.

“...한번 해볼래요?”

“내가 들 수 있어?”

“잠깐만요, 제일 가벼운 장력으로 해줄게요.”

지면에 스프링이 연결된 바를 잡고 있자, 그레이프가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며 기구를 조정해줬다.

이 운동기구는 무게추가 아니라 특수한 스프링을 사용해 운동하게 되어있다는 말을 방송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레이프는 내 머리쪽에 있는 다이얼을 손으로 잡아 끼릭끼릭하고 돌린 뒤, 바 밑에 손을 받치며 말했다.

“들어봐요. 이렇게, 팔이랑 가슴으로 밀어올리듯이….”

“이렇게?”

“네, 이제 한번에, 힘을 확 하고!”

“흐으읍!!”

나는 그레이프가 시키는 대로 온 힘을 다해서 금속 막대를 잡아 위로 밀어냈다.

정말 이를 악물며 밀어내지만, 꼼짝도 하질 않는다.

용접해놓은 봉을 가지고 장난치는 건가 싶을 정도다.

마법소녀용 운동기구는 마법소녀중에서도 마력을 사용한 육체강화를 하는 마법소녀를 위한 운동기구다.

래피드는 힘들어하고, 에스더도 조금 부담스러워하고, 그레이프와 릴리는 웃으며 할 정도로 가볍게 느낀다.

그 말은, 평범한 인간인 내가 아무리 해 봤자 꿈쩍도 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이기도 했다.

“후우….”

나는 힘을 주던 걸 멈추고 벤치프레스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못 들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마법소녀와 평범한 인간의 힘차이를 느껴보고 싶었을 뿐이다.

“어라…?”

그때, 바를 드는 걸 포기한 나를 보던 그레이프가 당황하며 바를 쥐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바가 위아래로 휙휙 움직이고, 양 끝에 달린 스프링에서 끼익끼익 하는 소리가 난다.

그레이프는 마법소녀니까 당연히 쉽게 들 수 있을 테지만,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광경이다.

“이게 제일 가벼운 거 맞는데….”

“...제일 가벼운 것도 못 든다고 놀리는거야?”

“미, 미안해요!”

나는 정말로 그렇게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행동에 그레이프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내게 실수했다고 생각했는지 깜짝 놀라 급하게 내 팔을 안으며 사과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레이프보다 내가 약한 건 당연하지만, 그걸 대놓고 이렇게 놀려버리면 남자로서 기분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바보라 해도, 바보라고 놀림받으면 기분이 상한다.

기분이 상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레이프는 어쩔 줄 몰라하더니 손가락으로 내등을 살살 간지럽히며 말했다.

“앵거가 약하다거나, 놀린 게 아니고…그냥 이 정도도 힘들구나 싶어서 놀란거에요…네?”

뭐지…?

사과를 위장한 추가 도발인가…?

나는 그레이프를 가만히 노려봤다.

“힘 세서 좋겠네.”

“저는 마법소녀니까 센 거고…그리고 제가 아무리 세 봤자 앵거가 이기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내가 언제 이겼어.”

“섹스할 때도 그렇고…이것저것….”

“섹스...내가 이기고 있었어?”

그레이프가 내게 져 주거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 준 적은 있어도, 내가 이긴적은 없다.

내 시선을 피한 그레이프는 잠시 그대로 침묵을 유지하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 팔을 잡아끌어 운동기구에서 일으켰다.

여기에서 이런 얘기를 더 해봤자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자, 자아…운동기구 같은 거 재미없으니까, 집 보여줄게요! 집 구경해요!”

나는 못 드는 운동기구를 가볍게 드는 그레이프에게 끌려간 나는, 나는 못 들고 그레이프는 가볍게 드는 운동기구와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그레이프는 나는 못 드는 운동기구와 같은 재질의 문에 지갑을 가져다 대 문을 열고, 나는 못 들지만 그레이프는 들 수 있는 운동기구와 같은 재질의 집을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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