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화 > 기둥서방 (1)
주변 사람들이 그레이프와 나를 보며 수근거린다.
그레이프는 회사 사람들이 뭐라고 말해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마법소녀니까, 내 귀에 들리는 건 분명 그레이프의 귀에 더욱 선명하게 들리고 있을 텐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데...긴장이 풀려서 잠깐...좀 기대고 있다 가도 돼요?”
“이미 기대고 있잖아….”
기대고 있으면서 기대도 되냐고 묻다니, 행동의 앞뒤가 뒤바뀌어있다.
일단 하고나서 허락을 받는다는, 게임기를 아내 몰래 사는 유부남이 할 법한 행동을 한 그레이프는 기분 좋은 듯 내 어깨에 얼굴을 비벼댔다.
나는 회사 사람들이 더 시끄럽게 떠들 것 같아 그레이프를 슬쩍 밀어냈다.
“진짜 걱정 많이 해서...하아...진짜...무사해서 다행이에요...아, 힘빠져….”
“지금 이게 힘이 빠진거라고?”
“조금만….”
“아니...저기요…밥 먹으러 가자면서....”
그레이프는 이상할 정도로 내게 달라붙어 나를 놔 주지 않았다.
힘이 너무 세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정말로 남들 다 보라는듯이 행동하는 그레이프의 모습에 당황한 나는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그레이프를 밀어냈다.
“앵거…! 이...이 새끼가...팀장님한테서 손 떼!”
그때, 그레이프가 나를 껴안고 있는 걸 보고있던 과장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나는 그레이프를 밀어내던 걸 멈추고 과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과장은 초점이 나간 눈을 빠르게 떨며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
나는 그레이프를 밀어내고 있고, 그레이프는 두 손으로 내 팔을 잡아 가슴 사이에 내 팔이 끼워질 정도로 끌어안고 있다.
이건 내가 아니라 그레이프가 나한테 손을 대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과장은 그레이프와 나를 손가락질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아니죠? 그럴리가 없어...저 놈이랑, 저런 놈이랑 그런 관계일리가….”
“그런 관계?”
“떨어져...떨어지라고!”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눈빛과 목소리가 보기 안 좋다.
나는 조금 전의 여직원처럼 이상하기만 한 과장의 반응에 그레이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대로 그레이프에게 귀를 가까이 대라고 손짓하자 그레이프는 순순히 고개를 돌려 내게 귀를 내밀었다.
“...왜 저래?”
“몰라요?”
“둘이 어떤 관계야! 당장 말해!”
과장은 내가 그레이프와 서로 귓속말을 나누는 걸 보고 발작하듯 소리쳤다.
나이 먹은 어른이 울먹이며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그리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는 과장과 잠시 눈을 마주치다가 좋은 생각이 나 그레이프가 안고 있는 팔을 움직여 보란듯이 그레이프의 엉덩이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 보니, 과장은 내가 그레이프와 가까워 보인다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언제나 그레이프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어했다.
아마도 이건 질투...아니,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질투한다는 건 이상하긴 하지만 질투 비슷한 감정은 맞겠지.
그런 과장에게 지금 이 광경은, 그레이프가 커다란 엉덩이를 맘대로 만져지면서도 얌전히 있는 모습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무슨 관계냐니...이런 관계?”
“아...아아아…!”
“아….”
내게 엉덩이를 쓰다듬어지던 그레이프는 천천히 내 팔을 놓고 허리를 끌어안아 내게 기댔다.
그 모습이 내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를 자랑해도 좋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지면에 무릎을 꿇고 절규하는 과장을 내려다보며 그레이프의 머리를 간지럽히듯 쓰다듬었다.
“그, 그만둬….”
잔디머리의 아저씨가 하는 것 치고는 상당히 보기 좋은 얼굴이다.
절망감과 패배감이 가득 엿보이는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나는 묘한 쾌감에 젖어 그레이프의 허리를 쓰다듬고 쇄골을 간지럽히며 내 맘대로 그레이프를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과장에게 자랑했다.
“아아어아아악!”
이러려고 회사에 온 건 아니지만, 무슨 관계인지 말하라고 한 건 과장이다.
그레이프랑 섹스하는 친구사이라고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 정도면 충분알아들었겠지.
과장이 절규하는 모습을 즐겁게 관람하던 나는 충분히 만족한 뒤 주변을 둘러봤다.
“어….”
그러고 보니 회사 사람들이 이상하게 조용하다.
그레이프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시끄럽게, 내게 언어폭력을 하며 즐거워 하고 있었는데...뭐지.
내가 그레이프의 엉덩이를 마음대로 만지는 걸 보고 넋이 나간 건가.
회사 사람들의 성격이나 행동을 생각하면 슬슬 그레이프의 몸을 마음대로 만지는 나를 욕할때가 됐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침묵이 이상하게 기분 나쁘다.
이상하게...아니, 이상한데 역시….
그러고 보니...모든 사람들은 누군가가 건 최면에 걸려있다고 했지.
다른 사람들도 이상하지만...회사 사람들이 특히 이상한 것도 혹시 최면 때문인 게 맞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최면은 대체 어떤 내용인 걸까?
그레이프랑 누군가가 가까워지는 걸 막는 최면…?
지금은 왜 이렇게 조용해져있지?
초점이 나간 채 어딘가 망가진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시선들이 오싹하다.
“...그레이프, 이제 가자. 배고파.”
“앗, 네.”
나는 빨리 이 기분나쁜 공간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그레이프를 재촉했다.
과장 놀리기는 충분히 만족했다.
최면은 다음에 X한테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 멀리 떨어져서 그레이프랑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비켜주세요~지나갈게요~”
“네, 네….”
“알겠...습니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부탁하자 순순히 자리를 비켜줬다.
길을 막고 있는 사람에게 비켜달라 하면 비켜주는 건 당연한데...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다.
그렇게 회사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려는 순간, 등 뒤에서 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네가 나보다 나은게 뭔데!”
그때, 과장이 갑자기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과장의 머리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내 오른쪽에서 뭔가가 흐릿하게 움직이는게 느껴졌다.
“웁...욱…! 우웨에엑…!”
“힉?! 더러워!”
과장은 내게 달려들다 말고 고개를 숙여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그레이프는 나를 끌어안아 슬쩍 들어올리더니 과장의 토사물이 묻지 않게끔 나를 옆으로 치워줬다.
더럽다.
“우와...놀랐네, 사람한테 왜 갑자기 달려드는거야.”
“...과장님 주말동안 또 술마셨나보네요.”
“그런거야?”
“얼른 가요.”
술을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이 시간에 토를...아니, 내가 그레이프를 맘대로 만지는 걸 보고 충격받아서 속이 뒤집어지기라도 한걸까….
나는 그레이프와 함께 더러운 과장을 두고 지나쳐 회사 근처에서 벗어났다.
...그레이프랑 다닐 때 이상하게 쓰러져서 토하는 남자를 자주 보는 것 같다.
“회사 사람들 앞에서 그래버려서 다들 제가 앵거랑 특별한 관계인 줄 알겠어요….”
“어….”
“아, 싫다는 게 아니라...안 그래도 요즘 부장하고 과장이 자꾸 귀찮게 해서 짜증나기도 했고 오히려 좋은...앵거?”
전에는 칵테일 바에서, 그 다음에는 슈퍼에서, 이번에는 과장….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져 구토한다는 건 그렇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설마 이것도 최면 때문인 건 아닐까?
최면...모든 사람들...그레이프...이상한 사람...그레이프랑 같이 있을 때, 그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많다….
그레이프랑 관련된 최면...마법소녀가 TV에 나오면 다같이 돌아보는 이상한 모습….
그레이프, 래피드는 최면에 대해서 모르는 걸까….
모르는 것 같기는 한데...왜지...에스더는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에스더는 네거티브...애쉬도...아나?
X...리프는 내 질문에 최면이 두 종류가 있다고 했을 정도니, 자세하게 알고 있는게 틀림 없다.
마법소녀...최면….
“앵거, 앵거?
“어?”
“무슨 생각 해요?”
나는 그레이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하던 생각을 멈췄다.
...최면에 대한 생각은 지금 내가 아무리 해봤자 어디까지나 추리일 뿐이다.
어차피 X가 깨어나기만 하면 물어볼 수 있으니, 지금 애써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 그냥...그, 과장이나 다른 회사 사람들 생각….”
“과장님은 왜요…?”
“그냥 말하는거나 행동이 조금 신경쓰여서?”
“과장님이 한 말이…?”
대충 얼버무리며 말하자 그레이프는 내 팔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하더니,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 말은 신경쓰지 마요, 정말...그 인간, 계속 귀찮게 하기나 하고...앵거가 훨씬, 훨씬 나은데 무슨 이상한 소리까지...분명 어제 술을 엄청 마시고 취한걸거에요.”
“응?”
“맞아요, 아까 계속 얘기하는데 어찌나 술냄새가 나던지...아니, 술에 안 취한걸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무례하고, 자꾸 함부로 손대려 하고...손대게 한 적은 없지만요?”
“어…? 어….”
무슨 말을 신경쓰지 말라는 거지…?
나는 혼자 떠들기 시작한 그레이프의 얘기를 들으며 내가 혹시 대화중에 뭔가 놓친 게 있나 싶어 기억을 더듬었다.
왜 갑자기 이런 얘기가 나온 걸까.
“그리고...무슨 자기가 어딘가 앵거보다 나은것처럼 얘기하는데, 앵거가...머리카락도 훨씬 풍성하고, 몸도 좋고...음….”
그레이프는 얘기하다 말고 주변을 둘러보며 내 팔을 잡아당기더니, 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지도 앵거가 크고 딱 맞아서 기분 좋아요….”
“어?”
나는 그제야 그레이프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이해했다.
무슨 얘기인가 하니, 과장과 나를 비교해 내가 훨씬 낫다고 얘기하고 있는 거였다.
내가 과장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라는 건 당연한 건데...왜 그런 잔디머리보다 내가 낫다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얘기를 하고있는 걸까.
그건 둘째치고, 그레이프의 얘기에서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말을 발견한 나는 설마 하며 물었다.
“그레이프...과장 걸 본 적이 있는거야…?”
“...네?”
“과장이랑 비교하다가 갑자기 내 자지가 더 기분 좋다고….”
“앵거 씨.”
“잘못들었나봐, 미안.”
나는 그레이프의 상냥해 보이면서도 살벌한 목소리에 떨며 곧바로 사과했다.
하긴, 나보다 좋다는 게 아니라 그냥 과장은 별거 없고, 나는 기분 좋다는 칭찬이었지.
재빠르게 바로 사과했지만, 그레이프는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을 계속했다.
“아무리 앵거여도 그런 상상 하게 하면 진짜 기분 나쁘니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