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화 > 기둥서방 (3)
호텔비를 내줄 수 없다는 말에 24시간 카페라도 찾아가 밤을 새울까 고민하던 나는 그레이프가 내놓은 대안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레이프의 집…생각지도 못한 방법이다.
애초에 그레이프가 매일 내 집에 찾아왔으니 내가 그레이프의 집에 간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생활이 변할 것 같지도 않다.
“집에 불 나서 피곤하죠? 심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호텔처럼 낯선 곳 보다는 익숙한 곳이 좋지 않을까요?”
“그레이프 집도 낯설 거 같은데…?”
“앞으로 익숙해지면 돼죠? 우리 집은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먹을 것도 냉장고에 많으니까...아니, 따로 잘 곳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그런데….”
“아! 우리 집에서 자면 세탁기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요! 앵거 가방에서 냄새나던거 물에 젖었다가 말라서 그런거죠? 건조기도 잘 돼요!”
“어….”
그레이프는 출근할 테고, 호텔비도 아껴서 좋고.
나쁘지 않은 방법이기는...하다….
내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자 그레이프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꽉 잡더니, 식사를 마친 테이블에서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얘, 얘기가 너무 갑작스럽죠? 일단 쇼핑하면서 생각해볼래요? 머리부터 좀 다듬고...옷도 사고, 맛있는 것도 먹고~비전폰도 사야죠!”
“응? 어, 그렇지?”
“일단 비전폰부터 사러 가요!”
그레이프는 내 손을 잡고 트루비전의 전자기기 매장으로 데려가더니 바로 새 비전폰을 사줬다.
원래 쓰던 구식 모델이 아닌, 래피드가 광고하는 최신형 프리미엄 모델이다.
더 빠르게, 안전하게 라는 래피드의 광고문구처럼 내가 가지고 있던 구세대 보급형 비전폰보다 강도도 더 높고 속도도 더 빠르다.
“비전폰이 저랑 똑같아졌네요!”
“그러게.”
나는 그레이프 사준 비전폰을 내 클라우드 계정에 연결시키며 대답했다.
최상위급 마법소녀인 그레이프와 다르게 나는 이런 좋은 비전폰을 써보는 게 처음이다.
나는 연동된 계정에서 비전폰이 알아서 내 메신저 자료와 연락처, 사진들을 가져오는 동안 최면어플이 든 데이터 칩을 삽입했다.
곧바로 문서를 찾아 최면어플 앱을 재설치하자, 처음 설치할 때 처럼 어플 최적화 0%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최적화가 끝나면 다시 최면어플을 쓸 수 있게 된다.
나는 다시 내 손에 돌아오게 된 최면어플에 안심하며 그레이프와 함께 전자기기 매장을 나섰다.
이어서 도착한 곳은 쇼핑센터 근처의 미용실이었다.
나는 와본 적도 없는 남성 커트 전문점이다.
머리 한 번 자르는데 샌드위치 다섯 개 가격이라니...대체 왜 이런 가격을 머리카락에 가위질하는데에 지불해야 하는 거지….
“머리 모양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대충 해 주세요...그냥 적당히.”
“아뇨! 옆머리 좀 깔끔하게 해 주시고요, 체격이 좋으니까 좀 시원하게? 아, 그래도 너무 짧게는 하지 말고…면도도 해 주세요.”
나는 내 머리스타일에 대한 선택권을 그레이프에게 빼앗겼다.
잠시 후, 면도까지 다 하고 거울을 비친 모습에 어색해하고 있자 어느새 결제를 끝낸 그레이프가 뒤에서 다가왔다.
그레이프는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계속 내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레이프...이거 옆이 너무 짧은 거 아냐?”
“너무 어울리세요! 처음 들어오실때는 백수셨는데, 지금은 깔끔하고, 체격도 좋고 턱선도….”
“아, 네, 감사합니다. 앵거? 결제 끝났으니까 빨리 나가요.”
“어? 어….”
억지로 나를 끌고나가는 그레이프와 함께 미용실에서 나와 쇼핑센터로 걸어가고 있자, 어느 순간부터인가 옆에서 그레이프가 내 팔을 감싸 안고 가슴을 살살 문질러오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부러운 눈으로 힐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레이프를 보고 수근거리는 목소리의 내용은...많이 달라져 있었다.
“와….”
“방위군이랑 여자친구인가…?”
“부럽다….”
그레이프 정도의 여자를 옆에 끼고 다니면 부러워 할 만하지.
그것도 그렇지만, 부정적인 단어가 완전히 사라져 있다.
거지에서 돈 많은 백수로, 돈 많은 백수에서 방위군 군인으로 또다시 신분상승한 나는 그레이프와 함께 옷가게에 들렸다.
“그런데 앵거...그 옷 응모해서 받은거에요?”
“어? 뭔지 알아?”
“모를리가 없잖아요...음…그 옷은 근데 이제 구하지도 못하는 옷이니까, 입지 말고 따로 소중하게 보관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나는 길거리 아줌마와는 다르게 확실히 보는 눈이 있는 그레이프에게 감격했다.
그레이프의 말대로, 이 옷은 이제 구하지도 못하는 아주 귀한 옷이다.
에스더 팬클럽인 유성우의 VIP 회원들이 유니폼처럼 입고 다니는 옷이기도 했다.
“이거 어때요? 앵거가 신고 있는 신발이랑 같은 라인으로 나온 운동복인데...이거 제가 광고하는 거에요. 이게 앵거한테 훨씬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뭐, 신발이 같은 디자인이니까...근데 이렇게 입으면 누가 봐도 그레이프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지 않을까...보통 열성팬이 아닌….”
“입어보고, 몸에 맞는 거 가져와요! 사줄게요!”
나는 그 후로도 몇 벌인가 되는 옷을 그레이프가 골라준 대로 갈아입고, 구매했다.
어느새 양 손에 새 옷을 가득 들게 된 나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그레이프가 광고하는 옷으로 차려입고 쇼핑센터 밖으로 나왔다.
다른 옷을 입으려고 했지만, 그레이프가 지금 신발에는 이 옷이 제일 어울린다며 억지로 입게 했다.
그 사이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지, 쇼핑센터 밖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계획에 없던 쇼핑에 피곤함을 느끼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했다.
그 모습을 본 그레이프는 비전폰으로 뭔가를 하다가 내게 고개를 향하더니 상냥하게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피곤해요~? 하긴, 점심때부터 계속 돌아다니고, 옷도 몇 벌이나 갈아입었으니까…집에 가기 전에 슬슬 저녁밥 먹으러 갈까요? 배고파졌죠?”
“어...응.”
그 말대로 마침 배가 고파진 나는 활짝 웃으며 팔을 잡아당기는 그레이프에게 이끌려 식당으로 향했다.
도착한 식당은 조용한 술집 같은 곳으로, 전골 요리를 하는 곳이었다.
가게 안은 칸막이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고, 어째서인지 중년 정도의 남녀 커플이 많이 보인다.
“여기 무슨 식당이야?”
“모...몸에 좋은 걸 하는 식당이에요, 앵거 많이 피곤할 것 같아서….”
식당으로 걸어오면서 그레이프가 계속해서 비전폰을 만지던 걸 생각해보면 그레이프도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비전넷에 검색해서 찾은 식당 같았다.
좌석에 앉아 메뉴판을 받은 나는 어떤 요리를 하는 식당인지 궁금해 메뉴를 살펴봤다.
메뉴를 읽기도 전에 큰 글씨로 ‘활력의 상징, 100% 자연산 장어전골에 비법 소스를 사용! 30년 장사를 걸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다.
이상하게 허리 부근이 오싹해지는 문장이다.
“이걸로 주세요! 아…저 비전넷 보고 왔는데…이쪽은….”
“아하…알겠습니다 손님, ‘엑기스’ 말이시죠?”
“저기…조용히….”
“죄, 죄송합니다. ‘스페셜 전골’ 하나, 활력 전골 하나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어? 나 아직 메뉴 안 골랐는데….”
30대 정도가 되어 보이는 여직원이 찾아오자 그레이프는 멋대로 요리를 주문하고는 내가 보려던 메뉴판을 뺏어 직원에게 건네줘 버렸다.
여직원은 나를 한번 힐끔거리더니 입가를 가리고 웃으며 컵에 검은색의 차를 따라줬다.
따뜻하게 김이 오르는 걸 보고 이게 뭔가 싶어 냄새를 맡아보니 비린 향이 느껴졌다.
“그레이프, 뭐 시킨거야?”
“맛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뭐…?”
“...스페셜 전골은 이 가게 특별 메뉴고, 활력 전골은 장어랑 전복이 들어간 전골이에요. 앵거는 스페셜, 저는 활력...맛있다고 유명한 가게에요.”
“음….”
맛있으면 상관은 없지만...이상하다, 왜 이렇게 춥지?
가게 안에는 냄비 요리가 끓는 소리가 가득하고, 뜨거운 공기로 가득 차 있는데…묘하게 오싹하다.
나는 몸을 떨며 손에 잡고 있던 따뜻한 차를 조금 마셨다.
향은 비린 주제에 고소하고 깊은, 무거운 맛이 난다.
“...D 시는 어땠어?”
음식이 요리되는 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는 그레이프와 눈을 마주친 나는 그레이프를 오랜만에 봤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D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무사히 돌아온 걸 보면 별일 없었을 것 같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이런 걸 질문하는 건 기본적인 예의다.
그런데, 그레이프는 내 질문을 듣고 대답하기 곤란한 듯 시선을 피했다.
“어….”
“...대답하기 좀 그래?”
“아뇨, 그게….”
별 일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있었던 걸까?
나는 차를 전부 마신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그레이프가 D시에 간 이유를 떠올렸다.
촉수괴수가 이상하게 많이 발생해서 마법소녀들이 끌려갔고...그걸 구조하기 위해서 가는 거였나....
“구조하면서 다른 마법소녀한테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음...하아, 아뇨, 사고가 생긴 건 아닌데….”
“그럼…?”
“사건...이라고 해야하나, 이상한 일은 있었어서….”
사고는 아닌데, 사건은 있었다….
마법소녀가 다치거나, 죽은 건 아니지만 뭔가 일이 있긴 했던 모양이다.
그레이프는 팔짱을 끼고 가슴을 모아 올리며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딱히, 앵거가 고민할 일은 아니긴 한데...C시의...해방안락교...괴수교 알아요?”
“어? 어….”
해방안락교, 괴수교는 괴수와 함께 해 억압된 세상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과 안전, 쾌락을 얻자는 교리...에, C시에 본부를 가지고 있는 신흥 종교다.
종교라고 해야 할까, 미치광이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그 괴수교가 대체 왜 갑자기 얘기에 나오는 걸까.
“D시에 도착해보니까...그쪽에서 사람을 보내서 마법소녀들을 전부 구출해 놨더라고요.”
“괴수교에서?”
“잘못된 건 아닌데...이상해서...잘못된 마법소녀는 한 명도 없었고, 남은 기간 동안 그거 조사하다가 왔어요.”
그레이프의 말대로 괴수교가 마법소녀를 구출하는 건...잘못된 일은 아니다.
괴수교의 교주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마법소녀이기 때문이다.
그것도...상당한 순위의, 5위의 마법소녀다.
5위임에도 불구하고 사이비 교주가 되며 공석 취급받게 된, 그런데도 측정된 파워 레벨만큼은 상당히 높아 기록상으로 아직까지도 그레이프를 앞서고 있는 마법소녀.
교주가 되기 전의 이름은 테트라, 현재 자신을 칭하는 명칭은 테트라 그라마톤.
아무리 교주가 되었다 해도 최상위의 마법소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보기에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일이지만...확실히,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