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화 > 기둥서방 (4)
“이상하긴 이상하네….”
“구조된 마법소녀들이 음액 중독 치료때문에 당분간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괴수교가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한다는 것도...아...이런 얘기는 그만 할까요? ”
그레이프는 얘기하다말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멈췄다.
아마도 이건 평범한 사람은 접하지도 못할 극비에 가까운 정보일테고...그런 내용은 공개된 장소해서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지.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괜히 밥 먹기 전에 어디가 위험하다, 일이 이상해졌다 같은 불안한 얘기를 할 필요는 없다.
딱히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얘기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마법소녀가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 주제를 슬쩍 바꿨다.
“D시는 어땠어? 좀 변했어? 나는 안 간지 좀 됐으니까.”
“으으음...그럭, 저럭...괜찮았어요. 예전에 파견 갔을 때랑 변한 게 전혀 없는 것 같던데...아, 앵거가 말해준 곳 가봤어요.”
“어디?”
“계란말이랑 집주인 할머니...다른 곳은, 그게….”
“그렇구나.”
나는 말을 꺼내길 망설이는 그레이프를 보고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다른 사람들은 죽거나, 거동하기 어려워 진 거겠지.
그레이프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눈치를 보며 손사래를 쳤다.
“돌아가신 건 아니고, 아마 피난 중일 거예요. D시에 마법소녀 수가 일시적으로 줄어들어서 감염체 습격 주의 경보가 내려진 상태였으니까...다들 건강하게 잘 계실 거예요.”
“음...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이도 있고, 상황이 그러면 그럴 수도 있지.”
지금같은 시대에 노인은 괴수 경보가 울리면 바로 도망칠 수 있는 신체, 가까운 곳에 쉘터가 있는 환경, 적당한 운이 없다면 살아남지 못한다.
D시는 그리 돈이 많은 도시가 아닌만큼 A시처럼 어딜 가도 쉘터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사람이 많이 머무는 빌딩 지하에는 법적으로 쉘터를 건축하게 되어있지만, D시는 그런 고층건물 자체가 드물다.
그런데도 내가 어릴때까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운이 좋다는 거지만, 그것도 지금쯤이면 운이 다 할 때가 됐지.
이미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레이프는 아무렇지 않게 있는 나를 힐끔거리더니 웃는 얼굴로 양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아! 맞아...그, 앵거 예전에 살던 방도 가 봤어요.”
“들여보내줬어?”
“음...네, 그, 앵거랑 어떤 관계인지 얘기하니까...방은 치워서 다른 사람한테 세를 줬고, 다른 여자분이 살고 있기는 했는데...할머니가 앵거 짐을 따로 보관해주고 계시더라고요.”
그레이프가 내 친구라고 말하니 순순히 들여보내준 모양이다.
이런 예쁜 여자가 내 친구라고 말하는데 바로 믿어주다니, 여전히 남의 말을 잘 믿어주는 할머니다.
나는 예전에 D시에 살 때 집주인 할머니에게 주변 집들의 월세가 싸다고 거짓말해 월세를 낮췄던 때를 떠올렸다.
“앨범은...앵거 어린 시절 사진도 많이 보고, 가져올까 했는데...할머니가 안된다고 하셔서.”
“뭐, 가져와봤자 짐만 되니까.”
A시로 갈 때도 앨범같은 걸 전부 버리거나 태우려 하니 집주인 할머니가 그러면 안 된다고, 보관해주겠다고 가져갔었다.
할머니는 죽은 부모님하고 서로 아는 사이였던 것 같으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면 그냥 두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던게 기억난다.
가져가면 또 내가 버리거나 태우려 할까봐 그레이프에게 넘겨주지 않은 것 같다.
“근데...집주인 할머니한테 들었는데…저는 알아야 할 것 같다고....”
“응?”
“그...앵거, 어릴 때 기억이...그게....”
“그 할머니가 그런 얘기까지 했어?”
나는 조금 황당해하며 내 눈치를 보는 그레이프에게 대답했다.
집주인 할머니, 입 무거운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가벼울 줄 몰랐다.
그레이프가 예쁘게 생겨서 입이 가벼워진건가.
“못 본 사이에 입이 엄청 가벼워졌네...응, 나 어릴 때 기억 없어.”
나는 어릴 때의 기억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님과 관련된 기억이 뭔가로 구멍을 여러군데에 뚫어놓은 것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때 같이 생일이 되면 부모님이 같이 뭘 한 것 같은데 뭘 했는지 모르겠다던지, 여행을 간 것 같은데 어딜 갔는지 모른다던지...어떤 요리를 해 줬는지도 모르고, 어떤 집에서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뭐, 자주 있는 일이잖아…? 괴수 습격으로 인한 기억상실….”
“흔한 일은 아니지만…그쵸, 있기는...하죠.”
부모님이 네거티브 1차 습격 시기에 괴수에게 살해당했다는 건 알아도 어떻게 죽었는지, 어디에서 죽었는지, 시체는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 할머니가 괜한 얘기 했네, 신경쓰지 마. 나도 전혀 신경 안쓰니까.”
“으, 음….”
“그보다 계란말이는 먹었어?”
나는 이런 얘기를 굳이 길게 해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자연스럽게 다른 걸 질문했다..
해도 상관은 없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나와 다르게 그레이프가 괜한 신경을 쓸 것 같다.
그레이프는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흠칫 놀라며 내 눈치를 한번 보고는, 내가 꺼낸 화제로 얘기를 돌렸다.
“아, 계란말이! 맛있게 먹었어요, 덕분에 D시에 다른 맛집을 알게 된 것 같아서 자주 찾아갔어요. 전에 갔을 때는 정말 먹을 게 없어서 D시 시청 옆에 식당만 갔는데….”
“어? 프리메라? 얘기하는 거야?”
“어? 맞아요...앵거 가본 적 있어요?”
프리메라는 D시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자연식을 판매하는 고급 레스토랑이다.
고급이라고 해봤자 D시 기준으로, A시에 비하면 적당히 괜찮은 레스토랑 수준일 뿐이지만, 그래도 D시에서는 가장 비싼 식당이었다.
그레이프가 말하는 의미대로 가본적은 없어도, 다른 의미로 가본 적은 꽤 많은 곳이었다.
“식사를 해 본 적은 없는데...자주 갔지, 거기에서 일했었거든.”
“네? 언제부터 언제까지…?”
“음...방위군 지원하기 전이니까...3년에서 4년 전이지 않을까….”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연령이 되자마자 계속해서 지원해, 결국 말단 직원으로 채용될 수 있었다.
프리메라는 다른 식당 아르바이트보다도 음식의 질이 좋아 손님이 남긴 음식을 먹는 보람이 있는 좋은 식당이었다.
먹다 남은 음식을 먹으며 영양분을 채운 덕에 방위군 훈련병 자격시험을 치를 수 있는 수준의 몸을 만들 수 있었다.
“앗…! 그때 저 파견가서 매일 갔었는데, 그때 이미 만났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응…? 아니...그럴 리가….”
“자주 봤겠다. 자주 봤겠죠? 매번 VIP룸에서 먹긴 했지만, 그래도 계산할 때나 음식 내올 때...아아아...그때 무슨 대화 했을까….”
“아니...어….”
봤을 리가 없다.
내가 일하던 곳이 식당인 건 맞지만, 손님에게 노출되는 장소는 아니었다.
나는 설거지와 쓰레기 버리기, 주방 청소 담당으로 고용됐었다.
그레이프가 내가 일할 때 왔었다 해도 나는 그레이프가 먹고 남긴 음식이나 보고 말았겠지.
그건 그렇고 그레이프가 VIP룸에서 D시에서는 최고로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그 주방 음식물 찌꺼기 버리는 곳 앞에서 접시에 남은 음식을 주워먹고 있었던 건가.
자존심 상하는 걸 넘어서 비참하기까지 한 얘기다.
“응...근데 못 보지 않았을까?”
“정말 매일 갔으니까 분명 봤을 거에요.”
“아니...봤으면 내가 기억하고 있겠지, 그레이프를 봤으면 내가 기억 못할리가 없잖아.”
“어….”
“맞지? 그레이프는 예쁘니까, 본 적이 있으면 팀장으로 왔을 때 내가 바로 알아보지 않았을까?”
“그, 그런가아...흐음...그렇구나….”
그레이프는 한번 보면 그 외모가 뇌리에 그대로 박힐 정도의 미녀다.
그런 여자를 봤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다.
나의 완벽한 논리에 그레이프는 반박하지 못하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이쪽이 스페셜 전골, 이쪽이 활력 전골입니다.”
그때, 대화를 하며 기다리던 요리가 나왔다.
직원은 그레이프와 내 앞에 각각 하나씩 요리를 내려놓고는 조그마한 냄비의 뚜껑을 열어줬다.
내 냄비에는 우엉과 장어, 그리고 여러 야채가 들어간 진한 검은 색의 수프가, 그레이프의 냄비에는 장어와 전복과 야채, 흰 색의 수프가 담겨 있었다.
“이쪽이 결제 내역인데...손님이 많으셔서 제가 예약 메시지를 조금 늦게 확인했어요, 액기스 세 배 맞으시죠?”
“어, 아, 음, 어…네, 네? 결제요? 카드요? 네, 드릴게요.”
“아…! 죄송합니다...맛있게 드세요!”
직원은 그레이프가 급하게 꺼낸 지갑에서 카드를 받아들고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쳐 사라졌다.
나는 갑작스러운 오한을 느끼며 자꾸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에서 바람이라도 새어 들어오는 걸까…?
“머, 먹죠!”
나는 그레이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따듯한 냄비를 내려다봤다.
국물이나 색은 식욕을 돋구는 색이 전혀라고 해야 할 정도로 아니었지만, 향은 꽤 괜찮다.
수저를 들어 국물을 입에 가져가자 달콤하면서도 짜고 진한 오묘한 맛이 혀 위에 넓게 펼쳐진다.
“...어때요?”
“...맛있어.”
처음 먹어보는 맛이지만 나쁘지 않은 맛이다.
무척 진하고, 먹으면 먹을수록 땀이 날 정도로 뱃속이 따뜻해진다.
나는 어쩐지 속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그레이프 건 어때?”
“제 것도 맛있어요. 많이 먹어요? 부족하면 더 시키면 되니까.”
그레이프는 그렇게 말했지만, 한 냄비로도 혼자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나는 굳이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식사했다.
장어에서 굉장히 진한...뭔가가 농축된 맛이 난다.
천천히 식사하고 있자 그레이프가 내 쪽을 힐끔거렸다.
내가 요리를 한입씩 삼킬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뱃속은 따뜻한데, 어째서인지 점점 추워진다.
오한을 없애려고 더 먹으면 먹을수록 따뜻한데도 오싹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원래 이런 느낌이 오게 만들어진 요리인가…?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냄비를 깨끗하게 비웠다.
“후우...잘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흐아암….”
식사를 마친 나는 갑자기 몰려오는 졸음에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밤 새고, 쇼핑하고, 따뜻한 음식으로 배까지 채우고 나니 잠이 쏟아진다.
그레이프는 내가 졸려 하는 것 같자 상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손에 받치며 말했다.
“피곤하죠?”
“응...그런가봐….”
긴장되어 있던 정신이 그레이프의 옆에서 조금씩 풀어져서 더 졸린 것 같기도 하다.
안심했다고 해야하나, 여긴 안전하다고 해야하나…비전폰도 있고, 최면어플도 있고, 그레이프도 있고….
나는 몰려오는 피로감에 눈을 비비며 몇 번이나 연속해서 하품했다.
“슬슬 집에 갈까요? 가서 씻고...좀 쉬다가 잘래요?”
“음...그러면 좋지….”
“그쵸~? 아, 짐은 나중에 제가 퇴근할 때 찾아올테니까...푹 쉬러 갈까요?”
“응?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택시 부를게요?”
그레이프의 말대로 빨리 씻고 자고 싶다는 생각에 멍하니 대답하자, 그레이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레이프에게 끌려가 식당 밖으로 나오자마자 운 좋게 바로 앞에 멈춰져 있던 택시에 밀어넣듯이 태워졌다.
차를 세우고 휴식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택시기사는 뷰튜브 채널을 보고 있었다.
[동물들은 짝을 유인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하죠. 맛있는 먹이, 잘 꾸며진 집…모두 자손을 남기는 방법입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사냥을 하고 있습니다. 사냥감을 방심시키는 건 사냥의 성공률을 크게 높여줍니다. 이런, 잠이 들었군요...야생에서는 이렇게 방심한 순간 그대로 잡아먹히고 맙니다.]
괴수가 침공한 뒤로 보기 힘들어진 자연 동물을 찍은 영상이 나온다.
나이 드신 분들이 옛날을 추억하기 좋다는 이유로 선호하는 채널이다.
택시기사는 그레이프와 내가 택시에 타는 걸 보고 뷰튜브가 나오던 화면을 네비게이션으로 바꾸며 물었다.
“손님, 목적지가 어디시죠?”
“일단 출발해주세요, 조용히...운전 살살 해 주시고, 쇼핑센터 벗어나면 말씀드릴게요.”
“흐아암….”
“많이 졸리죠? 도착하면 깨워줄테니까 일단 좀 자고 있을래요?”
“으음...그럴까...나 그럼 진짜 잠깐만 잘게….”
나는 그레이프가 옆에 있으니 안전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번에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레이프는 살짝 자세를 바꿔 내가 기대게 해 잠이 잘 오게 해 주고는 아이를 재우듯 천천히 내 다리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느릿한 박자로 두들겨지는 그레이프의 손바닥이 잠기운을 재촉한다.
“주소 이쪽으로 가주세요.”
그레이프는 나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 내 손을 잡고 팔을 껴안았다.
안전벨트를 한 것도 아닌데, 안정감이 들 정도로 전혀 흔들리지 않게 고정된다.
나는 차 안이 조금 추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