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화 > 거지 (6)
나는 주변의 사람들이 떠드는 멍청한 대화를 듣고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됐다.
이 사람들, 평소에는 머리 잘 쓰는 사람들이면서 왜 이렇게 머리를 회사에 두고 온 것 마냥 얘기하는 걸까…?
혹시 내가 찾아오면 이렇게 괴롭히기로 미리 얘기해 둔 건 아닐까…?
“...따로 얘기할 게 있는데 연락이 안돼서 왔습니다. 됐어요?”
“이거 봐, 말하는 거 보니까 스토킹하러 온 거 맞네!”
“예?”
“스토커가 하는 말이잖아요!”
나는 괜히 더 귀찮아지기 전에 스토커 얘기를 끝내고자 순순히 내가 온 목적을 얘기했다.
하지만, 여직원은 대체 어째서인지 내 말이 스토커가 하는 말과 똑같다고 주장해왔다.
...대체 뭐지?
뇌구조가 어떻게 된건지 궁금해진다.
“하, 진짜...진짜 주제넘는다...팀장님이 회사에 있을때 잘해줬다고 그게 앵거씨가 좋아서 잘해준 걸로 착각하는거에요?”
“어...예?”
“공과 사 구분 못하세요?”
“예…?”
나는 계속해서 왜 이렇게 되는지 알 수 없는 얘기를 들으며 혼란에 빠졌다.
예라고밖에 하지 않은 것 같은데...얘기가 멋대로 진행되고 있다.
여직원은 계속해서 내가 그레이프를 어떻게 하려 한다고, 그레이프에게서 나를 떼어놔야만 한다는 망상에 걸려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앵거 씨도 어디에서 팀장님이 엄청 좋은 남자 만나고 있다고 소문 듣고 다급해져서 이상한 수작 부리려 하나본데...꿈 깨시죠?”
“아, 예...그래서 그레이프는 오늘 출근 했나요? 아니면 할 예정인가요?”
“꿈 깨시라고요.”
“출근 했냐니까? 말 안할거면 그냥 가세요.”
“꿈 깨시라고요!”
나는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 내가 원하는 질문만 하기로 했다.
그러자 여직원은 내게 똑같은 대답만 반복하며 비웃음과 경멸이 섞인 눈빛을 보냈다.
나는 정말 이번에도 대답 안하면 여자고 뭐고 죽어라 패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여직원을 노려보며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출근, 했냐고.”
“히...힉…?!”
그러자 여직원은 이상하게 겁먹은 표정을 짓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초점 잃은 눈이 더 심각하게 풀리며 어딘가 확실히 잘못되었다는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흔들린다.
여직원은 이빨을 부딪치며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오, 오, 오, 오셨...어요...오셨...아까, 삼십 분 전에….”
“응?”
여직원은 조금 전까지 자기가 하던 행동을 잊은 것처럼 얌전해졌다.
짜증을 내던 나는 원하던 대답을 듣고 그레이프가 회사에 이미 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에 한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갑자기 왜...제대로 대답하지?
여직원 뿐만이 아니다.
시끌시끌하기만 했던 주변 사람들도 전부 조용해졌다.
뭔가...이상하다.
“...그러니까, 팀장님, 남은 보고는 같이 식사하면서 드리면....”
“제가 점심시간동안 할 일 하면서 볼 수 있게 종이로 전부 출력해 두라고 제가 분명히 오면서 연락 했을텐데요?”
그때, 회사 빌딩의 출입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나와 여직원을 원형으로 감싸게 된 사람들 탓에 아직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그레이프의 목소리가 확실하다.
사람들도 그레이프가 회사에서 나왔다는 걸 눈치챘는지 좌우로 서서히 갈라서며 그레이프에게 길을 내줬다.
“그러지 마시고...종이로는 제대로 보고할 수 없는 내용이….”
“점심에 따로 볼 일이 있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그러니까 그 볼 일을 제가 도와드린다고….”
“도와드릴 수 없는 일이라고 했잖아요.”
그레이프는 보기 드물 정도로 화가 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타났다.
사람들이 주변에 이상할 정도로 많다는 걸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시선은 손에 든 비전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바로 끊고, 메시지를 보내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니,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입구에 많이….”
그레이프의 옆에는 잔디같이 머리를 올린 과장이 쩔쩔 매며 바로 옆에 붙어 따라 걸어가고 있다.
과장은 주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고 나와 여직원에게 한번 시선을 보내더니, 내가 누구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시선을 돌리며 그레이프에게 가까이 붙었다.
과장은 마침 자리에 멈춰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던 그레이프의 어깨에 손을 슬쩍 올리려 들었다.
“그러지 마시고...참, 표정도 안 좋고 힘든 일 있으신 것 같아서 도와드리겠다는데….”
“과장님, 제 어깨에 함부로 손 대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곧바로 과장의 손목을 쳐내더니 날이 선 목소리를 내며 살벌하게 노려봤다.
과장은 그레이프의 눈빛에 겁을 먹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뒷걸음질쳤다.
그레이프는 그대로 고개를 홱 돌리더니 다시 비전폰에 시선을 집중하고 손톱을 입에 물었다.
그레이프는 그대로 과장을 내버려두고 내게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옆으로 돌아 나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평소에는 실수하면 부서져 버릴 유리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러워서 여성스럽게만 보였던 걸음걸이가 오늘따라 거칠고 난폭하다.
그레이프는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이 아닌 콱, 콱 하는 소리를 내며 걷다가 멈춰서 전화하고, 다시 걷다가 멈춰서 울상을 짓기를 반복했다.
D시에서 안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나는 비전폰을 사고 모텔에 머물 돈을 빌리기 위해서라도 일단 그레이프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나는 무서울 정도로 예민해져있는 그레이프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키며 가까이 다가갔다.
“저기….”
“아아아...진짜, 왜 안 받는거야...진짜….”
“그레이프…?”
가까이 가서 불렀는데도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반응하지 않는다.
나는 또다시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그레이프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 손목을 잡아 비틀고는, 고개를 돌려 죽여버릴 것처럼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내 몸에, 함부로 손 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으아아악…! 소, 손목…!”
“당신은 또 누구...우?”
그레이프는 내 손목을 비튼 채 멈춰서 천천히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로 몇 초 정도인가 가만히 멈춰서 내 얼굴을 보고 있던 그레이프는 갑자기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내 손을 놓고, 다시 붙잡은 그레이프는 기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앵...거어어어?!”
그레이프는 내 손을 보고, 양팔을 잡고, 옷을 살펴보더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며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수염이 까칠하게 난 턱을 확인하듯 만지고, 떡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넘긴다.
그레이프는 주변의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내게 달라붙어 내 몸을 만지며 조금 전의 날선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를 냈다.
“여기서 뭐...아니, 옷은...어? 이 옷...아니, 머리는 왜 이래요?! 수염...왜 연락이 안되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아니, 잠깐...그레이프, 잠깐….”
나는 자꾸 가슴을 밀착시키며 머리를 만지는 그레이프의 어깨를 잡아 밀쳐냈다.
고의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발기할 것 같다.
그리 좋지 않은 의미로 잔뜩 흥분한 그레이프는 내가 거리를 벌리자 조금 진정했는지 눈을 깜빡이며 뒤늦게 내 등에 있는 커다란 가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배낭은 왜 매고 있어요?”
“어….”
“...무슨 일 있었어요?”
내가 등에 매고 있는 건 그냥 들고 나온 거라고 하기에는 과도할 정도로 큰 크기에, 물건이 가득 차 있었다.
나를 거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가 봐도 무슨일이 있었다는걸 알 수 있는 옷차림이었다.
나는 딱히 돌려 말할 것도 없다는 생각에 배낭을 고쳐 매며 말했다.
“...집에 불 났어.”
“네?! 아니, 안 다쳤어요?!”
“어, 응...다친 데는 없는데...비전폰이 타서....”
“비전폰이 탈 정도의 화재였다고요?! 화, 화상 입은 거 아니에요?!”
“잠깐, 잠깐?! 잠깐?!”
그레이프는 갑자기 내 운동복 지퍼를 잡아 내리고는 내 셔츠를 들어올려 배에 상처가 없는지 확인했다.
나는 그대로 한 손을 밑으로 뻗는 그레이프의 손목을 다급하게 잡아 멈춰 세웠다.
말리지 않으면 바지까지 잡아당겨서 안쪽도 확인했을 것 같은 기세였다.
복근이 드러나자 그레이프의 뒤에 언제부턴가 서 있던 여직원이 우와…하고 감탄하는 소리를 낸다.
여직원의 목소리를 들은 그레이프는 팍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내 셔츠를 잡아 내렸다.
그제야 이 곳이 회사 앞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그레이프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저게, 아니 저 사람이 설마….”
“아니, 아닐거야...아니….”
“그래도...그건...방금 그건...가슴 문지르고, 너무 가까운...데.”
“아냐...아닐거야…!”
“몸 좋다….”
그레이프의 얘기로 시끌시끌하던 회사 사람들은 전부 나와 그레이프를 바라보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있던 그레이프는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불이 나서 연락이 안 된 거였구나...하아아...그렇구나...대체 어쩌다 불이 난 거에요?”
“전기 합선...몰라, 나도 불이 나고 나서 합선때문에 불이 난 것 같다는 말만 들은 거라서….”
“정말 안 다쳤어요? 아픈 곳 있는데 놀라서 안 느껴지는 거 아니죠?”
“안 다쳤다니까.”
“하아아아….”
그레이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 가슴에 이마를 댔다.
복잡한 감정이 한숨에 섞여 새어나오는게 느껴진다.
나는 내 옷을 잡고 내게 얼굴을 묻은 채 심호흡하는 그레이프의 모습에 어색하게 손을 들고 서 있다가 과장과 눈을 마주쳤다.
“티...팀장...님? 앵거...라고?”
과장은 초점이 나간 눈을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떨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벌어진 입이 닫힐 줄을 모른다.
나는 지금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을 것처럼 눈을 깜빡이는 과장을 보며 웃다가 그 너머에 서 있는 여직원과 눈을 마주쳤다.
얼어붙은 듯 멈춰서 멍한 눈을 하고 있는 모습이 저열한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아, 그레이프...나 참 부탁할 거 있는데.”
“뭔데요?”
“돈좀 빌려줘.”
“얼마 정도면 돼요?”
여직원과 과장의 얼굴을 충분히 즐긴 나는 그레이프를 다시 떼어 내며 그레이프를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그레이프를 만나러 온 건 돈을 빌려 비전폰을 사고, 카드 재발급이 되기 전까지 잠시 머물 곳의 숙박비를 빌리기 위해서다.
얼마나 들지 자세히는 몰라도, 적은 돈은 아니다.
“좀 많이…?”
“집에 불 나서 돈이 없는거죠?”
“응.”
“알았어요.”
그레이프는 순순히 내게 돈을 빌려주겠다고 대답했다.
얼마라는 말도 자세히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간단히 빌려주겠다는 말을 하다니....
어차피 비전폰이 복구되고 카드를 재발급 받고 나면 갚을거지만...이 망설임 없는 대답이 대단하다.
“앵거...그러면 혹시 밥도 못 먹었어요?”
“응? 그러게...밥 안 먹었구나.”
“...일단 밥부터 같이 먹을래요?”
“음….”
“오랜만에 봐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걱정도 되고, 물어보고 싶은것도 있고...얘기하면서 먹으면 좋을 것 같은데....”
“아니, 나 돈이 없어서...그레이프가 사주면 먹을게.”
“사줄게요!”
리프에게 쫓기고, 납치당하고, 애쉬에게 고문당하고, 집에 불이 나고...이런저런 사건에 쫓기며 정신이 없었던 탓인지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그레이프가 내 허리를 안으며 한 말에 태연하게 밥을 사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밝은 목소리로 내게 밥을 사주겠다 대답했다.
“팀장님, 남자 취향이….”
“기둥서방….”
“말도 안 돼….”